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단위로 ‘말’을 전할 수 있는 시대에서 다른 매체와 편지를 비하기는 어렵다. 편지는 쓰는 행위이기 이전에 마음을 전하는 오래된 통로이자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해서 쓰이는 사적이고 내밀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손과 발로 해왔던 많은 일을 어렵지 않게 기계로 대체할 수 있지만, 마음을 전하는 건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알베르 카뮈와 장 그르니에, 루시드폴과 마종기, 권정생과 이오덕, 이중섭과 그의 아내 남덕. 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처럼.
작가 알베르 카뮈와 장 그르니에 하나의 《섬》에서 만난 두 명의 《이방인》
작가 알베르 카뮈와 장 그르니에가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1930년, 서른두 살의 장 그르니에는 교사로 부임한 알제의 철학반에서 열일곱 소년 알베르 카뮈를 만난다. 그들은 단순한 사제지간이 아니라 30년 동안 총 235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사이였다. 하지만 스승과 제자의 표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사람들의 생각처럼 늘 명확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카뮈는 거의 모든 중요한 원고를 그르니에에게 보냈지만 동시에 창작의 자유를 완전히 갖고 있길 원했고, 그르니에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가 ‘알베르 카뮈의 스승’으로만 비치는 것에 대해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편지 속에는 서로를 향한 신뢰와 애정이 깊이 스며있다.
…다만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선생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걸 대놓고 바로 말할 수 있는 분은 선생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솔직히 제가 계속해서 글을 쓰는 게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주 불안한 심정으로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거나 거기서 어떤 이득을 얻는 쪽이 아니라는 건 선생님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의 삶에 순수한 것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글쓰기는 바로 그러한 것들 중 하나입니다.
알베르 카뮈, 1938년 6월 18일 토요일
다시 한번 선생님의 편지에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제가 하는 작업에 대하여 엄격하셨습니다. 저는 한 번도 그와 다르게 해주시기를 바란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알베르 카뮈, 1941년 5월 5일
벨쿠르에 있는 당신의 집을 찾아갔던 때가 생각나오. 아마도 십 년은 지난 일 같군요. 당신의 눈에는 내가 ‘사회’를 대표한다고 보였겠지만 당신은 내게 결코 ‘이방인’이 아니었어요. 당신의, J.G.
장 그르니에, 1942년 9월 19일
때로 친구가 옆에 있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자주 생각합니다. 이 고장에서 지내는 것이 힘에 겹습니다. 다시 바닷가 모래사장을 뛰어다닐 수 있을 때가 되면 저는 너무 늙어 있겠지요. …10월이 되면 제가 선생님을 만난 지 십삼 년이 됩니다. 그러니 이렇게 적어도 되겠지요. 선생님의 오랜 친구, A. 카뮈
알베르 카뮈, 1943년 4월 15일
우리는 항상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한 번도 나와 무관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생각도, 당신의 고독도.
장 그르니에, 1943년 부활절
《오해》는 《이방인》과 마찬가지 의미에서 정말 알베르 카뮈의 것입니다. 주제는 아주 거대한 것이고 당신은 그 주제를 그것에 걸맞게, 그리고 동시에 절제하여 다루었어요. 그 절제가 바로 당신의 힘입니다. …그 작품을 읽을 수 있어서 기뻐요. 나를 위해서,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 기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장 그르니에, 1943년 10월 6일
가끔 저는 선생님 이외에는(그리고, 물론 아무 말도 주고받지는 않지만 어머니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전혀 할 말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저는 선생님의 의견을 들어보지 않고는 무엇이든 제가 하고자 하는 일에서 속수무책이 되고 맙니다. 제가 아무 소식을 전하지 못하더라도 개의치 마시고 편지 보내주십시오.
알베르 카뮈, 1948년 1월 21일
당신의 보내준 두 통의 편지를 받고 몹시 기뻤어요—멋진 이탈리아 여행을 했다는 소식을 알려준 편지 말입니다—당신이 여행하고 있는 동안 나는 ‘마음으로’ 긴 편지를 당신에게 쓰곤 했어요. 아주 젊을 적에는 자기가 느끼는 것을 편지를 받는 사람도 똑같이 느낄지 어떨지 생각도 해보지 않고 편지를 쓰는데, 바로 그런 편지를 당신에게 쓰곤 한 거예요. 그렇지만 나이가 서른이 넘고 나서부터 스무 살 적에는 무한한 것으로 여겨졌던 의사소통의 가능성이 너무나 의심스럽게만 여겨졌어요.
