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고 거닐다 돌아오면 되지

저마다의 이유와 속도로 닿는 곳. 뚜렷한 종착지가 아닌 마음이 머무르고픈 도착지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열차에 오른 후에야

보이는

Movie—유호 쿠오스마넨 〈6번 칸〉(2021)

Ⓒ〈6번 칸〉

“우리 내면에는 작은 동물이 사는데 그걸 받아들이고 믿어야 해. 그저 내면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엄마, 아빠, 딸, 남편 말은 전혀 들을 필요 없어.”

연인에게 오묘한 거리감을 느끼며 여행을 나선 라우라. 함께를 상상하던 장소에 혼자 가려니 마음이 무겁지만 암각화를 보기 위해 무르만스크로 가는 열차에 오른다. 그런데, 같은 칸을 쓰는 남자가 심히 수상하다. 물 마시듯 보드카를 들이켜더니 진탕 취한 채로 무례한 말을 쏟아낸다. 사랑한다는 말의 핀란드어를 묻는 료하에게 그녀는 답한다. “하이스타 비투.” 엿 먹으라는 뜻이다. 쇳소리를 내며 달리는 열차는 좁고 전화를 받지 않는 연인의 존재는 애달프다. 료하는 라우라에게 눈보라가 치니 캠코더로 찍으라며, 오래된 것을 좋아하냐며, 표정이 뚱하다며 말을 건다. 되돌아가지도, 나아가지도 못한 채 부유하던 라우라는 늙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료하를 따라나선다. 꽁꽁 언 길에서 유일한 온기를 지닌 할머니의 집. 오랜만에 미소를 보인 라우라는 사랑을 위해 건배하자 말하고 다정한 할머니는 답한다. “좀더 확실한 걸 위해 해야지. 너를 위해 건배하자.” 

영화는 그날 이후로 부쩍 가까워진 료하와 라우라가 무르만스크에서 다시 만나 보내는 시간을 그린다. 헤어짐을 앞두고 라우라에게 건넨 쪽지에는 하이스타 비투, 한마디가 적혀 있다. 료하를 보며 여행에서 만나는 유난스러운 다정함이 떠올랐다. 불쑥 말을 걸고 먹을 걸 안겨주고 나를 캐물어 반가움보다 불편함이 앞서는 그 행동들. 낯선 기분이 든다고 틀린 게 아닌데 언제 이렇게 의심만 많아졌을까. 어느 누구의 말이 아닌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라는 할머니의 조언처럼 마음의 문턱을 사뿐 넘어보려 한다. 설원을 달리는 춥고 좁고 불편한 무르만스크행 열차를 떠올리며.

거니는 걸음마다

놓인

Drama—이종필 〈박하경 여행기〉(2023)

Ⓒ 웨이브(Wavve)〈박하경 여행기〉

“이번 여행의 목표는 확실하다. 안 가본 길로 가보자. 사라져 버리고 싶을 때 떠나는 딱 하루의 여행.”

뜻대로 되지 않는 하루들이 있다. 그건 우리만이 아니라 박하경도 마찬가지다. 국어 교사인 하경은 수업 시간마다 교실에 성실하게 등장해 주어진 일을 한다. 책을 펴고 아이들을 다독이고 수업을 진행하고. 하지만 우뚝 서 있는 하경보다 손에 든 핸드폰이 더 큰 관심을 받는다. 그것뿐일까. 부장 선생님은 걸핏하면 전화를 걸고 비 오는 날에는 장화에 지렁이가 올라탄다. 이것저것 자꾸 무얼 알려달라며 전화하는 부모님은 도무지 하경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하경은 학교 복도에 서서 문득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떠나기로 한다. 토요일 단 하루 동안의 여행을. 

하경은 땅끝마을 해남에서 템플스테이에 참여해 소란한 마음을 가라앉힌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의 기억을 간직한 경주에 찾아가 너른 길을 걷기도 한다. 부산에 가서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찾아가 영화를 보고, 헌책방도 둘러보다가 밀면 한 그릇을 맛있게 먹는다. 떠나는 사람은 하경, 한 명일지 모르지만 이야기를 꾸려가는 사람은 여럿이다. 때로는 하경과 친근하고 반가운 사이인 인물이, 때로는 뜻밖의 인물이 등장해 그녀의 하루에 발도장을 찍는다. 우연한 만남은 닳디 닳은 일상의 감정을 뒤집어엎는다. 가벼워지고 싶어 떠난 여행은 더 많은 것을 얻어버려 돌아오는 길이 버겁기도 하다. 그럼에도 어떤 여행이든 떠나고 싶다. 매끈한 조약돌을 주워 살펴보고 다시 내려놓는 마음처럼, 거니는 걸음마다 놓인 인연을 주워 쓰다듬다 살며시 내려두고 싶다. 하경의 토요일에 몰래 뒤따라 나서는 상상을 해본다. “걷고 먹고 멍 때릴 수 있다면 어디든.”

마침내

돌아온 곳에는

Movie—다카타 마사히로 〈허니와 클로버〉(2006)

Ⓒ 〈허니와 클로버〉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그저 페달만 밟고 있었다. 그리고 떠올렸다. 모리타 선배의 재수 없는 웃음을, 야마다 선배의 어색한 눈물 머금은 얼굴을, 마야마 선배의 사실은 따뜻한 목소리를, 너의 미소를.”

부산함이 만연한 초봄의 대학교. 물감이 묻은 앞치마를 두른 이들이 양동이를 든 채로 붓을 헹구면, 한편에서는 물레를 돌리며 흙반죽의 무게 중심을 연신 매만진다. 근처 다섯 평짜리 낡은 아파트에서 살며 ‘미대생다운 불량함’이 부족하다 일컬어지는 다케모토는 우연히 신입생 하구미를 만난다. 천부적인 재능으로 캔버스를 채우는 하구미를 보며 다케모토는 첫눈에 반해버리지만, 그녀에게 다가서는 건 낡은 아파트에 제멋대로 등장한 선배 모리타. 둘은 특별한 재능 아래서 보이지 않는 영감을 주고받고, 다케모토는 한 발자국 뒤에 선 채로 그들을 동경한다. 탐구하는 학생들로 가득 찬 학교는 청춘의 상징처럼 느껴지지만, 타고난 것의 차이를 실감하는 무심한 곳이기도 하다. 너무나도 좋아하기 때문에, 내 손에 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닫게 만드는 이들의 곁에서 다케모토는 무작정 자전거에 오른다. “나는 도망쳤다. 어제까지의 모든 걸 뒤로한 채. 마치 굴러떨어지듯이.” 그저 페달을 돌려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간다.

길의 끝에서 청춘을 나눈 이들의 얼굴을 그린 다케모토는 달린 만큼의 길을 다시 돌아온다. 한 몸처럼 붙어 있던 자전거에서도 내렸다. 땅에 발을 디딘다고 모르던 답이 하늘에서 똑 떨어질 리 없다. 하지만 갈피를 못 잡던 마음은 잠깐의 여행으로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떠올렸다. “좋아해.” 다케모토의 말에 배시시 웃는 하구미. 인생은 여행과도 같다는 진부한 말이 생각난다. 종착지 대신 도착지면 충분할 테니까. 마침내 돌아온 곳에서 우리는 무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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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명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