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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름의 하루
우리 동네 공원 수영장
삼십 분 넘게 수영을 했더니 손가락 끝이 쪼글쪼글해졌다. 그 모습이 어쩐지 낯설다. 어릴 적 목욕탕에 갔을 때 이후 얼마 만에 손끝이 쪼글쪼글해진 건지 모르겠네. 물속에서 삼십 분 정도 있으면, 손가락이 이렇게 되는구나. 십 분 정도 더 수영을 하며 내내 나의 쪼그라든 손가락에 대해 생각했다.
수영 강습의
기억
나는 어린 시절 기억을 거의 못 하는 편인데, 수영을 배우며 있었던 일은 드문드문 기억난다. 가령 수영장 가장자리에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물장구를 치던 장면 같은 것. 그때 선생님은 무릎과 발목은 일자로 쭉 펴고, 발가락을 가볍게 모아 오므린 상태로 부드럽게 물장구를 치라고 알려주었다. 다리를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첨벙거릴 때마다 우리는 깔깔 웃었다. 그땐 그런 게 뭐가 그렇게 재미있었을까. 배영을 배우고 마지막으로 평영을 배웠다. 먼저 물 밖에 서서 허공을 가르며 손동작을 배우고, 그다음 엎드려 다리만 물 쪽에 두고 발동작을 배웠는데, 손과 발의 동작을 합치기 전에 그만두었다. 왜 그만두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다 성인이 되어 다시 수영을 시작했다. 서른 살 이후 생긴 고질적인 무릎 통증 때문에 다른 운동을 하기 어려운 나에게 최선은 수영뿐이다. 수영장은 집에서 차로 십오 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새로운 걸 배웠다기보다는 어린 시절에 배운 것들을 하나씩 다시 기억해내는 시간이었다. 수영이랑 자전거, 운전은 배워두면 잊지 않는다더니 정말이었다. 초급반에서 내가 제일 잘했다. 오랜만에 수영을 하니 즐거웠다. 그런데 살던 도시에 수영장이 몇 군데 없었고 그나마도 시설이 좋지 않아 갈 만한 공립 수영장은 등록 경쟁이 무척 치열했다. 한 달에 한 번 새벽에 일어나 줄을 서는 일을 몇 번 하다 그만두었다. 역시나 평영까지는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동네 공원에
체육관이
집에서 걸어서 오 분 거리에 공원이 있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큰 공원인데, 특별한 시설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주로 드러누워있거나 친구, 가족, 연인과 함께 와인이나 맥주를 마신다.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매트를 펼치고 요가를 하는 사람도 있고, 나무 사이에 줄을 잇고 외줄 걷기를 연습하는 사람도 있다. 공원 한쪽 탁구대에서 탁구를 치는 사람도 있고, 공원 사이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있고, 조깅을 하는 사람도 많다. 넓은 공원 여기저기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저마다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말하자면 이곳 사람들에게 공원은 휴식 장소이자, 놀이터이자, 체육관인 셈이다.
나는 그 공원을 좋아한다. 축복 받은 날씨를 누리며 사람들이 즐겁게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걸 보고 있자면 내 기분도 어김없이 밝아진다. 한번은 나도 그들 틈에 끼어볼까 싶어 비치 타월과 책 한 권, 그리고 샌드위치를 들고 공원에 간 적이 있다. 타월을 깔고 앉았는데 어디선가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아뿔싸, 개똥 위에 타월을 깔았다. 그러니까 공원에서의 여유도 부려본 사람이 부릴 수 있는 것이었다. 아, 그러니까 바르셀로나 사람이라면 개똥쯤은 피해서 능숙하게 자리를 잡았어야지.
