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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숍은 지향하는 삶의 모습이 뚜렷한 누군가의 옷장이다. 자신을 이루는 조각들을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옷을 골라 채워 넣고, 비슷한 파편을 찾아다니는 이들이 모인 장소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각자의 자리에서 조각을 모아 팔고 있는 편집숍을 소개한다. 오직 그곳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옷장들이다.
Busan
해운대로 출장을 갔다. 매년 부산을 방문하는데, 해운대를 진득이 가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누군가는 청춘을 불태운 추억이 있는 장소라고 말하지만, 그런 적도 없다. 역에서 내리면 길게 트여 있는 구남로 주변으로 관광객과 주민들이 바쁘게 걸어 다니고, 그 아래로 바다가 보인다. 사람들은 높이 솟은 빌딩, 고급 호텔, 야트막한 횟집 들을 배경 삼아 러닝을 하거나, 반려견과 산책을 한다. 해운대는 생동감이 넘치는 도시였다. 사계절 상관없이 쉼 없이 돌아가는, 스스로 숨 쉬는 지역이었다.
해운대역 2번 출구 쪽은 분위기가 달랐다. 낡고 오래된 맨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건물 1층마다 소규모 점포와 감각적인 식당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연남동 같다.” 같이 걷고 있는 동료 D에게 말했다. “정말.” 그는 배가 고팠는지 짧게 대답했다. 연남동이 연상되는 해리단길을 걸어 식당으로 향하는 길, ‘루프트맨션’이라고 적힌 새하얀 간판을 발견했다. 루프트맨션은 해리단길에 위치한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으로, 전포의 의류 셀렉숍 ‘루프트베이스먼트’에서 운영하는 공간이다. 전포는 부산의 멋쟁이들이 모이는 젊은 거리이니만큼 루프트베이스먼트의 취급 의류도 젊고 트렌디하지만, 루프트맨션이 위치한 해리단길은 지역 주민들은 당연하고, 국내외 관광객도 오가기 때문에 지역도, 국적도, 연령도 천차만별이다. 일반 가정집이었던 맨션을 개조하고 재단장해 오픈한 루프트맨션은 라이프스타일 스토어를 지향하며 연령과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아이템들을 제안하고 있다. 해리단길의 다양성이 자연스레 스며든 공간인 셈이다. 따스한 목재 바닥과 흰 벽 위아래로 누군가 실제 사용하는 듯 진열되어 있는 빈티지 가구와 서적 그리고 화분들. 취향 좋은 친구네 집에 놀러 온 기분으로 편안하게 둘러보다 보면, 양말과 치약 같은 생필품도 비치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루프트맨션의 자체 제작 상품에는 ‘Luft Mansion’이란 브랜드명이 각기 다른 글씨체로 적혀 있다. 네모반듯하게 써져 있는 제품이 있는가 하면, 어린아이가 낙서하듯이 삐뚤빼뚤 적힌 옷도 있다. 디자인을 위한 타이포그래픽일 수도 있으나, 루프트맨션이 지향하는 바를 엿볼 수 있는 지점이라 생각했다. 다음번엔 부산에 내려가면, 루프트맨션의 티셔츠를 한 장 사서 엄마한테 선물해 볼까.
누군가 머문 듯한 흔적이 인상적인 공간
일상의 장면을 옮긴 듯한 잡화들
Seoul
난 서울을 동쪽과 서쪽으로 구분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집은 동쪽에 있고, 직장은 서쪽에 있으니까. 나의 하루는 좌우로 움직이는 셈이다. 서울은 서쪽으로 갈수록 느슨해진다. 마포구에 진입할 때는 거리에 생기가 도는데, 그중 망원동의 자유분방한 기운은 특별하다. 좁은 골목마다 자리한 개성 뚜렷한 작은 가게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망원시장과 근처에 자리한 한강공원. 걸을수록 바쁜 일상 탓에 잔뜩 조여져 있던 등과 가슴이 여유로워지는 동네다.
