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선택으로 일구는 자리

문예진·김진호 — Oth,

숱한 실패에도 사람은 계절과 시간을 통과하며 조금씩 단단해지는 법을 배운다. 집은 사람이 뿌리내린 땅이 되어, 삶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자리로 남는다. 두 사람의 오롯한 선택으로 튼튼히 다진 이 자리에서 진호와 예진은 가장 자신다워지고 있다.

이 집에 오기 전에는 집에 가기 싫어서 계속 밖으로만 돌아다녔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거겠죠. 그런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져요.

공식 대신, 우리만의 정답으로

예진 씨는 저희와 몇 차례 함께해 주신 적이 있지요. 이번에는 ‘집’이라는 주제로 두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어요.

예진 한 번 찾아주신 곳에서 다시 연락을 주신다는 게 사실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아, 우리가 그동안 잘 살아왔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감사한 마음이 컸어요. 무엇보다 저희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용기가 났고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각자 편하게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예진  저는 브랜드 ‘Oth,’에서 전반적인 기획이나 방향을 잡는 일을 하고 있어요. 주로 상품 초기 단계에서 아이디어를 꺼내고 일을 벌이는 쪽에 가깝죠.

진호 저는 예진 님의 남편이고 Oth,를 함께 운영하고 있어요. 브랜드에서 판매하는 몇몇 상품은 제가 직접 제작하고, 회계나 택배처럼 실무적인 부분도 맡고 있고요.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만든 패브릭 포스터를 시작으로 인센스와 압화 도구까지 Oth,에서 선보이는 제품들은 여러 변화를 거쳐왔죠.

예진 브랜드를 운영한 지도 벌써 6년이 됐는데요. 이렇게 오래 이어질 줄은 사실 몰랐어요. 처음에는 패브릭 포스터 하나만 단발성으로 판매하고, 다시 회사에 취직할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예상보다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다음을 고민하게 됐어요. 여행에서 받은 인상을 담아 오감을 자극하는 인센스와 섬유 향수를 만들기도 했고요. 현재는 압화 도구를 중심으로 다양한 경험과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어요. 압화는 제가 2년 정도 취미로만 즐기던 작업이었는데, 기존 도구들은 과정이 너무 번거롭더라고요. 책 위에 종이를 올리고 꽃을 얹은 뒤, 그 위에 다시 책을 20-30권씩 쌓아야 했거든요. 그래서 앉은자리에서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나사를 조이면 프레스가 되는 방식의 제품을 외국에서 발견했어요. 그 구조를 참고해 브랜드에 맞게 풀어내면서, 지금의 형태로 이어지게 됐죠.

 

예진 씨가 “한 해를 마무리할 때 돌아보면 해마다 키워드가 있더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새해가 된 지금, 2025년은 두 분에게 각각 어떤 키워드로 기억될까요?

예진 저에게 2025년은 ‘마주 보기’였어요. 그동안 실패하거나 창피한 일을 겪으면, 조금만 더 해보면 될 텐데도 ‘이건 내 길이 아닌가 보다.’ 하고 쉽게 돌아서곤 했거든요. 그렇게 계속 도망치듯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마주 보면 어떤 일이 생길까?’라는 질문으로 연습을 시작했어요. 마주 보기에는 부정적인 감정도 포함돼요. 슬픔이나 불편한 감정도 회피하면 나중에 더 곪더라고요. 상품이 잘 안되는 순간도 있었고, 책이 나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일도 있었어요. 일상의 자잘한 실패도 많았고요. 가족이자 반려견이었던 도현이의 병명을 더 일찍 알지 못했던 일도 마음에 남아 있고요. 그런 일들을 글로 쓰거나 계속 복기하면서 털어내다 보니 감정이 꽤 후련해지더라고요. 지나온 선택들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데도 도움이 된 해였어요.

