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머문 찻자리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며 잠시 멈춰 서 본 어느 날의 기록. 두 에디터가 각각 다른 동네에서 마주한 찻자리의 장면들을 차례로 전한다.

다도레 티룸

다도레의 조채련 대표는 차 마시는 일을 ‘가장 빠르게 누릴 수 있는 호사’라고 말한다. 내 몸이 먼저 알아채는 편안함에 귀 기울이는 시간. 다도레에서 세 가지 차를 마시며 보낸 시간은 일상의 틈을 메우는, 더없이 다정한 사치였다.

내 몸에 편한 차를 마시며

연희동의 조용한 길, 번듯한 간판 하나 보이지 않는 하얀 건물 앞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계단을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한 뼘 남짓한 나무 입간판. “은은한 차와 정갈한 다기”라 적힌 정직한 안내를 따라 문을 여니, 동쪽에서 넘어온 햇살이 하얀 벽면을 타고 흐른다. 최소한의 기물이 놓인 공간은 비어 있는 만큼, 나에게 집중하도록 시선을 붙잡는다.

자리에 앉자 주인장은 아침마다 마신다는 ‘어린 봄 쑥차’를 내어준다. 하동 지리산 자락, 사람이 오가지 않는 깊은 산속에서 자라난 어린잎만 골라 딴 차. “저희는 도로와 가까운 차밭과는 거래하지 않아요. 사람의 기운이 많이 섞이지 않은 자연의 기운을 전하고 싶어서요.” 주인장의 내 몸에 편한 차를 마시며 목소리엔 차의 ‘순함’에 대한 고집이 묻어난다. 속이 약한 그가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 곁에 두는 이 차는, 다도레가 지향하는 ‘내 몸에 편안한 차’의 기준이기도 하다. 

찻잎의 향을 먼저 맡는다. 코끝을 스치는 달큼한 냄새. 포근하게 졸여낸 꿀이나 갓 쪄낸 쑥떡의 향기에 가깝다. 쑥에서 이런 단 향이 날 수 있을까 싶어, 몇 번이고 코를 가까이 가져다 댄다. 다관 바닥에서 포슬포슬하게 엉켜 있던 여린 쑥잎이 뜨거운 물과 닿자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찻물은 갈색에 가까운 깊은 색으로 번져나가고, 한 모금 머금으니 기분 좋은 온기가 온몸에 노릇노릇하게 퍼진다. 억지로 힘주어 우려내지 않은 자연의 맛은 마실수록 어디 하나 걸리는 구석 없이 속을 보듬는다.

오래된 향의 기억

찻물이 바뀌고 공간의 공기가 조금 더 짙어질 무렵 마주한 두 번째 차, ‘할매 띄움차’. 중국의 보이차나 대만의 우롱차 같은 이국적인 화려함 대신, 한국의 발효 미학이 깃든 흑차다. 주인장은 한국적인 발효차의 맥이 끊겨가는 것이 못내 아쉬워 직접 하동의 한 장인을 찾아갔다. 차 전문가는 아니지만, 평생 청국장을 빚어온 할머니가 손님과 스님들께 대접하려 손수 만들던 띄움차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정성을 다해 빚어낸, 그 진심을 주인장은 잊지 않고 있었다. 

처음엔 “나이 먹어 무슨 차를 만드냐.”며 손사래를 치던 할머니의 마음을 돌린 건 의외의 지점이었다. 밀가루와 찬 음식을 즐기느라 몸이 냉해진 요즘 젊은이들이 안타깝다는, 두 사람의 공통된 마음이 맞닿은 것이다.

그렇게 청국장의 발효 기술을 차에 접목해 탄생한 이 차의 잎에는 하얀 누룩 꽃이 곰팡이처럼 피어 있다. 차를 우려 향을 맡는 순간, 묘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국적을 불문하고 이곳을 찾는 이들이 입을 모아 ‘할머니 집’을 떠올린다는 그 향이다. 시골집 창고의 묵직한 흙 내음일까, 혹은 볕이 잘 드는 아랫목에 깔아둔 이불 아래서 나던 포근한 냄새일까. 향을 따라가다 보면 잊고 있던 어느 날의 장면이 문득 눈앞에 맺힌다. 쓴맛 없이 부드럽게 감도는 단맛은 마실수록 봄볕 아래 앉아 있는 듯 몸 안쪽에서부터 기분 좋게 차오르는 열감을 남긴다.

