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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뮤지션
보헤미안, ‘삶은 여행’, 언제든 어디로든 떠나는 사람. 음악의 방향도, 삶의 방향도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 뮤지션 이상은을 만난다고 하니 친구들이 외쳤다. “‘담다디’ 이상은?” 그리고 ‘공무도하가’부터 ‘비밀의 화원’, ‘언젠가는’까지, 모두 각자의 이상은을 꺼냈다. 데뷔 30주년, 1988년 처음 무대에 올라 열다섯 장의 음반을 낸 뮤지션은 자신의 노래 수만큼 다양한 얼굴로 기억된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러나 내가 만난 건 그저 2018년, 오늘의 이상은이다.
여행 갔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셨다고요.
짧게 다녀왔어요.
3박 5일로 다녀오신 거죠?
그렇죠. 30주년 기념으로 팬들과 여행을 갔거든요. 그런데 이제 다들 가족도 있고 회사도 나가야 하니까 밤도깨비 여행처럼 짧게 다녀왔죠.
팬들과 함께 떠났다고 해서 조금 의외였어요. 팬들과 이런 활동, 잘 안 하실 거 같았거든요.
저도 노래만 할 때는 팬들과 이런 걸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회사에 소속되어 있을 때는 위에 어른들이 시키면 하기 싫다고 했었죠. 그러다 한 7년 전쯤 제가 ‘브리즈뮤직’이라는 레이블을 만들었거든요. 만들고 나서 완전 처지가 달라진 거예요. 생각이 바뀐 거죠. 어릴 땐 안 하던 거, 싫어하던 거, 이제 해야 한다는 걸요. 아티스트 이외의 자아가 생겼죠.
여행은 어떠셨어요? 노래 ‘섬’이 나온 태국 코팡안으로 떠나셨어요.
팬 중 한 명이 여행사를 다녀요. 제가 3~4년 전에 “팬들이랑 여행 가면 어떨까?” 하고 말을 던진 적이 있었는데, 그걸 딱 기억했다가 “언니만 30주년이 아니라 저도 30주년이에요. 30주년 기념으로 이벤트를 벌일 테니 따라오실래요?” 이러는 거예요. 코팡안은 풀문 파티로 뜨기 전부터 자주 간 곳이에요. 되게 재미있게 놀고 왔어요.
‘삶은 여행’. 저한테는 은유적인 의미인데, 이상은 씨에게는 직유가 아닐까 싶어요. 삶을 여행처럼 살고 계시니까요. 본인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만약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앨범의 반 이상이 안 나왔을 거예요. 그 정도로 영감을 줘요. 영감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여행을 떠나보세요. 저는 일 년에 반은 여행 다니고 싶어요. 여행 가면 너무 행복해요. 한국에서는 여러 가지 억압 기제와 답답한 것들이 너무너무 많아요. 제가 고민해서 만든 ‘나’인데도 여기선 그걸 드러낼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양육할 수도 없어요. 잘 숨겨놓았다가 외국에 나가면 걔랑 얘기하죠. 내가 나 자신이랑. “잘 있었냐?”, “아우, 요번엔 좀 힘들었어. 그래도 사회가 조금 자유로워진 거 같지?” 이렇게요.
혹시 첫 여행 기억하세요?
태국 갔었어요.
그게 언제예요?
〈굿모닝! 대통령〉이라는 영화를 촬영할 때였어요. 그때 난생처음 외국에 나가본 거죠.
어떤 기분이 들던가요?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게 1989년이니까, 외국 한번 나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그 영화 보면 되게 웃길 텐데. 배를 잡고 웃을걸. 말도 안 되는 게 많아요. 이를테면 이쪽으로 걸어갈 때 빨간 가방을 멨는데, 저 사람이랑 얘기할 때는 가방이 파란색으로 바뀌어 있다든가 하는 거죠. 연기도 그런 ‘발연기’가 없어요.
태국 로케이션이면 자본이 아주 많이 투입된 영화 아닌가요?
