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찻잔에 담긴 낭만

카페가 흔치 않던 시절 한 잔의 여유를 누리고 싶은 사람들은 다방으로 향했다. 세월이 흘러 옛 정취를 안은 공간은 신식 카페가 넘쳐나는 시대에도 고유한 아름다움을 묵묵히 지키며 골목을 밝힌다.

달아나는 시간을 멈춰 세우며

학림

혜화역을 나와 고개를 돌리니 동네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장면이 펼쳐진다. 평화로운 마로니에 공원과 그 옆에 선 빨간 벽돌 아르코 예술극장. 그곳에 두고 온 기억을 꺼내보며 걷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학림’의 고풍스러운 창문이 나를 반긴다. 좁은 나무 계단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환영 인사 삼아 오래된 커피숍의 문을 열었다. 나도 모르게 문밖에 현재를 두고 왔는지 눈앞에 펼쳐진 공간에서는 분명 과거가 흐른다. 옛날 다방 특유의 소파와 벽면을 가득 채운 예술가들의 흑백 사진, 중앙에 자리한 피아노, 오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 내부 계단으로 이어진 2층에 올라가 볼까 하다, 볕이 좋은 1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젊은 손님들은 이곳이 붙잡아 둔 시간을 존중한다는 듯 책을 읽거나 공책에 무언가를 적어 내렸고, 중장년 손님들도 해사한 얼굴로 가게에 들어선다. 

휴전이 얼마 지나지 않은 1956년 처음 문을 연 학림은 약 70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켰다. 음악·문학·미술계 예술인들이 이곳을 자주 찾기도 했는데, 학림은 동시대 예술가를 만나는 교류의 장이자 시상을 써 내리는 작업실도 되어주었단다. 얼굴 모르는 이들이 이곳에 머물렀을 시간을 굽어보다 대표 메뉴인 비엔나 커피와 크림 치즈케이크를 주문했다. 폭신한 크림 세 덩어리가 커피에 두둥실 뜨니 부드럽고 달콤하다. 새콤한 케이크로 스푼을 옮겨 가며 학림만의 시공간에 머무는 기분에 잠겨본다. 

학림을 떠나기 전, 출입문에 새겨진 시인 황동일의 헌시를 읽었다. 그에게 학림은 “하루가 다르게 욕망의 옷을 / 갈아입는 세속을 굽어보며 / 우리에겐 아직 지키고 반추해야 할 / 어떤 것이 있노라고 묵묵히 속삭이는 / 저 홀로 고고한 섬 속의 왕국”이라고. 변치 않을 무언가가 이 세계의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든든한가. 학림이 오래 사랑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과일 잼을 곁들여 먹는 치즈케이크와
비엔나 커피

이제는 계산대가 된 DJ 부스

A. 서울 종로구 대학로 119 2층
O. 매일 10:00-23:00

커피의 본래 얼굴을 마주하는 곳

터방내

동작구 흑석동. 중앙대학교로 향하는 골목 한구석에는 세월을 간직한 커피숍이 있다. 빨간 철문을 열면 발밑으로 좁은 계단이 펼쳐지는데 한 걸음씩 옮기니 금세 지하로 닿는다. 1983년부터 손님을 맞이한 이곳의 이름은 ‘터방내’. 내부는 좌석이 여러 개 놓인 메인 홀을, 작은 방 여섯 개가 빙 둘러싼 모습으로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구조다. 주황색 조명이 테이블을 하나씩 비춰 어둑한 공간에 아늑함이 가득 찬다. 

빨간 가스난로의 온기가 닿는 자리에 앉으니 주인장이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카페 글로리아, 커피펀치, 카페 칼루아…. 커피도 이렇게 많은 변주가 가능했구나. 이름도 낯선 다양한 커피가 있는 이곳은 ‘사이폰 커피’ 전문점이다. 사이폰 커피는 오늘날 카페에서 흔히 사용하는 커피 머신이 개발되기 전 대중화되었던 진공 커피 추출 포트를 사용해 만든다고. 

가장 기본적인 브랜드 커피를 주문하자 주인장이 주방에서 호리병 모양 유리 용기를 가져왔다. 하단에는 물이, 상단에는 커피 가루가 담겼다. 곧이어 알코올램프에 불을 붙여 물을 끓이니 상하를 잇는 진공관으로 하단의 물이 전부 상단으로 옮겨 갔다. 커피 가루와 물이 닿으며 커피가 우러났고, 불을 끄자 비어 있던 하단 용기에 맑은 커피가 쏟아졌다.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지자, 주인장은 워낙 까다로운 기계를 다뤄야 하기 때문에 모든 커피는 자신의 손길을 거쳐 탄생한다고 일러주었다. 

이색적인 방법으로 정성스럽게 내린 커피는 터방내의 자부심이다. 합리적인 가격과 훌륭한 맛 덕분에 중앙대 학생들과 교수들의 발길이 40년간 끊이지 않는다. 이곳을 자주 드나들며 추억을 내려두었을 이들을 내심 부러워하며, 다시 좁은 계단을 타고 가게를 나섰다.