한 잔의 봄빛을 따라

찻자리의 마지막은 ‘목련 꽃차’가 장식했다. 다도레DADORE라는 이름 안에는 ‘사랑하다Adore’와 ‘다시Re’라는 단어가 숨어 있다. 한국 차를 새로운 감각으로 재해석해 일상에 더 가까이 두겠다는 애정 어린 다짐이다. 그 마음을 닮은 목련 꽃차는 꽃봉오리를 한 겹 한 겹 손으로 열어 정성껏 말린 결과물이다. 이 정밀한 과정을 거치며 순백색 꽃잎은 샛노란 빛으로 물든다. 

가장 경이로운 순간은 뜨거운 물이 닿는 찰나. 응축되었던 노란 기운이 물속으로 사르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꽃잎은 제 색을 기꺼이 내어주며 본연의 맑은 빛으로 돌아오고, 투명했던 물은 인공적인 색소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선명한 형광빛으로 채워진다. 주인장은 주전자 속에서 꽃잎이 하나하나 부드럽게 펼쳐지는 풍경은 그 자체로 완벽한 꽃놀이가 된다고 했다. 눈으로 이 호사스러운 빛깔을 충분히 만끽하고 나니, 알싸하면서도 우아한 향이 입안을 씻어준다. 인공적인 향수와는 결이 다른, 자연이 뿜어내는 생동감 넘치는 향기다. 사라져가는 향이 아쉬워 찻잔을 쉬이 내려놓지 못한다. 내 몸에 입히고 싶을 만큼 우아한 이 꽃의 기운은, 소란스러운 도심의 소음을 잠시 잊게 하기에 충분하다.

“한국 차를 해도 충분히 업을 이어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일종의 책임감이 있어요. 우리가 더 성장해서 거래하는 농가가 늘어날수록, 대를 이어 차를 지키기로 결심한 후계 농부들의 발걸음도 가벼워질 거라 믿거든요. 누군가의 애정이 듬뿍 담긴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다우(차를 나누는 벗)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관심이 결국 우리 차를 지키는 가장 큰 힘이 될 거예요.”

A. 서울 서대문구 증가로 13-9 3층
O. 매일 12:00-19:00 예약제 티 코스 운영

녹무

‘푸르게 자라난 들풀’이라는 뜻의 녹무綠蕪는 자연 속 계절과 풍경에서 피어오른 영감을 작고 수수한 동양의 디저트에 담아낸다. 아름다운 와가시 옆에는 그와 어울리는 차가 놓인다. 아름다운 찻자리의 장면에 살짝 고개를 내민 어느 오후. 그날의 시간을 이곳에 풀어둔다.

공릉의 어느 아름다운 차실

물이든 음료든 마시는 일에는 좀처럼 부지런하지 못하다. 여럿이 카페에 모여도 내 것만 한참 남아 있고, 카페인에 약한 탓에 커피는 멀리한 지 오래다. 그렇기에 차 역시 낯설었다.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차를 음미하는 내 모습은 상상 속이라도 어쩐지 어색했달까.

나의 편견을 무르게 만들고, 차의 세계로 사뿐히 안내한 공간은 녹무였다. 우연히 마주한 녹무의 와가시(일본 전통 과자)는 감각적인 오브제 같은 모습이었다. 이토록 예쁜 과자는 정말 먹을 수 있는지, 베어 물면 어떤 맛이 날지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디저트라면 뭐든 좋았으니까. 그런데 이곳, 예약제 차실을 운영하고 있단다. 일주일 중 이틀은 낯선 이를 위해 찻자리를 마련하고, 나머지는 와가시를 미리 주문한 손님들이 직접 가져갈 수 있게 하는 방식. 녹무의 와가시와 차를 함께 맛보는 자리라니, 설레는 마음을 안고 공간이 자리한 공릉으로 걸음을 옮겨 보기로 한다.

녹무는 아파트와 상가가 모여 있는 제법 푸근한 동네에 위치한다. 이곳의 문을 여니 바깥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 펼쳐졌다. 흰 천 사이로 보이는 주홍빛 조명, 다구 앞에서 담소를 나누는 손님들. 아름다운 동양적 분위기의 공간을 둘러보는 사이, 운영자 권세현 씨가 작업 공간에서 나와 인사를 건넸다. 다정한 환대에 화답하고, 자리에 앉아 녹무에서의 시간에 잠겨보기로 한다.