자본이 엄청 투입됐죠. 그런데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이 벌었을 거예요. 노래도 되게 떴어요. “푸른 바다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그 노래 알아요. 그게 주제곡이었어요? 그런데 영화 제목은 왜 ‘굿모닝! 대통령’인가요?
제 캐릭터가 대통령을 꿈꾸는 여자애였어요(웃음). 아무튼 태국에서 ‘그린 커리’라는 걸 처음 먹어봤어요. 세상에 초록색 비눗물인 거예요. 너무 놀라서 혼비백산했죠. 그러고는 그다음 촬영으로 이탈리아에 갔어요. 태국은 커리랑 더운 기억밖에 없는데, 이탈리아는 되게 좋았어요. 피자를 시켰는데 그냥 빵에 토마토소스를 쓱 바른 게 피자라고 해서 놀란 기억도 있고, 베네치아에서는 가면이 너무 예뻤고, 진실의 입에 손 넣다가 진짜 잘릴까 봐 “나 거짓말 되게 많이 했는데.” 겁내며 넣은 기억도 나요.
혼자 떠난 첫 여행은 언제예요?
그렇게 갔다 오고 나니까 조금 자신감이 붙었다고 해야 하나, 활동도 익숙해졌고요. 데뷔하고 일 년 반 정도 지났을 때인 거 같아요. 일본을 갔어요. 완전히 반했죠. 화려하고 모든 게 예뻤어요.
지금 같은, 삶을 여행처럼 살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그렇게 혼자서 여행을 가니까 되더라고요. 그리고 그게 너무 행복했어요.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만 살면 한 가지 인생밖에 살지 못하지만 외국에 나가면 또 다른 인생도 살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영화 찍으러 갔을 땐 잘 몰랐고 일본 여행 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죠.
처음 정착을 위해 떠난 곳도 일본이었죠? (1988년에 데뷔한 이상은은 인기 절정이던 1990년 미술 공부를 하러 일본으로 떠났다가, 1991년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렇죠.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20대 때 내가 방송국만 왔다 갔다 해서 무슨 인간이 될 거야.’ 인생 공부를 해야 하는 나이잖아요.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던가요?
요즘 대학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교수들이 그런 말을 많이 해줬어요. 너는 지금 어떤 구름 위에 있는 거고, 실제적인 삶이 아니라고. 인간으로 몇 년 후, 십 년 후를 생각해야 한다고. 한두 명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요. 그런 사회였어요. 어른들이 어른들이었고, 인생이 인생이었죠. 철학적인 부분에 관해서는 그때가 훨씬 성숙했어요.
그런데 스타가 되고 싶었다고 하셨어요.
스타가 되고 싶은 건 내 생각이고, 어른들이 보기엔 그래도 제가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이죠. 어떤 교수님께 편지도 받았어요. “상은 씨 정말 마음에 무척 들고 다 좋은데, 내가 어른으로서 충고 한마디 해주자면 지금 이대로 살면 안 돼요.” 캐롤 킹Carole King 음반도 함께 보내줬어요. “인기는 물거품 같은 것이고 2~3년만 지나면 딱 꺼져버릴 거예요.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상은 씨가 평생 음악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캐롤 킹 음반을 들어보세요.” 그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하고 아티스트의 길을 걷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여행 많이 다니셨잖아요. 이상은만의 여행 철학이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여권이 세 권이니까요. 두 권 다 꽉꽉 채워서 쓰고 지금 세 권째 채우고 있으니까, 여행을 많이 다니긴 했네요. 일단 저는 무조건 100퍼센트 자유여행이에요. 그냥 티켓 사고 떠나요. 숙소 말고 정하는 게 없어요.
뭘 볼지, 뭘 먹을지도 안 정하세요?
네. 한 개도 안 정해요. 도착해서 그때부터 탐색하는 거예요. 모험을 많이 하고 미지의 세계를 만나는 걸 좋아해요. 그렇다고 해도 오지는 좀 그래요. 잡지라도 한 권 사 오고, CD라도 하나 구해오는 게 중요해요.
