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동묘 벼룩시장에서 서울풍물시장까지
오래된
물건들의 거리
동묘 벼룩시장에서
서울풍물시장까지
버려진 물건들의 마지막 장소는 어디일까? 때가 타고 먼지가 끼고, 어딘가 나사 하나쯤 빠진 듯한 물건들이 마지막으로 흘러드는 장소 말이다. 이곳에선 각자의 사연을 품고 모인 사람과 물건들이 여기저기서 요란스러운 에너지를 뿜어댄다. 단돈 천원이지만 버려진 물건이 새롭게 가치를 갖는 곳, 이건 오래된 시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먼지 거리의
상인들
중고등학생 시절의 나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두 옷을 사는 데 쓸 만큼 옷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그때는 인터넷 쇼핑몰이 흔치 않아서 주로 동대문 주변의 쇼핑몰을 이용하곤 했는데, 나중에는 노하우가 생겨 도매상에서 더 저렴하게 옷을 사는 방법을 터득하기도 했다. 아주 늦은 밤 도매상들이 모인 허름한 상가를 어슬렁거리다 보면 수염을 잔뜩 기른 아저씨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곤 했다. 도매시장에서는 낱장으로 옷을 팔지 않아서 일반 손님들은 거의 방문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나는 아주 젊은 옷 가게 사장처럼 행세하며 “거, 샘플로 쓰려는 데 하나만 먼저 보여주세요.”라고 조금 강한 어조로 말하곤 했다. 그러면 상인의 절반 정도는 아주 싼 가격에 옷을 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속아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주 오랫동안 한 가지 일만을 해온 사람들이 풋내기의 거짓말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양손 가득 옷을 빵빵하게 부푼 검정 비밀봉지를 들고 다니다 배가 출출해지면 따뜻한 오뎅 국물을 마시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건 아주 오래 전 이야기이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TV프로그램에서 정형돈과 지드래곤이 구제 옷들을 싹쓸이하는 모습을 보고 이곳 벼룩시장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때 TV 속 상인들은 유명 연예인이 와서 무언가 일을 벌이고 가는데도 무척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이곳은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부터 손이 거칠고 목소리가 큰 상인들의 터였다고 한다. 누가 와서 무슨 일을 하건 대단케 여기지 않을 만큼 두껍게 먼지가 내려앉은 곳 말이다.
열에 하나는
건지지 않겠어?
동묘 벼룩시장은 각종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과 손님들로 언제나 만원이다. 평일에도 그렇지만 주말이면 ‘서울동묘공원’을 둘러싸고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사람과 물건들이 모여든다. 긴 담벼락을 따라 이어진 좌판과 그 주위에 모인 사람들의 분주한 손놀림을 보고 있자면 호기심에라도 한번쯤은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하나에 천 원, 여섯 개 오천 원!’ 모여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건져내는 옷가지는 물론이고 전자제품과 절판된 책, LP판, 건강식품, 각종 골동품과 기념품까지. 그야말로 없는 물건을 손에 꼽는 게 쉬울 정도다. 가격 또한 부르는 것이 값이라 적당한 흥정은 필수인데, 워낙 가격이 저렴하다 보니 얼마를 깎아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기도 한다. 그럴 때는 가만히 옆 사람의 거래를 지켜보면 된다. 얼마를 깎았을 때 상인과 손님 모두가 기분 나빠하지 않는지 살피는 것이다. 고작해야 1~2천원 정도가 되겠지만 성공했을 때 기분이 더 좋아진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흥정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사실 이 시장의 좋은 점만 나열한 듯 보이지만 이런 감상은 세 번째 쯤 방문했을 때 생겼던 마음이다. 좌판에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옷가지들을 보고 있자면 그것들이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 누구의 손때를 탔던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혹시나 미심쩍은 물건을 샀다가 뒤늦게라도 손해를 보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하고 전자제품 같은 경우에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수리비로 더 큰 돈을 쓸 수도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가 뭘까? 아무래도 저렴한 가격과 이곳만의 독특한 매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헌 물건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서 제품에 치명적인 문제만 없다면 물건의 상태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는 편이다. 게다가 어차피 새 제품을 사도 한 달만 사용하면 금세 구멍을 내거나 고장을 내는 이상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차라리 가격이라도 저렴한 편이 낫다. 기가 센 상인과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에너지가 좋다’는 말로 바꿔서 생각하고, 한 벌에 천 원 하는 옷의 상태가 마음에 안 든다면 ‘열 벌 중에 한두 벌은 건지지 않겠어?’ 하는 마음으로 바꾼다면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시간이라는 가치