소박하게 담은 자연의 인상

자리에 앉으니 가장 먼저 웰컴티 팥차와 매실 코하쿠토가 테이블 위에 올랐다. 입안에서 맴도는 구수하고 은은한 단맛을 느끼는 사이, 곧이어 와가시가 나왔다. 운영자 세현 씨는 과거 디자인 회사를 다니며 동양적인 분위기와 요소를 담는 작업을 주로 해왔다. 차를 즐겨 마셨기에 와가시를 자연스럽게 접했고, 작은 디저트 안에 다양한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고. 

이제는 이곳 녹무에서 와가시를 한국적으로 재해석하고, 제철 재료를 더해 계절마다 새로운 디저트를 만든다. 주문한 시그니처 와가시는 계절 한정 와가시와 달리, 일 년 내내 제공된다. 단청을 닮은 ‘녹화’와 풀 위 새벽이슬이 맺힌 모습의 ‘들풀’이 아름답다. ‘산수’는 녹음이 깃든 산에 물결이 흐르는 모습이며, ‘새싹’은 갈라진 땅 위로 연한 초록빛이 솟는 모양이다. 오롯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주인장은 자리를 비켜 주었고, 나는 자연의 색과 풍경을 닮은 와가시를 눈으로 먼저 맛보았다. 정성과 세심함이 깃든 모양에 먹기를 망설이다, 이내 녹무에서 직접 제작한 은빛 집기로 와가시를 조금 잘라 입에 넣었다. 말차, 유자, 무화과, 팥 등 종류마다 다양한 속재료가 느껴졌다. 기품 있는 겉모습 안에 감춰진 은은한 달콤함. 

녹무의 이름처럼 소박하고 담백하다. 차실에서는 ‘계절의 초상’이라는 이름으로 계절 한정 디저트도 준비되니, 와가시 외에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다면 미리 예약해도 좋다.

계절의 장면 곁에 흐르며

녹무의 차는 ‘고른 숨’ ‘깊은 숨’ ‘스민 숨’ 세 카테고리로 나뉜다. 고른 숨은 말차, 호지차 등 차를 처음 마시는 사람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일상 차다. 깊은 숨은 다양한 향과 맛을 지닌 종류의 고급 차로 무이암차, 보이숙차 등으로 구성된다. 마지막 스민 숨은 차에 유자, 말차 등을 더한 음료 메뉴다.

세현 씨는 끊임없이 변하는 섬세한 차의 매력에 이끌렸다. “차의 종류에 따라 우리는 방식이 달라지고, 사람, 방식, 담아내는 기물에 따라 맛과 향이 조금씩 달라지는” 점이 좋았다고. 그 다채로움을 표현하고 싶어 여전히 차를 연습하고 연구한다. 

이날 예약한 차는 깊은 숨의 ‘봉황단총 밀란 노총’. 중국 봉황산 오동촌의 100년 된 차나무에서 채엽한 차라는 설명에 호기심이 일었다. 냉침차 특성상 향이 날아가기 쉬워, 길고 좁은 유리병에 담아 향을 가두고 얼음 바구니에 시원하게 제공된다. 익숙한 화이트 와인의 외양을 하고 있어 차를 마시는 시간이 더욱 감각적이고 친숙하게 다가왔다. 맛 역시 향긋한 과일 향이 감돌며 와가시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었다.

다른 차 역시 낯선 다구에 직접 내려 마실 필요 없이, 주전자와 유리잔 등에 우려져 나온다. 공간은 엄숙하지 않고 잔잔한 대화가 오가기 좋은 분위기이니 긴장은 내려두어도 좋다. 녹무는 감각적인 디저트, 그와 어울리는 차 메뉴로 차실을 찾는 누구든 환영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작게 잘라 입에 넣고, 향긋한 음료를 머금는 시간. 일상의 틈에 핀 좋은 기분을 안고 문을 나선다.

“차는 다과의 향과 맛을 살려주기도 하고, 다과는 차의 결을 더욱 깊게 만들어 주기도 해요. 하지만 조합이 맞지 않으면 서로의 매력을 흐려놓기도 하죠. 녹무는 차와 디저트가 함께 어우러질 때 생기는 조화로운 순간을 편안하지만 새롭게 경험하실 수 있도록 구성을 고민해요. 단순히 모양이 아름다운 디저트를 넘어 자연의 장면과 제철 재료의 맛을 한데 담아내려고 하죠. 손님들이 이것들을 차와 함께 즐기며 계절의 흐름을 느끼는 시간을 보내셨으면 해요.”

A. 서울 노원구 공릉로 123 2층
O. 금, 토요일 예약제 차실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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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황진아, 차의진

포토그래퍼 박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