문화적인 베이스가 강한 곳이 여행지로 좋으신가 봐요.
문화적 양분을 흡수하기 위해서 여행을 가는 경우가 반 이상이니까요.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가 궁금해요.
여행 가서 좋은 데는 없고, 그냥 여행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자기 자신에게 최고의 휴식, 휴가는 역시 여행일까요?
그렇죠. 최고가 여행이죠. 그런데 사실 여행은 조심스럽게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비싸고 돈도 많이 들고요. 여유를 찾아 떠나는 게 여행이지만, 그런 여행도 여유 있는 사람이 가는 거니까요. 마음의 여유도 있어야 하고요. 그러니까 지나치게 힘든 상황에서 여행 가겠다고 몸을 움직이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저는 그런 분들에게도 최고의 명약은 여행이라고 생각해요.
일상에서 휴식을 취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다면요?
세컨드 하우스는 아니지만, 해보니까 되게 좋은 게 있어요. 부모님이 시골에 사세요. 저는 서울에, 부모님은 시골에, 원래는 그냥 이거였어요. 명절 때만 얼굴 보고요. 그런데 부모님이 몸이 좀 약해지시니까 저한테 SOS를 치시는 거예요. 제가 외동딸이잖아요. 연세가 많이 드셨구나, 저도 충격을 받았죠. 그래서 내려갔어요. 충남 공주인데요, 처음에는 힘들었죠. 시간 내서 내려가 살림도 도와드려야 하니까요. 자, 이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 일이 점점 손에 익고, 부모님도 제가 가니까 다시 꽃피는 거예요. 이제 좀 편안해지면서 거기가 세컨드 하우스가 됐어요.
시골에 내려가는 게 휴식인 거예요?
네. 부모님도 좋아하시고 저도 서울에만 있으면 너무 괴로운데 자연에서 좋은 공기 쐬어서 좋아요. 부모님과 옛날 얘기하면서 보내는 시간도 좋고요. 사람들한테 꼭 얘기해 주고 싶어요. 다시 부모님께 돌아가라고. 그리고 부모님이 받아들여 주면 일 도와드리는 건 필수예요. 그러면서 거기에 있는 거예요. 마치 시골 사람이 된 것처럼요.
하늘 보는 거 좋아하실 것 같아요. 하얀 태양, 날아가는 새, 고개를 들어야 알 수 있는 것들이 가사에 많이 나와요.
하늘 많이 보고 살면 좋겠어요. 하늘 보는 거 되게 중요해요. 나이 먹을수록 진짜 하늘 보기가 힘들더라고요. 어릴 땐 맨날 봤는데.
맞아요. 별도 보고요.
지나가는 구름만 봐도 너무 행복했는데. 하늘 보는 걸 잊어버리지 않으면 좋죠.
데뷔 30주년 어떤가요. 숫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실 것 같지만.
맞아요. 30주년이라고 말하는 게 멋없다고 생각했어요. “나 30주년이야.” 촌스럽잖아요. 그런데 실제 내가 느끼는 것과 상관없이 정성을 다해 파티를 준비해주는데, 거기다 대고 멋없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소통의 문제예요. 상대방이 30주년을 중요시 여기면서 나한테 다가올 때, 나도 인정해줘야죠. 내 생각을 그대로 이야기해버리면 소통이 안 되잖아요.
