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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원
정원은 고요하게 낯선 이를 맞이했다. 거대한 자연의 입에 삼켜지니 울창한 나무와 이름 모를 새가 정원의 깊은 중심으로 나를 인도한다. 드넓고 아름다운 땅 위에서 아주 작은 점이 되어가는 기분. 사사로운 생각과 부유하는 기억은 내려두고 초록빛 시간에 까마득히 잠겨본다.
사유원은 2023년 대구로 편입된 경북 군위군에 자리한 수목원이자 산지 정원이다. 70만 제곱미터, 약 20만 평에 달하는 이 광활한 터에서는 산등성이가 끝을 모르고 굽이친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도시에서는 절대 만나지 못할 압도적인 경관은 누구의 꿈에서 탄생했을까. 시작은 대구의 철강 기업 태창철강(현 TC태창)을 이끌었던 유재성 회장이었다. 1989년 유재성 회장은 꿋꿋이 이 땅을 지키던 모과나무 네 그루가 일본으로 밀반출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줄기와 잎에 세월을 새긴 고목을 이런 식으로 빼앗길 수는 없었다. 유 회장은 한달음에 달려가 네 배 값을 주고 나무를 지켜냈다. 그 후로도 모과나무를 수집해 300년 이상을 살아온 모과나무 108그루가 모이게 되었다. 그 자체로 생명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존재들을 한데 모으고자 그는 2006년 군위군 부계면에 부지를 마련했다. 그리고 배롱나무, 소나무, 소사나무, 바위를 수집하며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수목원을 만드는 꿈을 키워갔다.
모과나무가 지금의 사유원에 심긴 때는 2010년. 정원 곳곳에 세계 각국의 건축가들과 조경가들의 손길이 더해지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낯선 이를 맞이할 준비를 마치자 사유원은 2021년 조용히 관람객을 불렀다. 산책자가 정원을 거니는 동안, 멀리 뿌옇게 흐려진 산에서는 물안개가 피어나고 아름다운 석상과 조각들이 낯선 이를 기다린다. 이곳에는 건축물 서른 개가 자리해 있으며 사유원이라는 거대한 정원 속에 조성된 주제 공원은 아홉 곳이 있다. 거장들의 마음이 닿은 덕에 저마다의 웅장함과 경이로움을 갖췄다. 그것에 감탄하며 구석구석을 살피다 보면 세 시간이 훌쩍 흐른다. 좀더 깊게 누리려 하는 이들에게는 다섯 시간도 부족하다.
모든 공간과 구조물의 시선은 사람을 향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머무는 곳을 잠시 보여주겠다고 허용한 듯, 작위적인 느낌 없이 자연과 어우러진다. 풀과 꽃, 나무도 마찬가지다. 흔한 공원처럼 사람이 가는 길을 피해 얼기설기 심기지 않아 그들의 거처를 이방인에게 잠시 내어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가파른 오르막이나 우거진 숲길도 허용한다. 원시림 또는 잘 가꾼 수목원. 이곳의 정체를 더듬다 보면 일상의 문제들은 아득해진다. 머리를 뿌옇게 흐리던 크고 작은 지워지고 자연과 그 안의 오롯한 나만이 존재할 뿐이다.
입구부터 시작된 ‘비나리길’을 따라 걸으니 이곳의 전망대 ‘소대’가 나타났다. 높은 공간에서 보는 사유원은 어떤 얼굴일까. 소대 내부 계단을 오르니 탁 트인 창 너머로 ‘소요헌’이 보인다. 우거진 숲에서 고개를 살짝 내민 회색 건축물. 소요헌은 ‘자유롭게 거닐며 다니는 집’이라고 했다. 그곳은 산책자에게 어떤 길을 내어줄까.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앞에 서니 작은 입구가 나를 기다린다. 이곳은 Y자 형태의 건축물이 두 갈래로 나뉜 긴 복도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구조다. 천천히 들어서니 발걸음 소리가 텅 빈 거대한 공간에 천천히 울려 퍼졌다.
소요헌은 조각상과 작품 들이 자리한 거대한 갤러리다.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로 시자Alvaro Siza 그리고 제자
카를로스 카스타네이라Carlos Castanheira의 손길이 닿았다.
이 공간의 구성은 본래 스페인 마드리드 오에스테 공원
건립 프로젝트 일환으로 설계되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무산되면서 도면에만 존재하는 건물이 될 뻔했다. 유재성
회장은 이곳을 꼭 사유원에 만들고 싶어 알바로 시자를
계속 설득했고, 마침내 소요헌이 탄생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조각품은 벽에 매달린 녹슨 붉은 철판.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가 걸렸을 자리란다. 유재성 회장은 노년의 건축가를 설득할 때, 스페인전쟁 당시 폭격을 당한 게르니카 지역처럼 군위 또한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의 격전지였다는 점을 설명했다고 한다. 철판이 하늘에서 날카롭게 내려오는 모습은 폭력과 전쟁을 상징한다.
두 갈래로 나뉜 내부 복도 사이에 자리한 정원은 빛의 공간이다. 한 걸음 뗄 때마다 바닥 자갈 소리를 들으며 어둑한 내부와의 반전을 느끼다, 다시 건너편 터널로 진입한다. 통로의 끝에서 만난 건 거대한 알 모양 조각품. 피카소의 ‘임신한 여인’ 대신 설치된 이 작품은 아득한 길 끝에서 마침내 만난 생명의 시초였다. 죽음과 탄생이 순환하는 이곳은 전쟁의 잔인함, 새로운 희망을 들려주고 있었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장면을 목격하며 조용히 사유에 잠겨본다.