진호 저는 충분히 성장하지는 못한 해였어요. 대신 여러 시도를 하면서 브랜드 제품을 만드는 데 집중한 시간이었고요. 최근에는 나무뿐 아니라 3D 프린팅 같은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제품을 만들고 있는데, 콘크리트 소재도 시도해 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배합이나 온도처럼 잘 알지 못하는 요소가 많아서 몇 번 실패를 겪었죠.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았고, 그 과정에서 데이터를 쌓으면서 ‘어떻게 하면 더 잘 만들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했죠. 그런 의미에서 실험과 실패가 함께한 해였어요.

예진 돌이켜보면, 저희가 계속 나무 소재만 고집하거나 제가 처음 시작한 사진 작업만으로 브랜드를 이어왔다면 지금까지 오지 못했을 것 같아요. 저희는 한 가지를 깊게 파는 장인형 브랜드라기보다는, 다양한 물성을 탐색하면서 접근하는 쪽에 더 가까워요. 그래서 앞으로도 재료와 방식에 제한을 두기보다는 계속 시도해 보려고 해요.

Oth,가 “사람들이 꿈꾸는 삶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방향성을 잡아주는” 브랜드이길 바란다고 했는데요. 두 분이 꿈꿔온 삶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예진 한때는 세계 일주를 하면서 여행하는 삶을 꿈꿨어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 저한테는 잘 맞지 않았어요. 저는 생각보다 ‘뿌리’가 중요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여행지에서도 뿌리를 내릴 수는 있겠지만, 저는 한국이 너무 좋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 안에서 누리는 소소한 순간들이 무엇보다 중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생각해요. 제가 꿈꾸는 삶은 특별한 곳에 가는 삶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일상을 얼마나 깊게 향유할 수 있느냐의 문제 아닐까 하고요.

 

진호 씨는 어떤 삶을 그려왔어요?

진호 어떤 도구를 쓰든, 제 손으로 직접 만들고 싶은 마음이 늘 있어요. 실용성도 있지만, 자기만족이 더 큰 것 같아요. 시중에 있는 물건보다는 조금 다르거나 제 생활에 딱 맞는 물건 만드는 걸 좋아하거든요. 예를 들면 요리할 때도 큰 도마보다 저한테 맞는 작은 도마를 직접 만들어 쓰고, 긴 형태의 액자가 예뻐 보여서 액자도 만들어 사용했어요. 언젠가는 도예도 꼭 해보고 싶고요. 필요한 것들을 직접 만들어 쓰는, 일종의 자급자족에 가까운 삶을 오래전부터 상상해 왔어요.

예진 오, 맞춤형 정장 같은 느낌인가요?

진호 맞아요. 제 필요에 맞게 만든 물건들로 생활을 꾸리는 거죠. 그러면 자연스럽게 애정도 더 생기고요.

예진 저는 늘 정형화된 방식만 떠올리는데, 진호는 동심 같은 게 있어서 그런지 비정형적이고 창의적인 물건을 잘 만들어요. 방에 있는 단추 모양 커튼 끈이나, 집 모양을 형상화한 벽걸이 행거도 그렇고요. 예전에 살던 빌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빌라 트롤리’라는 가구도 있어요. 지금 저희 집에서 실제로 쓰고 있는 가구 중 하나예요.

 

진호 씨와 예진 씨는 가족이지만, 동시에 함께 일하는 동료이기도 하잖아요. 서로 다른 의견은 어떻게 조율하는 편인가요?

예진 처음에는 서로 다른 면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어요. ‘이래서 가족이랑 같이 일하지 말라고 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최악 중 최악의 모습까지 서로 다 보여줬죠(웃음). 김치 취향부터 일하는 방식까지 하나하나 다 달라요. 그렇다고 서로 배척할 수는 없잖아요.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서, 각자 조금씩 배려하고 조율하면서 같이 나아가는 연습을 계속하고 있어요.

진호 제가 추진력이 부족할 때는 예진 님이 밀어주고, 예진 님이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던지면 제가 그걸 실현 가능한 방향으로 구체화하는 식으로 상호 보완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만약 한쪽 의견으로만 기울게 되면 브랜드의 방향성도 한쪽으로 치우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서로 다른 의견을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과정이 오히려 브랜드가 더 좋은 방향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예진 처음 함께 일하는 사람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다 보니, 돌려 말하다가 기획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간 적도 있어요. 그런데 저희는 필터링 없이 바로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그만큼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오는 장점도 있더라고요. 서로 상처받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경험이 쌓이면서, 그 관계가 자연스럽게 브랜드 운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 같고요.