30주년에 의미를 부여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어서 질문드릴게요. 30년이란 시간 동안 계속 음악을 하게 한 원동력은 뭘까요?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데, 저는 어릴 때 음악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물론 ‘노래할 때 되게 행복하다, 가수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에요. 그래도 진지하게 장래에 대해서 고민할 때는, 미대에 가려고 했죠. 아버지께서 건축을 하셨거든요. 계속 미술을 했으면 디자이너가 되든 화가가 되든 했을 텐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음악을 하게 된 거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음악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예요. 이론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음악을 한다는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스타가 되고 싶었죠. 아무 준비 없이 시작했으니 제가 너무 미완성인 거예요. 완성하려고 계속하다 보니까 오래 가게 됐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 완성이 있다는 생각은 안 하는데 계속 배워가면서 갈 수밖에 없잖아요.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처음 제 생각과 다르게 시대가 계속 변하고 그래서 음악도 변하고, 음악을 만드는 방법도 변하고요. 계속 공부만 하다가 여기까지 와버렸고, 30년이 지나간 것 같아요. 늘 당근을 좇는 말처럼, 허덕허덕 겨우 나왔는데 평론가들이 ‘오케이’ 해줬어, 이런 거예요. 그게 얼마나 힘든데요. 지난번에 음반 냈을 때 평론가와 지금의 평론가가 다른데 계속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무서운 일이에요.
대중의 반응보다는 평단의 평가와 그 기대치를 맞추기 위해 계속 애썼다는 말처럼 들려요.
저는 평론가들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가 너무 중요했어요.
음악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불안감이 늘 있었나 봐요.
아직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고, 실제로 나는 부족하다고 늘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뭘 해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걸 하는 편이, 결국은 좋은 거예요.
저는 어느 순간 “몰라, 다 놓자!”가 될 것 같아요.
살아남아야 될 거 아니에요. 창피하잖아요.
지금도 평단의 평가가 중요하세요?
그동안은 오로지 음악성을 인정받는 게 목표였어요. 안 팔려도 상관없다, 음악성 하나만큼은 누구도 무시 못 한다. 두 가지를 다 이룰 순 없어요. “나는 음악성 있다는 말만 들으면 돼.”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거는 이뤘으니까, 지금은… 너무 애쓰고 싶지 않아요. “이건 이상은 음악이야.”라고 내 색깔을 찾았잖아요. 처음에 가사 쓰는 거 10년 고생하고, 멜로디 찾는 데 10년 고생하고, 또 다른 거로 10년 고생하고 나니까 더 욕심부릴 것도 없고요. 그냥 내가 좋아하는 쪽으로, 나답게 하고 싶은 거 하고 내려놔도 되겠다, 편하게 해도 되겠다 생각해요.
가장 편하게 작업한 앨범은 어떤 거예요?
14집 [We are made of Stardust]요. 레이블을 만들었더니 진짜 편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되더라고요. 눈치 볼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저는 그 앨범이 좋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앨범이에요.
진짜 눈치 하나도 안 봤어요.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이 없어서 진짜 끝까지 살렸어요.
독학으로 에이블톤 라이브를 공부해 작업했다고 들었어요.
네. 그런데 그것도 나왔을 땐 정말 반응이…. 좋다는 사람 지금 두 번째 만나는 거 같아요.
제가 타이틀 곡인 ‘Something In The Air’에 영감을 많이 받아서(웃음), 인터넷 아이디에 항상 ‘Air’를 넣었어요. 그 말이 너무 좋아요.
일렉트로닉 음악 하지 말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당신은 어쿠스틱이 어울리는데 왜 그런 걸 해?”, “아, 됐어. 난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거야.” 하고 싶은 음악을 내 멋대로 하려고 회사를 만든 거거든요. 그 시작이 된 게 14집이어서, 저한테 14집은 매우 중요해요.
〈달팽이 호텔〉 나오셔서 앨범을 만들 때 작업 기간과 방법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작업 방법이 궁금해요.
컴퓨터가 생긴 다음부터는 그 전과 작업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죠. 14집부터 컴퓨터로 작업하기 시작했어요. 15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했어요. 연주도 하고 믹싱도 하고. 홈레코딩의 시대잖아요. 그걸 한번 해본 거예요. 죽는 줄 알았어요.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해보자!’ 하고 시작했는데, 끝내고 아파서 끙끙 앓았어요. 그런데 어쨌든 짧은 시간 안에 앨범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혼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죠.
아무것도 모르는 스무 살에서 홈레코딩까지, 스스로 대견한 마음도 들 것 같은데요?