동묘 벼룩시장에서 서울풍물시장까지는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의 거리만큼 떨어져있다. 처음부터 한 정거장이나 걸어가야 한다고 마음을 먹으면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거리에 깔린 물건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음 시장으로 진입하게 되는 코스다. 일반 상점들이 문을 닫는 주말에는 길거리의 좌판이 두 개의 시장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저 좌판을 따라가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서울풍물시장은 과거 황학동 ‘도깨비시장’의 상인들이 모여 새롭게 터를 잡은 곳이다. 앞서 이야기 한 동묘의 벼룩시장과 달리 지붕이 있는 실내형 시장으로 인테리어가 깔끔하고 파는 물건에 따라서 구역이 나눠져 있다. 춥거나 비가 오는 등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고 편안한 쇼핑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재래시장만의 투박하고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그립기도 하다.
각종 골동품과 필름카메라, 바이올린 상점을 지나쳐 옛날 물건들이 진열된 상점 앞에서 발이 저절로 멈춘다. 정말이지 ‘옛 것’이라고 적힌 듯한 물건을 보면 왠지 모를 향수에 젖게 된다. 꽃이라도 꽂아놓을까 생각하며 옛날 로고가 새겨진 우유병의 가격을 물어보니 상인은 대뜸 이십만 원이 넘는 가격을 부른다. 그저 허풍을 떠는 것 같지는 않고 정말 진지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아…’ 하고 말줄임표 같은 말을 뱉는다. 그저 우유를 담았던 유리병인데 가격이 저렇게 붙는구나. 시간보다 더 큰 가치는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는 어떤 것이 나중에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떠올려본다.
꼬박 2시간여에 걸쳐 시장의 모든 가게를 둘러보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시장표 음식을 먹는다. 막걸리 한 잔과 따뜻한 전을 곁들이는 것도 좋고 뜨끈한 칼국수 한 그릇도 든든하다. 이곳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어도 ‘아, 맛있다.’라는 말보다는 ‘그래, 이 맛이지.’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런 말은 평범한 음식도 그럴싸하게 만드는 주문 같은 힘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곳에도 사람이 있어서
주말이 되면 이곳의 시장들은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그 활기 넘치는 시장 안에 있으면, 어떤 건강한 기운이 절로 생기는 기분마저 든다. 하지만 사람이 몰리는 곳에는 여러 생각과 표정들이 있기 마련이고, 특히 동묘의 벼룩시장은 좋아하는 사람의 수만큼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마치 향이 독특한 음식을 두고 호불호가 갈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 장소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곳의 물건들이 위생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데다가 아무렇게나 쌓아놓고 파는 모양새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이다. 나 역시 처음에는 비슷한 생각이었다. 아마 취재를 위해 세 번 정도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다시는 들를 일이 없는 곳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거듭 시장을 찾고, 분위기에 적응하려 노력하고,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비단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갖 물건들 속에서 ‘득템’을 할 수 있다는 점이나 사람을 구경하는 일에 재미를 느낀다면 이곳은 충분히 괜찮은 장소처럼 보인다. 물론 모든 일에는 조금씩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만지고 싶지 않을 만큼 더러워 보이는 물건이나 작동이 될까 의심스러운 제품들에 타협을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사람은 각자의 취향이 있는 법이니까. 물건을 사도 괜찮고 그저 지나쳐도 좋지만, 이곳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던 장소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이 있던 풍경 말이다.