망원동에 자리한 ‘브라운 프론트 도어’도 그렇다. 무엇이라 딱 잘라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의 편집숍이다. ‘갈색 현관문’이 돋보이는 공간 속에는 카페와 국내 브랜드, 빈티지를 취급하는 편집숍이 자리해 있고, 자체 핸들 체인스티치 자수 브랜드 ‘BURN FROM THE SUN’도 한편에 있다. 이 모든 요소들이 슈퍼캐주얼Super Casual이라는 숍의 기조 아래 응집되어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을 이룬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거죠?”라는 질문에 최세준 디렉터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 삶을 그대로 녹이려고 했어요. 지금 가장 심취해 있는 것들로 공간을 꾸린 거죠.” 브라운 프론트 도어가 이야기하는 슈퍼캐주얼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찰하는 태도’가 반영된 가장 나다운 삶을 의미한다. 내가 망원동에 올 때마다 느끼는 느슨한 자유로움도 슈퍼캐주얼과 가깝다. 브라운 프론트 도어의 코디는 편안한 실루엣을 강조한다. 이들의 코디네이션을 볼 때마다 심리적인 느슨함은 내가 좋아하는 걸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을 때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브라운 프론트 도어의 전신인 ‘이디엄 스토어’는 강북구 미아동에 있었다. 그때의 모습을 기억한다. 지금보다 작은 공간이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전한 셈이니, 부쩍 핸섬해진 고향 친구를 보는 기분이다. 나는 핸섬해지지 못했고, 출퇴근을 하고 있다.
체인스티치 작업을 하는 공간
매장 한편에 있는 카페의 전경
Daegu
대구에는 색깔이 진한 개인 편집숍이 많다. 의류, 소품, 인테리어 등 분야도, 품목도 다양하다. 서울 촌놈 눈에는 신기할 따름이다. 스타일이나 장르 면에서 서울보다도 선택지가 많은 것처럼 보이니까. 멋들어지게 옷을 입는 지인도 대구 사람이었다. “동성로 한번 오시지요. 옷 좋아하시잖아요.” 나는 옷을 좋아하지, 그처럼 잘 입지는 못했다. 그 덕분에 대구는 멋쟁이들의 동네라는 인식이 박혔다.
‘엘비비 유나이티드’는 동성로 건너편 수동 골목에 있다. 한적하고 여유로움이 묻어나 동성로의 번잡스러움과는 반전된 분위기의 동네다. 오트밀 색으로 바랜 건물 외벽에 달린 우드 프레임. 내부도 바깥과 동일한 컬러톤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전시된 의류와 조화로운 자리에 소파와 의자가 놓여 있다. “Streamline Our Lives To Pursue Less(더 적은 것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의 삶을 간소화하십시오.)” 엘비비 유나이티드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공간을 꾸린 허민호 디렉터의 취향이 얼마나 깎고 깎아 날카로워졌는지 가늠해 본다. 판매하는 브랜드와 옷들도 성숙한 어른의 취향이다. 값어치 있는 데님과 블루종, 몸에 편하게 감기는 스트라이프 티셔츠와 경쾌한 기장의 치노 팬츠. 자신한테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중에서도 최고로 좋은 것들만 모아 놓았다는 인상이 든다. 주변에 이런 형이 있다면, 맨날 따라다니고 싶을 거다. (돈도 많을 것 같다.) 선반으로 시선을 돌리면 스웨덴에서 활동하고 있는 최근식 디자이너의 화병과 이솝의 제품들이 놓여 있다. 이솝 홍콩 오피스에서 먼저 연락을 취했다고 하니, 엘비비 유나이티드가 제안하는 삶의 방식이 더욱 또렷이 다가온다.
편집숍은 한정된 공간 안에서 옷과 제품을 통해 운영자의 관심사와 견지하는 태도를 투영하는, 입체적이고도 세밀한 과정을 필요로 하는 결과물이다. 엘비비 유나이티드는 그 과정을 몇 번이나 고민하고 여과해 정수만 남겼다. 동성로의 수많은 선택지에 지쳤다면 건너편 동네에 위치한 이곳으로 와보자.
최근식 디자이너의 화병
브랜드의 로고가 새겨진 매끄러운 입구
에디터 지정현
자료 제공 루프트맨션, 브라운 프론트 도어, 엘비비 유나이티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