사이폰 커피를 내리는 모습

벽면을 가득 채운 세월의 흔적

A. 서울 동작구 흑석로 101-7
O. 월-토요일 12:00-24:00, 일요일 휴무

달큰한 옛 정서에 잠기다

을지다방

‘을지다방’은 다방 하면 떠오르는 한국적인 이미지를 고스란히 품은 곳이다. 오미자차, 라면, 인삼차 등 오늘날 카페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메뉴는 이곳이 서양식 커피숍과는 거리가 먼 공간임을 짐작케 한다. 1985년부터 을지로를 오가는 손님들을 환대해 온 이 공간은 최근 몇 년 새 젊은이와 외국인들도 종종 찾는단다. 아마 벽면을 사진으로 가득 채운 유명 아이돌 덕분이겠지. 내가 을지다방에 들어선 날도 주인아주머니는 나 같은 사람들이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자리를 안내했다.

한국식 다방에 왔다면 쌍화차는 꼭 먹어봐야 하는 법. 어색하게 쌍화차를 주문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진득한 한약 냄새를 풍기는 한 잔이 테이블 위에 올랐다. 달걀노른자가 동동 떠 있다.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주인아주머니께 묻자 달걀을 차에 적셔 겉만 살짝 익힌 다음 통째로 입에 넣으라는 설명이 돌아왔다. 똑같이 따라 해보는데 이런, 노른자가 터지고 말았다. 아주머니의 친근한 핀잔과 함께 삼킨 달걀노른자는 따끈했다. 대추와 잣이 듬뿍 들어 있어 씹는 맛도 좋았다. 쌍화차, 꽤 맛있는 음료였구나. 좀더 달달하게 먹고 싶다면 테이블마다 놓인 설탕을 넣으면 된단다. 

옆 테이블에서는 어르신들이 담소를 나눴고, 중년 여성들이 옹기종기 모여 라면을 나눠 먹었다. 을지다방을 보면서 가게는 낯선 이에게 잘 보이려 애쓰기보다, 낯익은 방문자를 따듯하게 맞아줄 때 저만의 자연스러움을 획득한다는 걸 알았다. 금색 벽시계와 옛날 달력이 잘 어울리는 이곳은 예상보다 빠르게 당신을 편안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달걀노른자가 떠 있는 쌍화차

테이블마다 놓인 설탕 보관함

A. 서울 중구 을지로 124-1 2층
O. 월-토요일 06:00-21:00, 일요일 09:00-20:00

다방만의 네 가지 규칙

세 장소에 머물면서 옛날 다방만의 문법을 발견했다. 오늘날 카페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공식들을 살펴보자.

1. 푹신한 레트로 소파

평소 카페를 찾으면 늘 의자가 아쉬웠다. 엉덩이가 닿는 부분이 너무 작거나 딱딱한 경우가 많았고, 단 한 잔의 시간만 머물게 하려는 운영자의 의도가 숨어 있다며 장난스레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방은 폭신한 의자를 내어준다. 대체로 학림이나 을지다방처럼 사각형 형태의 소파가 많은 편. 터방내에서는 둥그런 의자에 몸을 깊숙하게 밀어 넣을 수 있었다. 엉덩이가 적당히 꺼지는 소파는 편안한 시간을 보장하는 고마운 물건이다.

2. 모두의 전화기

휴대전화가 보급되기 전 모두 ‘삐삐’ 한 대씩 가지고 있던 무렵, 다방은 전화를 걸고 받는 장소기도 했다. 터방내에는 오래전부터 쓰던 공중 전화가 여전히 놓여 있는데, 손님을 찾는 전화가 걸려 오면 주인장이 소리 내어 “OO씨, 전화 왔어요!”라고 전해주었단다. 그럼 손님이 어서 달려와 수화기를 들었다고.

3. 가스렌지 위 주전자

과거 모습을 좀더 보존하는 몇몇 다방에서는 음료에 필요한 물을 직접 끓인다. 이때 카페에서는 보기 힘든 가스레인지와 주전자가 등장한다. 은색 주전자가 불 위에서 데워지는데 이 모습이 무척 낯설지만 정겹다. 방문했던 터방내에서는 커피를 마시고 갈증을 느끼는 손님들에게 주전자에 끓인 보리차를 내어준단다. 커피숍에서 보리차를 마실 수 있다니, 이색적인 풍경이다.

4. 아날로그 계산기

을지다방 같은 한국식 옛날 다방은 독특한 계산기를 활용하곤 한다. 네모난 홈 여러 개가 바둑판처럼 배열된 커다란 판이 바로 그것이다. 홈에는 테이블 좌석 번호가 적혀 있는데, 특정 가격을 뜻하는 색깔 조각을 넣어 합산 금액을 기록한다. 이 판은 일종의 ‘포스기’ 같은 역할을 하는 셈. 주인아주머니는 손님이 가게를 떠나기 전 이 계산기를 근거로 후불 결제를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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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차의진

포토그래퍼 박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