소요헌에서 나와 사유원의 심장부, ‘풍설기천년’으로 향했다. 유재성 회장이 수집한 모과나무 108그루를 만날 수 있는 정원이다. 이름은 바람과 서리, 인간의 욕망을 견뎌온 나무들이 천 년 동안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붙여주었단다. 평생 고요히 머무를 안식처처럼 이곳은 평화로움뿐이었다. 모과나무는 넓은 연못을 중심으로 구릉 위에 펼쳐져 있었다. 사유원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녹슨 철판은 모과나무 아래 놓여 나무를 떠받치는 것처럼 보인다. 인공물과 자연물은 원래 그 자리에서 함께 태어나고 자라온 듯 조화를 이룬다. 고목 사이를 지나는 동안 발견한 건 말갛게 영근 모과 열매. 수백 번 맺히고 졌을 이 생명에 경탄하는 사이, 정원은 나를 사유의 산책으로 인도한다.
이곳은 국내 최고 조경가 정영선의 손을 거쳤다. 그는 선유도공원,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디올 성수의 조경 작업에 참여하며 우리나라 조경 역사를 이끌어온 인물이다.
정영선 조경가는 풍설기천년과 더불어 사유원의 전체 조경을 담당했다. 그가 이끄는 ‘조경설계서안’에서 함께했던 박승진 조경건축가는 풀무원 물의 정원,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 등을 설계한 인물로, 사유원 조경에 힘을 더했다. 이곳에서 반 천 년을 보낼 나무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을 이들의 손길을 떠올려본다. 모과나무는 평균 수령이 300년을 훌쩍 넘긴다. 그들의 중심에는 유달리 늠름하고 장엄한 존재가 있는데, 바로 654년을 살아낸 모과나무다. 늠름한 모습으로 정원을 지키는 고목은 다른 나무들이 자라며 늙는 모습을 봐왔을 터. 그가 겪었을 궂은 날씨와 따스한 해를 헤아려보는 사이, 나의 사사로운 고민은 어느새 잠잠해진다.
산책 말미에 다다른 곳은 북쪽 끝에 자리한 ‘명정’이다. 이곳을 설계한 건축가 승효상은 1989년 건축사무소 ‘이로재’를 설립하고 파주출판도시와 입주사 건물을 매만진 인물이다. 수목원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전망대이나, 승효상 건축가가 내린 선택은 지하를 파내는 것. 수목원을 더 아름답게 보려면 기억을 마음에 잠시 머무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내부로 들어서니 그의 의도대로 높은 벽이 사면을 막았다. 나무와 풀도 이곳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시선 위로 하늘만 보일 뿐이다. 벽에서는 조용히 물이 떨어지고, 그 물이 모여 바닥을 가득 덮는다. 긴 콘크리트 의자에 앉아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하늘을 바라본다. 지나온 풍경을 떠올리며 고요한 시간에 잠겨본다. ‘명상을 위한 정원’이라는 이름 역시 잘 어울린다.
벽 너머에는 좁은 계단이 있다. 한 단씩 오르면 마침내 수목원의 전경이 펼쳐진다. 팔공산의 너른 품과 광활한 땅. 나무 사이를 지날 때는 볼 수 없던 시야다. 자연의 위엄을 눈앞에 두고 내가 걸어온 길과 되돌아갈 길을 살핀다. 얼마든지 다시 찾고 싶은 풍경이다. 긴 시간의 산책을 마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순간, 지나온 시간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그곳에만 존재하며,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장면들. 사유의 길을 다시 헤아려보며 이곳을 나서니 내가 부풀린 감정과 생각들은 이미 작은 점이 되어 있다. 울창한 숲과 조용한 바위 사이에 내가 아닌 나를 살며시 내려두고 온 덕분이다
현암 티하우스
사유원 첫 번째 건축물인 ‘현암’에서 자연을 벗 삼아 음료와 디저트를 마시는 프로그램이다. 다식과 함께 차를 마신 뒤, 싱잉볼 명상과 가야금 연주를 즐길 수 있다. 현암의 삼면을 창이 빙 두르고 있어 경치를 둘러보면 숲 한가운데 떠오른 듯한 기분. 회차별 시간대 확인과 예약은 사유원 홈페이지에서 가능하다. 회차당 6명, 한 팀인 경우 최대 8명까지 예약할 수 있다.
사담 런치&디너
물의 정원 ‘사담’에 자리한 레스토랑 ‘몽몽미방’에서 헤드 셰프가 조리한 특선 코스 요리를 경험할 수 있다. 널찍한 통창 너머로는 느티나무 숲과 아름다운 낙조, 비단잉어의 연못이 펼쳐진다. 달마다 다른 메뉴를 선보이며, 자세한 메뉴는 매달 사유원 홈페이지에서 공개된다.
동대구역 왕복 셔틀 패키지
군위에 위치한 사유원은 동대구역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다. 타지에서 온 방문객이라면 셔틀 패키지를 이용해도 좋을 터. 매달 특정 일자에만 제공되는 프로그램이니 사유원을 방문할 계획이라면 미리 살펴보자.
가가빈빈
사유원 내 유일한 카페다. 사유원은 외부 음식 반입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기에, 간식을 원한다면 가가빈빈을 방문해도 좋다. 풍설기천년에서 수확한 모과로 만든 모과차 등 다양한 음료와 디저트를 만날 수 있는 쉼터다.
에디터 차의진
포토그래퍼 장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