그게 중요한 시대니까요. 지금은 음반 자체가 판매가 안 되기 때문에 “만약 네가 계속 음악을 하고 싶으면 스스로 제작을 할 수 있어야 해.”라는 시대인 거예요.
그렇다면 기술적인 부분 말고, 어디에서 영감을 받나요? 소재는 어떻게 가사와 음악으로 옮기시고요?
음악이 나오는 환경이 중요해요. 음악을 만들 때는 꼭 여행을 가요. 한국에서는 왜 이 ‘삘’이 안 나오나 모르겠어요(웃음). 14집도 뉴욕에 갔기 때문에 나온 거예요. 뉴욕에서 아파트를 빌려서….
그곳에서 별 같은 불빛을 보며.
진짜 그런 걸 보니까 영감이 팍팍 떠오르지. 그래서 그 느낌 그대로.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에고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뭐가 나오거든요. 방법론적으로 가장 쉬운 게 여행이에요. 여행을 가면 다 해결돼요. 나에게 집중이 돼요. 나 자신이 되어서 자유롭게 있을 수 있는 건, 여행 갔을 때뿐이에요.
지금 16집 준비 중이시잖아요. 그럼 여행 계획도 있으시겠네요?
당연히 가야죠. 안 가면 안 나와요(웃음).
어떤 앨범이 될지 조금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솔직히 말하면… 사람이 몸이 있고, 혼이 있고, 영이 있다고 그래요. 신학대학 가면 공부하는 건데, 제가 신학 공부를 조금 했어요. 몸이 맨 밑에 있어요. 혼이라는 건, 예를 들면 어떤 평론을 쓸 때 움직이는 게 혼이고요. 그 위에 영이 있어요. 음악도 영적인 음악이 나올 때가 있고, 혼적인 음악이 나올 때가 있어요. 이번에는 어떤 게 나올지 모르겠어요. 영적인 부분들로 더 많이 가게 될지, 아니면 혼적으로 영화 평론을 쓰듯 곡을 쓰게 될지요.
여행지나 앨범 발매 시기도 결정되지 않은 걸까요?
삶의 굵은 줄기가 있잖아요. 그게 저는 음반이거든요. 그 굵은 줄기는 ‘어떻게 가나 보자.’ 하는 것도 있어요. 그래서 미리 정해놓은 것도 없고요. 여행을 가면 그때부터 영감이 떠오르기 시작해요. 아, 꼭 얘기해줘야지 하고 생각한 게 있어요. 제가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플로우Flow’예요.
‘흐름’이요?
네. 그러니까 흘러 흘러가는 거예요. 음반도 흘러 흘러가고, 삶도 흘러 흘러가고. 그냥 흐름이 있는 것 같아요. 30년 지나보니까, 제가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냥 가보니까, “뭐가 정해졌어요?”, “정해진 건진 모르겠는데 시간이 지나고 흘러 흘러가다 보니까 나왔어.” 이런 느낌인 거예요. 삶을 강물 따라가듯이, 과정을 즐기면서 가다 보면 이렇게 작품도 나오고요. 나의 흐름을 잘 따라가는 게 저의 테마예요.
아까 음악은 일상을 벗어나야 나온다고 하셨는데요, 요 몇 년 한국 사회에 여러 변화가 있었잖아요. 이런 일상의 경험이 앞으로 나올 음악에도 영향을 미칠지 궁금해요.
영향 정도가 아니에요. 일상에서 흡수된 정보들이 일상을 벗어나면 나와요. 그거를 차단하고 다른 게 나오는 게 아니라요. ‘정권이 바뀌었구나, 이런 일이 있었구나, 미투 운동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받아들이죠. 그런데 일상의 함정은 무엇이든 딱딱하게 느껴지게 하는 거예요. 음악은 일상을 일상이 아니게 만들어줘요. 공간을 바꿔줘요. 그러려면 이제 막 들어온 많은 정보를 일상적이지 않은 모양새로 바꿔야 하죠. 그게 예술이잖아요. 안으로 들어온 정보를 표현할 때는 일상이 아닌 장소에서 더 탈脫일상적인 게 나온다는 의미예요. 소재 자체는 현실에서 많이 얻어요.