그나저나 두 분은 처음에 어떻게 만났어요?

예진 저희가 대학교 때 처음 만났는데요. 처음엔 서로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냥 외로워서 가까워진 것 같아요(웃음). 그때 진호는 연애 경험이 많지 않아서 좀 숙맥이었고, 저는 그 순진한 면이 좋았어요. 그래서 제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갔죠.

진호 같은 과였고, 저는 복학한 상태였어요. 처음에는 “과제 같이 하자.” 같은 말로 만남을 시작했는데, 취미가 잘 맞아서 자연스럽게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됐어요. 지금은 안 하지만, 그땐 크루저 보드를 타면서 밤공기를 마시기도 하고, 소소한 데이트를 많이 했죠.

예진 맞아요. 그때는 돈이 많이 들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취미들을 자주 했어요. 저희가 지내던 청주에는 무심천이 있는데, 거기서 걷고 얘기하고, 가끔 여유가 생기면 맛있는 걸 사 먹고요.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어느새 함께한 지 10년이 됐네요.

 

현재 살고 계신 집은 두 분이 함께 구한 집이죠. 원래는 호수가 보이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고요.

예진 맞아요. 호수가 보이거나 숲속처럼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유유자적 살고 싶었어요. 실제로 숲속 깊숙한 매물도 보러 다녔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자신이 없더라고요. 도시 생활이 주는 편리함도 좋았고, 브랜드를 운영하려면 아무래도 서울 근처가 더 맞겠다는 판단이 들어 다시 도심으로 방향을 틀었죠.

 

서울에서 집을 구하는 과정은 어땠나요?

예진 발품을 정말 많이 팔았어요. 매일 시세를 확인하면서 타이밍 싸움을 해야 했고요.

진호 괜찮아 보이는 매물이 있어도, 막상 가서 창문을 열어보면 바로 옆 건물과 너무 가까운 경우가 많더라고요. 서울에서는 흔한 풍경이지만, 저희는 밀집된 환경보다는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곳을 원했어요. 이곳 부암동은 한때 경관관리규정이 있어서 건물 높이가 지나치게 높아지지 않도록 관리되던 지역이거든요. 최근에는 규제가 많이 완화됐지만, 그 덕분에 상대적으로 프라이버시가 확보되고 조용하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예진 집을 찾을 때 지도도 정말 많이 봤어요. 주변에 녹지나 나무가 있는지도 꼭 확인했고요. 이 집은 부동산 사이트에 내부 사진이 하나도 없고 주소만 있었는데, 와서 주변 나무를 보고 안이 궁금해져 바로 부동산에 연락했어요.

 

직접 내부를 보니 마음에 들었어요?

예진 사실 저는 반대했어요. 막상 집에 들어와 보니 생각보다 층고도 낮고, 이전에 아이를 키우던 집이라 짐도 많아 집이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더라고요. ‘이 정도면 다른 좋은 조건의 집도 더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진호가 그러더라고요. “조금만 기다려봐. 여긴 다를 거야. 나를 믿어봐.” 평소에는 제 의견에 대부분 맞춰주고 응원해 주는 편인데, 그때는 처음으로 자기를 믿어보라고 하니까 오히려 신뢰가 갔어요.