아무렇지 않은 척 더러워진 타월을 접어 들고 일어서면서 약간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공원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각자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한 걸음 떨어져서 보는 내 시선에 그들은 모두 아는 사이 같다.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 이건 여기에 친구가 있거나 가족들이 있다고 해서 채워지는 감정이 아니다. 그들과 나 사이에 넘지 못할 선이 하나 있었다. 그 아름다운 공원에서 나는 완전히 이방인이다. 공원을 돌아 나오는데, 평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공원 입구 실내 체육관이 눈에 띈다. 지하에 수영장이 있고, 일층에 농구장이 있으며, 이층에는 헬스장과 요가 등 각종 실내 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이 있고, 옥상에는 야외 수영장이 있다. 이용료는 한 달에 5만원. 등록비를 7~8만원 내야 하는데, 마침 등록비 반값 할인 행사를 한다. 충동적으로 회원권을 끊었다. 우와, 바르셀로나 공립 체육관 회원권이 생겼다! 어쩐지 이제야 진짜 동네 주민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설렜다. 이제 나도 공원에 가면 갈 곳이 생겼다.
단순한
시간
아침에 일어나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걸어서 체육관에 간다. 체육관 문을 여는 순간 코끝에 닿는 염소 냄새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남편은 농구 코트로 가고 나는 지하 수영장으로 향한다. 강습을 따로 받지는 않고 자유 수영을 하는데, 어느 시간에 가더라도 레인 하나는 비어있어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으며 내 속도대로 물살을 가를 수 있다.
능숙하지 않은 실력이라 여전히 호흡은 엉망이고 자세도 정확하지 않다. 그렇게 호흡하면 안 된다며 호흡법을 알려준 사람만 벌써 여러 명이다. 낯선 동양인이 헉헉거리며 수영하는 게 안타까워 보이는지 그들은 하나같이 열심히 알려주려고 애쓰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스페인어를 반쯤밖에 못 알아들었지만 그냥 이해한 척 “씨씨(네네).” 하고 만다. 그러면 그들은 굉장히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물살을 가르고, 나는 그들에게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에 “음, 파, 음, 파.”를 열심히 반복한다. 여러 번 왕복하는 동안 손가락 끝은 점점 쪼글쪼글해지고, 그러는 사이 수영 실력도 아주 조금씩 늘고 있다.
지하에 있는 수영장이지만 높은 천장 가까이 넓은 창이 있어 내부로 빛이 잘 든다. 빛은 물에 닿으면 투명하게 반짝거린다. 그 맑은 빛을 가르며 수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황홀한데, 가끔 빛과 물이 만나 무지개가 생겨 흔들리면, 내 마음도 함께 출렁거려 어쩔 줄을 모르겠다.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을 다 털어, 수영장에 있는 이 시간이 가장 좋다. 나의 호흡과 물속으로 떨어지는 빛과 쪼글쪼글해진 손가락에 대한 생각만 하며 보낼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시간. 아마도 평영은 영원히 배우지 못하겠지만, 그런 건 하나도 상관없어지는 시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하루
삼사십 분 농구를 한 남편은 헬스장으로 가서 마저 운동을 조금 더 하고, 그러는 사이 나는 비키니로 갈아입은 후 체육관 옥상에 있는 작은 야외 풀장으로 가서 선 베드에 드러눕는다. 발끝에는 얕은 수영장이 있고, 수영장 너머에는 늘 사람들로 붐비는 공원이 있다.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살을 덮고 누워있자면, 잠이 솔솔 온다.
적당히 나른한 상태로 집에 오는 길, 남편은 시장에 들러 장을 보고 나는 먼저 집으로 와 수영복과 운동복을 빨아 널고, 쌀을 씻어 밥을 안친다. 그때 즈음 시장에서 돌아온 남편은 요리를 시작한다. 나는 이 여름의 하루가 정말 좋았다. “나중에 바르셀로나 생활을 돌아봤을 때 뭐가 가장 그리울까?”라는 질문을 우리는 서로에게 자주 던지는데, 여름이면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수영장. 수영장을 오가는 시간을 포함한 그 모든 시간.”
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