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곳에 남겨둔 안부

잘 지내나요. 우린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채, 이 자리에서 안부를 전합니다.

고수리

작가

행복은 아주 작은 것들로부터

도시를 기억하는 나만의 방법 하나, 그 지역 책방에 들러 마음에 드는 책을 소장하는 거예요. 그림책 《행복은 아주 작은 것들로부터》는 대전의 책방 ‘한쪽가게’에서 데려왔어요. 주택가에 숨어 있는 한쪽가게는 널따란 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는 작은 책방이었습니다. 한쪽은 서가를 꾸려둔 책방, 한쪽은 음식을 만드는 부엌이기에, 테이블은 때때로 책을 읽는 책상이기도 음식을 나누는 식탁이기도 했지요. 어느 겨울, 그 테이블에 머물렀습니다. 독자들과 마주 앉아서 푸르르 주전자가 끓어오르던 책방 안 난로처럼 훈훈한 시간을 보냈어요. 책담회를 마치고 돌아가려던 길. “따뜻하게 먹고 가요.”라며 책방지기가 토마토수프를 데워 왔습니다. 문 닫은 책방에 주홍 불빛 하나 밝힌 채, 우리는 같이 수프를 먹었어요. “언제 오실까 기다렸어요. 멀리까지 와주셔서 기뻐요.” 얘기를 나누던 우리 얼굴도 토마토수프처럼 발그레했습니다. 대전, 하고 불러보면 내게는 그 장면이 불어와요. 거기에 행복한 기억을 두고 왔다고요. 일상 속 작고 단단한 행복을 그려둔 그림책에 우리의 장면도 그려두고 싶어요. 기억하려 해요. 행복은 아주 작은 것들로부터 온다는 것을요.

오수영

고어라운드 출판사 발행인

오래된 여백의 도시

스무 살 때 대학교 진학으로 대전을 떠났습니다. 그 이후로는 줄곧 수도권에 살았기 때문에 제게 남은 대전의 기억은 대부분 학창 시절의 장면이에요. 그때의 대전은 지금처럼 성심당과 꿈돌이와, 한때는 ‘노잼’으로 유명하던 도시가 아닌, 단지 오래전 엑스포가 열렸던 한적한 광역시일 뿐이었어요. 친구들은 자연스레 대전을 떠난 사람들과 남아 있는 사람들로 나뉘었습니다. 저희는 모두 머리맡에 꿈돌이 인형을 품었던 똑같은 꿈돌이 키즈였지만, 어른이 된 후 각자 삶의 환경이 달라진 탓인지 서서히 안부를 묻기조차 어려워졌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삶의 가장 힘든 순간마다 제 곁을 지켜준 건 그 친구들이었습니다. 관계의 끈이 끊어졌다고 믿었던 제 생각과는 달리 학창 시절의 기억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요. 어쩌면 끝인 줄 알았던 순간이 실은 삶을 반추하며 정돈하는 여백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심당이 화재를 극복한 뒤 지금의 전국구 빵집이 된 것처럼, 꿈돌이 동상이 엑스포에서 철거된 뒤 부활한 것처럼, 저희의 우정도 삶에 그을렸지만 여전히 기억의 심지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요. 저의 대전도, 저의 기억도, 오래된 여백의 시간을 딛고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임다은

독립책방 머물다가게 책방지기

여기 기억이 있어요

자줏빛 볕이 드는 마을이라는 예쁜 뜻을 가진 자양동에서만 30년 넘게 살았어요. 뒷산으로 이어지는 동아아파트 벚꽃길과 주택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 이팝나무가 줄지어 있는 도로, 탐스러운 매실이 주렁주렁 열리는 우리 집을 사랑했지요. 파란 지붕 위에는 치즈냥이가 자주 놀러 왔어요. 매실나무 그늘이 아주 시원했거든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다양해서 그날그날 발길 닿는 대로 걸었습니다. 어떤 날엔 길냥이를 만나고, 어떤 날엔 술빵 파는 아저씨도 만났지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동네 곳곳이 조금씩 무너져가는 걸 보았어요. 허물어진 동네 슈퍼마켓과 사라진 나무, 그 위에 세워진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들. 평범하고 익숙했던 풍경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서운했어요. 그때부터 카메라를 들고 동네를 거닐었습니다. 언젠가 이별해야 할지도 모를 장면들을 잠깐이라도 붙잡으려고요. 지금 마주한 풍경이 얼마나 소중한지, 동네를 여행하듯 걷고 기록하며 알게 되었어요. 이렇게 계속 느리게 걷다 보면 조금 더 천천히 안녕할 수 있을까요. 부디 그랬으면 좋겠어요.

한지원

어라운드 브랜드 프로젝트 매니저

여전한 다정함

저는 대전에서 대학 생활을 보냈어요. 얼마 전 다시 찾은 대전은 서울과는 다른 ‘여전함’을 간직하고 있더군요. 추억의 도시는 많은 계획보다 걸음이 닿는 대로 걷게 됩니다. 그날도 대학 시절 자주 가던 카페로 향하는 길이었어요. 대전세무서를 찾는 할아버지의 물음에 지도를 확인하고 길을 알려드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방향치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나 봐요. 어느새 할아버지는 제 앞을 지나 멀어지고 있었죠. 할아버지께 뛰어가야 하나, 잘못된 길이라고 외쳐야 하나 망설이던 순간, 할아버지는 다시 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셨어요. 사과하려던 제게 “거기 아니고 한참 더 내려가야 한다네. 한 20분은 더 가야 한대.” 허허- 웃으며 건네신 말에 저는 잠시 멍해졌습니다. 조금 더 걷게 된 일이 불쾌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웃음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상황을 가볍게 지나가게 했으니까요. 그날 저는, 설명하기 어려운 다정함과 여유를 그 얼굴에서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어쩌면 제가 다시 찾은 대전의 ‘여전함’은 이런 다정한 얼굴들에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진아

《AROUND》 에디터

여전히 닿지 못한 곳들

몇 년 전, 당시 교제하던 애인의 모교를 찾아 대전으로 향했습니다. 방학 중인 교정은 한산했고, 우리는 그가 매일같이 오갔을 길들을 구석구석 걸었어요. 유명한 빵집 대신 그가 친구들과 자주 간다는 국밥집에 들르고,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길고양이를 구경하고, 학교 캐릭터 조형물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킥킥 웃곤 했어요. 참 별거 없고 한갓진 여행이었습니다. 거리마다 스며 있는 오래된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어린 시절을 짐작해 보았습니다. 반나절이 넘도록 그곳을 누비고 다녔지만, 학교가 워낙 넓어 결국 다 돌아보지 못했어요. 이후로 시간이 흘러 그와는 헤어졌습니다. 만나는 시간 동안 부단히 마음을 쏟았건만 끝내 서로라는 세계의 너비를 가늠하지 못한 채 관계의 마침표를 찍었어요. 이제는 그 학교를 다시 갈 일은 없겠지요. 어쩐지 저는 늘 사람에게도, 도시에게도 닿지 못할 여백을 두고 돌아오는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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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황진아

글·사진 황진아, 한지원, 임다은, 오수영, 고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