진호 아파트와 달리 빌라는 구조가 조금 독특한 경우가 많잖아요. 저희 집도 마찬가지였어요. 이 빌라의 복도형 구조라든지, 공간이 분리돼 있는 점을 보고 내부를 조금만 손보면 충분히 좋은 집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예진 저는 계약할 때까지도 이 집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그림이 잘 안 그려졌거든요. 그런데 그게 제 편견이었더라고요. 진호는 이미 인테리어가 끝난 모습까지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이전에 살던 분들이 방을 거의 창고처럼 쓰고 있어서, 지금처럼 바깥 풍경이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진호 집을 구하는 데만 8개월에서 1년 정도 걸렸어요. 그때는 전셋집에 살고 있었고 Oth,를 막 시작한 시기였거든요. 코로나 시기와 맞물리면서 브랜드가 예상보다 큰 사랑을 받았고, 덕분에 작은 자금이 생겼어요. 마침 대출도 가능해지면서, 오래 살 집이라는 전제로 투자를 해 매매를 결정하게 됐죠. 장기적으로 안정감을 갖고 싶다는 마음도 컸고요.

집이 주는 안정감을 요즘 체감하세요?

예진 네, 우선 벽을 자유롭게 뚫을 수 있고요(웃음). 집 벽이 저의 도화지가 된 거니까 이사 오자마자 이곳저곳 다 뚫어버렸어요. 이제 이곳에 제가 뿌리를 내렸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 집에 오기 전에는 집에 가기 싫어서 계속 밖으로만 돌아다녔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거겠죠. 그런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져요. 집에 오면 치유를 받는 느낌도 있고요.

진호 전세로 살 때는 계약이 늘 마음에 걸리잖아요. 보통 2년마다 한 번씩은 이사를 고민해야 하고, 집주인 사정으로 갑자기 집을 비워줘야 했던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봤고요. 그런 불안감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커요. 물론 지금은 대출을 받아 산 집이라 그걸 갚아야 한다는 또 다른 불안도 있죠. 그래도 전보다 훨씬 안정감을 느끼는 건 분명해요.

예진 짐이 늘어나는 게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것도 큰 변화예요. 이사할 때마다 비용 부담이 있다 보니 예전에는 큰 가구를 들이거나 만드는 건 엄두도 못 냈거든요. 취미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나 책도 마찬가지였고요. 언젠가 떠날 곳이라고 생각하면 물건 하나를 들일 때도 늘 망설이게 되잖아요. 지금은 오히려 쌓아두는 게 제가 걸어온 궤적처럼 느껴져요.

진호 저는 집 안에서도 특히 주방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해요. 원래 무언가를 만들 때 제 생활에 맞게 손보는 걸 좋아하는데, 주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공간이 저를 안정시켜 주는 장소가 됐어요.

요즘에는 집이 밭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밭이 있어야 식물이 뿌리를 내리듯,
집도 제 삶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준다고 느껴요.

무엇이든 자라나는 집

진호 씨가 요리를 좋아하시나 봐요.

진호 네, 주로 제가 요리를 해요. 이전 집들에서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이 집에서는 주방이 완전히 저만의 공간이 됐어요. 부엌에 창이 있어서 창밖으로 눈이 내리는 모습도 보이고, 여름에는 작은 풀들이 자라는 게 보여요. 그 풍경을 보면서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게 되더라고요. 칼질하는 소리, 물 끓는 소리처럼 요리하는 소리만 들리고요.

예진 옆에서 보고 있으면 진호만의 명상 같기도 하고, 이 집에서만 가능한 개인적인 창작 시간처럼 느껴져요. 자신만의 창작 욕구를 요리로 푸는 것 같달까요. 무엇보다 누군가의 평가를 받거나 판매를 해야 하는 목적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더 자유롭게 무언가를 표출하는 느낌이 들어요.

진호 맞아요. 온전히 저 혼자만의 만족을 위한 시간이어서 오히려 더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어요.

예진 진호가 안정감을 찾는 장소가 주방이랑 화장실이거든요.

 

화장실은 왜요?

진호 예진 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라서….

예진 하하. 들어가면 잘 안 나오더라고요. 저는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귀찮게도 굴고 장난도 많이 치거든요. 자기만의 시간도 있어야 하니 화장실로 많이 도망가는 것 같아요.

진호 싫은 건 절대 아니에요(웃음).

 

주방과 화장실이 진호 씨만의 동굴이군요(웃음). 때로는 귀찮기도 하지만 함께여서 좋은 점도 있지요?