음악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셨잖아요. 음악을 만드는 방법도 어쿠스틱에서 컴퓨터로 바꿨고요. 그러면서도 이것만은 꼭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게 있다면 뭘까요?
몸 아끼지 말자(웃음). 앨범 하나 내면 건강이 많이 상해요. 사실 작업할 때는 평단도 생각나지 않아요. 이유가 뭐냐 하면, 목적을 가질 필요가 없거든요. 그냥 그 가치랄까? 너무 고통스러우면서도 너무 황홀한 거 알아요? 음악을 만들 때 너무 고통스러운데 너무 황홀해요. 이런 고통이 없어요.
그 황홀함은 음악을 만들 때만 느낄 수 있나요?
그럼요. 음악을 만들 때만 느낄 수 있는 황홀함이죠. 그것 때문에 만든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너무 힘들어요. 그 기쁨이나 황홀함은 정말 다른 세계에 있는데 그 세계에 들어가면 너무 피곤하고 아파요. 사람이 7시간 동안 앉아서 같은 소리를 4시간 동안 듣다 보면 미치겠거든요. 몸이 감당을 못해요. 그러니까 그 행복감을 느끼려고, 나 좋아서 하는 거예요.
예전에 《인생기출문제집》에서 이런 말을 하셨죠. “지금 당신이 품고 있는 가장 황당무계하게 큰 꿈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되돌려 드리고 싶어요.
16집을 무사히 잘 만들어내는 거예요.
황당무계하지 않은데요?
그래도 제 마음은 황당무계예요. 언제나 ‘내가 이걸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아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셨어요.
저는 처음 데뷔했을 때의 대중적인 인기나 그 이후에 행보를 바꿔서 작품성 중심으로 간, 그 두 개의 길 다 감사해요. 그러니까 어떤 게 더 옳다고, 전 지금은 생각하지 않아요. 한참 지금의 길을 갈 때는 이 길밖에 안 보이니까 ‘담다디’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인지 팬들이 스스로 갈등하는 경우가 있어요. “난 그래도 ‘담다디’ 때 언니를 잊을 수 없고, 그때 나한테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르고, 대중적인 어떤 것들을 잊을 수 없어요.” 그걸 거부하지 않을 거예요. “맞아요, 그게 당신 삶의 행복이었으면 저는 그걸 인정해요. 다만, 제가 두 번 다시 그걸 보여드릴 수 없고, 보여드릴 능력도 없어요. 그리고 그런 방향이 아닌 길을 선택해서 왔어요.” 두 갈래 길이라고 했잖아요. 난 지금의 길을 선택해서 온 것뿐이에요. 두 길을 동시에 걸을 순 없었어요.
갑자기 ‘좁은문’이 생각나요. ‘좁은문’을 선택하셨어요.
맞아요. 어려운 길을 선택했죠. 그렇지만 선택의 문제였지 우열의 문제는 아니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더 이상 “‘담다디’ 때는 싫었어요.”라는 말 안 해요. 고맙다고 해요. 그리고 또 이렇게 생각해요. 제가 계속해나갔기 때문에 ‘담다디’가 사라지지 않은 거라고요.
너무 좋은 말이에요. 둘 중 하나를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둘 다 있었네요.
내 능력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해서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그래도 꾸준히 나한테 맞는 방식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제 어린 시절을 좋아한 사람들이 아직도 그때를 추억할 수 있잖아요. 둘 다 되게 고맙고, 그 시절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때를 부정하지 않게 됐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변한 마음일까요?
그렇죠. 다 감사해요. 그리고 신기하죠? 뭐가 됐든, 뭐라도 선택해서 끝까지 가니 두 가지 다 얻은 느낌이 든다는 게 말이에요.
헤어 ·메이크업 홍은,수민(이경민 포레 홍대점)
장소 협조 포비베이직
에디터 김혜원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