오래된 시장을 돌며
내가 산 물건들
시장에는 가격이 싼 만큼 어딘가 조금씩 모자란 친구들이 많다. 끈이 없는 시계나, 때를 벗겨내야 사용이 가능한 식기, 턴테이블도 없으면서 대뜸 사버린 LP판같이 한두 개쯤 이가 빠져버린 물건들. 그렇지만 ‘이 정도면 괜찮지.’라고 생각되는 물건이 있다면 주저 없이 흥정을 하는 편이 낫다. 이곳은 등을 돌리면 곧바로 다른 주인이 생겨버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01. 청록색 코르덴 재킷
사실 이 코르덴 재킷은 충동구매로 산 제품이다. 마침 그날따라 멋진 코트를 입고 간 터라 다른 옷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정말 마음에 드는 탐정풍의 외투가 아무렇게나 걸려 있어서 입어봤지만 사이즈가 너무 컸다. 어쩐지 아쉬운 마음에 아저씨께 몇 번이나 괜찮지 않느냐고 물어봤고, 아저씨는 내 계속된 물음이 귀찮았는지 ‘바보같이 크다’는 말로 나를 좌절시켰다. 그래서 나는 뭔가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옆집에서 아무 옷이나 골라잡았다. 하지만 돌아와서 보니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색깔인지 걱정이 앞선다.
가격 1만 3천원
02. 요술램프모양의 식기
처음 이 물건을 봤을 때 인도음식점에서 먹었던 시금치 커리가 생각났다. 딱히 시금치 커리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쩐지 걸쭉하고 색감이 좋은 음식이 담긴다면 멋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인 아저씨는 이 요술램프처럼 생긴 식기가 청와대에서 나온 물건이라며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귀띔해줬는데, 내가 눈치도 없이 어떤 대통령이 쓰던 물건인지 물었더니 그런 건 알 수 없다며 자꾸만 말을 돌렸다. 이 램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때를 벗기는 세제를 하나가 추가로 필요할 듯싶다.
가격 7천원
03. 끈 없는 시계
동묘벼룩시장 좌판에서 시작해 신설동 풍물시장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가장 많이 파는 물건 중하나가 시계인 듯싶다. 유명 메이커 시계부터 전자시계, 행사기념 시계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시간이 잘 가는 것도 있고 자세히 보면 흠칫, 멈췄다가 한번에 5초씩 시침이 점프를 하는 것도 있다. 그리고 내가 고른 이 시계는 끈이 없는 물건이어서 유난히 싸게 살 수 있었는데, 끈을 얼마에 구입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이 시계의 진짜 가격이 결정되는 셈이다.
가격 5천원
04. 폴라로이드 카메라
후지필름에서 나온 ‘인스탁스 미니7S’라는 제품이다. 먼지 낀 수동 카메라들 사이에서 유난히 하얗고 깨끗한 물건이 있어서 냉큼 골랐더니 방금 전에 어떤 학생이 다른 카메라와 교환하면서 놓고 간 물건이라고 했다. 나는 다른 사람이 가져갈까봐 한 손에 카메라를 들고 다른 손으로 가격을 검색했다. 정가가 10만원이 넘고, 중고 물건도 5만원에 거래되는 제품을 단돈 2만원에 구할 수 있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2천원을 더 깎는 일도 잊지 않았다.
가격 1만 8천원
05. 친구에게 선물할 LP판
턴테이블은 없지만 어쩐지 오래된 LP판을 갖는 건 근사한 일 같다. 특히 커버 사진이 예쁘다면 그 자체로도 멋진 장식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LP판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최근에 일본식 선술집을 차린 친구가 떠올렸고, 그의 조그만 가게 한쪽 벽에 이 그림이 걸린다면 멋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친구에게 선물 한 다음 가끔 들러 생색을 낼 일이 생겼으니 기쁜 일이었다. 물론 가격은 비밀로 할 생각이다.
가격 3천원
동묘 벼룩시장
동묘앞 역 3번 출구 서울동묘공원 일대
Open평일 14:00~일몰, 토~일 10:00~일몰
서울풍물시장
서울시 동대문구 천호대로 4길 21호
pungmul.seoul.go.kr
Tel 02 2238 2600
Open10:00~19:00(매달 둘째, 넷째 화요일 휴장)
에디터·포토그래퍼 김건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