진호 혼자 살 때는 저만 챙기면 되잖아요. 귀찮으면 안 해도 되고, 모든 걸 제 기준으로 결정할 수 있고요. 집안일도 마찬가지예요. 혼자일 때는 미뤄도 되는 일들이 같이 살면 상대방의 불편함과 바로 연결되니까 신경을 쓰게 되죠. 그런데 그렇게 누군가를 챙기다 보니, 오히려 거기서 의욕이 생기더라고요. 혼자 있으면 대충 먹거나 아예 안 챙겨 먹을 때도 많은데, 예진 님이랑 있으면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음식도 더 하게 돼요.

예진 저는 실험 대상이에요. 제가 원하는 건 잘 안 해줘요(웃음). 그런데 저도 진호랑 함께 있으면 편안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잘 먹게 되더라고요.

 

아까 집을 둘러보니 방에 문이 없는 곳도 있더라고요.

예진 원래 이 집에 방이 너무 많았어요. 오히려 그게 골칫거리였죠. 벽을 허물고 주방을 넓게 쓰고 싶었는데 건축법상 어렵다고 해서 허용되는 선까지 최대한 열었어요. 개방감을 주는 방향으로요. 문이 많으면 좁은 공간이 더 답답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과감하게 문을 빼고 공간을 서로 이어주기로 했어요.

 

의도적으로 ‘닫히지 않는 집’을 만든 셈이네요.

진호 가끔 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는데….

예진 맞아요. 맨날 싸우거든요. 하하.

진호 가끔은 분리될 필요도 있잖아요.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 있는데, 문이 없으니까 금방 다시 마주치게 돼요(웃음).

예진 그래서 아무리 싸워도 냉전이 오래가지 않아요.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집 구조가 그런 역할을 하더라고요.

 

이 집에서 지낸 지 4년 정도 됐다고 하셨죠? 거실 통창 밖으로 보이는 큰 나무 덕분에 계절의 변화가 선명하게 느껴질 것 같아요.

예진 이 집은 원래 아파트처럼 거실 앞에 베란다 공간이 있었어요. 저희는 그 공간을 허물고 확장해서, 창도 통창으로 다시 냈죠. 그렇게 바꾸고 나니까 계절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에요. 원룸에 살던 시절에는 창 바로 앞에 빌라가 붙어 있어서 풍경이라는 게 없었거든요. 창을 열면 늘 담배 냄새가 들어왔고요. 회사를 다닐 때도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지 거의 느끼지 못한 채 지냈어요. 그런데 이 집은, 설령 보기 싫은 날이라도 눈앞에 나무가 있어요. 계절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죠. 그런 환경 덕분에 삶을 더 깊이 향유하게 됐어요.

계절을 감각하며 지내는 일이 일상에 또 어떤 변화를 줬나요?

예진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몸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아요. 멈춰 있는 느낌이 아니라, 내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이 생기거든요. 예전에는 막혀서 고여 있는 물 같았다면, 지금은 흐르는 물이 된 기분이에요.

진호 회사에 다닐 때는 하루 종일 실내에 있다 보니 밖에 비가 오거나, 날씨가 많이 덥거나 추워도 크게 와닿지 않았어요. 퇴근할 때 돼서야 “아, 오늘 비가 왔구나.” 하고 알게 되는 정도였죠.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시간의 흐름도 잘 느끼지 못한 채 지나가더라고요. 지금은 창밖 풍경이 계속 달라지니까, 계절이 지나가고 시간이 쌓이고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돼요.

예진 그리고 겨울에만 누릴 수 있는 특권도 있어요. 새들이 찾아오거든요. 숨을 곳이 많지 않다 보니 나무에 앉아 자기들끼리 소통하는 모습이 잘 보여요. 가끔 망원경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집에 있는 새 도감 책을 펼쳐 놓고 “무슨 새일까?” 맞혀보는 재미도 있어요. 그런 소소한 순간들이 이 집에서만 가능한 즐거움이에요.

 

창밖 풍경이 아까워서 손님들을 초대하기도 한다면서요.

예진 맞아요. 창밖에 있는 나무가 은행나무거든요. 가을이 되면 미리 스케줄을 짜요. 그 시기가 워낙 짧잖아요. 빛이 일렁이고 노란 잎 덕분에 공간 전체가 환해지는 순간이요. 혼자 보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을 초대하게 돼요. 좋은 걸 혼자만 간직하기보다 같이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커지더라고요. 다만 그게 단순한 자랑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면 해서, 풍경만 보여주기보다는 분명한 이유를 만들어 초대하려고 해요. 예를 들면 식사를 대접하거나, 책을 함께 읽는 모임처럼 목적이 있는 만남으로요.

 

집 주변 환경은 어때요? 부암동이라는 동네는 참 편안해 보여요. 많이 소란스럽지도 않고요.

예진 맞아요. 인왕산도 가깝고 집 뒤쪽으로도 산이 있어서 산책하고 싶을 때마다 코스를 만들어 걸을 수 있어요. 그게 생각보다 큰 힘이 되더라고요.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오며 가며 인사하게 되는 정도의 자연스러운 교류가 있고요. 그 거리감이 참 좋아요. 동네가 번잡스럽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들고요. 물론 불편한 점도 많아요. 마트나 약국 같은 편의 시설이 거의 없고, 언덕도 많죠. 여가 공간은 있지만 생활 시설은 부족한 편이에요. 그래도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요. 내려가면 서촌에 시장도 있고요. 왜 산꼭대기에 사냐고 묻는 분들도 있는데, 그건 인식의 차이인 것 같아요. 저희한테는 이 생활이 잘 맞거든요.

진호 저에게 부암동 첫 기억은 예전에 서울에서 데이트하던 날이에요. 예진 님이 부암동에 가보자고 해서 버스를 타고 산길을 올라왔는데, 그때는 정말 생소했어요. ‘이 버스를 타고 어디까지 가는 거지?’ 싶은 느낌이었죠. 조금만 올라왔을 뿐인데 갑자기 서울이 아닌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았어요. 그날 ‘부암와플’이라는 곳에서 와플을 먹었는데, 그 가게 사장님이 아직도 계세요. 이 근처에서 오래 사셨던 동네 토박이시거든요. 지금은 이사를 가셨지만 종종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어요. 그렇게 관계가 이어진 것도 신기했고요. 시간이 흘러 다시 이 동네로 돌아와 살게 되니, 그 연결감이 더 또렷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서울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감각인데 부암동에서는 처음으로 그걸 실감했어요.

두 분이 선택한 또 다른 가족이 있죠. 반려견 버들이와 도현 그리고 반려묘 밍고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예진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삶이 훨씬 다채로워졌어요. ‘공동체’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함께 산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에요. 너무 힘들어서 무너질 것 같을 때도, 이 친구들이 있으니까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게 되더라고요. 상처받고 지친 순간에도 붙잡아주는 존재가 있다는 느낌, 그게 연대인 것 같아요. 제 가족과 함께 살면서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인데, 이 친구들을 통해 처음 알게 됐어요. 또 하나 크게 달라진 건 책임감이에요. 얘네들을 지키기 위해서, 지금 하는 브랜드 일이 잘 안되면 어떤 다른 일을 해서라도 책임져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저는 자존심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인데, 이 아이들 앞에서는 그 자존심이 없어도 괜찮더라고요.

진호 밍고는 제가 혼자만의 시간에 너무 빠지지 않게 해주는 존재예요. 늘 곁에 와서 같이 자고, 만져달라고 하죠. 지금은 무지개다리를 건넌 도현이의 주 보호자는 예진 님이었고, 현재 버들이의 주 보호자는 저인데요. 새로운 생명과 함께 산다는 건 결국 책임을 선택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 무게가 크게 느껴져 쉽게 결정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막상 같이 살아보니, 예전에는 싫어하거나 귀찮게 느끼던 일들도 ‘그래도 얘를 위해서라면 해야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버들이는 산책을 매일 짧게라도 나가야 하니까, 귀찮을 새도 없이 바로 나가서 한 바퀴 돌고 와요.
예진 이건 사랑 없이는 할 수 없는 행위잖아요.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사랑을 주고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다시 배우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친구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거든요. 도현이는 헌신을, 밍고는 평온함을, 버들이는 조건 없는 사랑을 가르쳐줬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은 이 집에서 하루를 어떻게 보내요?

예진 밍고는 캣타워나 해먹 같은 걸 설치해 줘도 거의 쓰질 않아요. 대신 집 안을 옮겨 다니며 자기만의 놀이터를 만들어요. 책이 있던 선반에서 책을 빼고 담요를 깔아주면 거기서 쉬고, 폭신한 털이 들어 있는 서랍을 열어주면 쏙 들어가 있기도 하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 밍고는 기능이 많은 물건보다 집이라는 공간 자체를 자기 방식으로 잘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진호 버들이는 아침마다 꼭 하는 루틴이 있는데, 일어나자마자 소파로 터벅터벅 걸어가 앉아요. 일출 무렵이라 창밖의 새들을 보고, 햇빛을 받으면서 한참을 가만히 있어요. 마치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태양의 기운을 받는 것처럼요.

 

집은 두 분에게 어떤 공간인가요?

예진 요즘에는 집이 밭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제가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고, 무엇을 심든 일단은 뭔가가 자라나는 공간이요. 결과가 어떻든 실험해 볼 수 있는 장소랄까요. 밭이 있어야 식물이 뿌리를 내리듯, 집도 제 삶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준다고 느껴요.

진호 저는 동굴이라고 생각해요. 눈치 보지 않고, 제 삶의 리듬에 맞춰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공간이죠.

예진 이 말에 너무 공감해요. 사람이 살면서 각자만의 동굴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계속 바깥에만 있으면 가면을 쓰고 사는 느낌이 들잖아요.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도 솔직하지 못해지고요. 그런데 동굴 안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꾸미지 않아도 되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 있어도 되는 공간이니까요.

진호와 예진의 계절

예진의 목소리로 담은 부암동 집의 사계절.

겨우내 굳게 닫아둔 창문을 열면, 따뜻한 봄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혀요. 느리지만 꾸준히 새순이 피어나는 모습을 매일 바라보며 감탄하는 것이 저희의 일상입니다. 매서운 겨울의 칼바람을 견딘 초록 잎들은 제 가난했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그 긍정적인 기운이 저희 집에도 스며드는 것 같아요.

여름

여름이 오면 나뭇잎이 빼곡해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 들어요. 태풍과 폭우에도 뿌리와 잎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여름날의 집은 저희의 안락한 동굴이 되어요. 이 집에서 네 번째 여름을 맞으며 느낀 건, 집이 우리와 함께 나이 먹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이토록 애틋한 일이었다는 것이에요. 태생이 변덕스러운 저는
한 공간에서만 사는 것을 답답하고 지겨워했는데, 그러지 않는 이유는 사계절마다 변하는 풍경과 저희가 만든 분신들이 이 집에 뿌리를 내리며 우리만의 이야기로 쌓여가기 때문일 겁니다.

가을

저희 집 앞 나무는 키가 큰 은행나무예요. 사계절 내내 씩씩하게 자태를 뽐내지만, 내년을 기약하며 모든 잎을 떨구기 전, 병아리처럼 귀여운 샛노란 옷으로 갈아입는 이 시기가 특히 아름다워요. 아침 햇살을 가득 받은 나무는 살랑이는 바람에 잎을 부대끼며 춤추고, 그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집 안으로 흘러 들어와요. 저는 일렁이는 빛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사람보다 먼저 겨울을 준비하는 생명들 속에서 세상의 모든 욕심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답니다.

겨울

눈 오는 풍경을 집 안에서 바라보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매일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기분이 들어요. 잎은 모두 떨어졌지만, 오히려 아쉽지 않아요. 겨울은 이곳에 찾아오는 새들을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기 때문이에요. 오늘도 집 앞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인사를 건넵니다.

©문예진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에디터 황진아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