장 그르니에, 1955년 9월 23일
《섬》의 서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회에 전과 다름없는 감동과 찬탄의 마음으로 《섬》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감동을 말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알베르 카뮈, 1958년 7월 28일
친애하는 카뮈, 이 원고를 오직 ‘당신 혼자만’ 보고, 당신을 찾아오는 손님들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잘 간수해주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장 그르니에, 1959년 5월 11일
시인 마종기와 음악가 루시드폴 고국을 그리워한 음악가와 시인의 《아주 사적인, 긴 만남》
시인 마종기는 도쿄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의사로 일하며 모국어로 꾸준히 시를 썼다. 디아스포라Diaspora로서의 삶과 인간에 대한 사려 깊은 시선을 단순하고 아름다운 단어로 매만졌다. 그리고 음악가인 루시드폴(조윤석)은 마종기의 거의 모든 시집을 다 읽은 그의 ‘팬’이었다. 둘은 한 편집자의 제안으로 2년간 메일을 주고받았다. 마침 루시드폴이 잠시 음악 활동을 접고 스위스 로잔에서 공학 공부를 하던 때였다. 그들은 서로의 공통분모를 확인하며 세계를 넓혀갔다. 두 사람의 편지에는 이방인으로 사는 삶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예술가로서 ‘쉽고 좋은’ 음악과 시를 들려주고 싶다는 맑은 열망이 담겨있다.
머지않아 남미로 여행 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시 속에 남아 있는 흔적 탓인지 몬태나 평원이며 리스본이며, 선생님이 다녀오신 곳을 제가 가게 될 때에는 늘 선생님의 시집을 가져가곤 합니다. 『론니 플래닛Loney Planet』은 한 번도 가져가본 일이 없지만요.
조윤석, 2007년 8월 24일
많은 평론가들이 내 시는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고 해석할 것도, 분석할 것도 별로 없다고 합니다. 사실 그렇겠지요. 하지만 내가 정말 무식해서만일까요. 나는 시를 분석의 대상으로나 관념의 방법학으로는 쓰지 않습니다. 아니, 써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문학은 내게 너무나 소원한 존재입니다. 윤석군의 음악에서 내가 느끼는 가사와 음악의 아름다움이 더 이상의 학문적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단순한 그 아름다움,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고, 그것만으로 늘 깊이 채워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마종기, 2007년 12월 11일
왜 지금 하던 연구를 그만두려는 걸까, 무엇보다 왜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걸까, 수없이 되뇌어보았습니다. 이건 급작스럽게 내린 결론일까. 아니면 여태껏 축적되어온 무언가가 결국 때가 되어 드러난 것뿐일까. 정말 로잔과 연구자로서의 인연이 다 되어서 떠날 ‘때’가 된 걸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요. 하다못해 가족들에게나 교수님에게도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드려야 했으니까요. 그러다가 굳이 중심에 있는 이유를 하나 끌어내보았는데, 그동안 그리 짧지만은 않았던 20대 말과 30대 초반의 외국생활 동안 저의 내부에 끊임없이 쌓여온 어떤 내상內傷이 이젠 역으로 서서히 저를 무너뜨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가 진단을 비로소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시 한 대목처럼 키 큰 서양사람들을 당해내려고 ‘목을 너무 길게 빼’면서 살아왔기 때문일까요.
조윤석, 2008년 10월 2일
…한동안 나는 부양가족이 많아졌고 그후에는 이런 것이 내 운명이겠거니 하면서 귀국을 완전히 포기하고 「바람의 말」이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같은 시를 혼자 울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내 귀국의 꿈이 이렇게 깨어졌기 때문에 윤석군이 귀국을 결정한다고 했을 때 내 일 같이 기뻤던 것일까요. ‘내상’이란 단어가, 보이지 않는 ‘상처’라는 의미가 내 가슴을 다시 흔들어 깨우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종기, 2008년 10월 5일
사실 나는 고국을 떠나기 전까지는 시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가장 앞서 가는 시학을 가지고 시를 만드는, 언어의 기능공으로서 날카로운 언어와 표현 감각을 연마하려 했습니다. 어느 평론가는 내 시에 대한 글을 쓰면서 초기 시에서 바로 그런 것을 간파했노라고 했지요. 그러나 외국에 온 후부터, 그리고 어려운 수련의사로 외국생활에 지쳐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런 욕망은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겨우 나 자신을 위로하고 나 자신이 깊이 침잠할 수 있는 영혼의 작고 따뜻한 방을 마련하고 싶어서 시를 썼습니다. 볼품없는 시를 하나 마치고 혼자서 목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던 날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시를 만드는 시인, 언어의 연금술사보다 골목길 장돌뱅이의 목소리를 더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마종기, 2009년 1월 29일
저는 이제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음악도 마음껏 하고, 고국의 음식도 마음껏 먹고, 우리나라 말로 말하고 싸우고 울고 웃으며 살기 위해 돌아갑니다. 지금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우울하고 슬픈 소식들이 더 많습니다. 지금껏 멀리서 듣고 보아온 소식들을 피부로 느끼기에는 저는 너무 바쁘고 또 멀리에만 있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그 소식 한가운데에서 부대끼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어쩌면 거리에서, 투표함 앞에서, 식당에서, 술집에서, 집 안에서, 운동장 안에서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 속에서 한 사람으로 살아가겠지요. 그때그때 느끼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생각하는 것들을 노래로 만들고 부르겠지요. 저는 제 노래가 그렇게 대단한 노래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지만, 언젠가 말씀하셨듯이 ‘쉽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으면 하는 소망 하나는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제가 보는 사람과 세상과 우리나라는 다시 저에게 내가 만든 노래를 들어주고 보여주는 거울이 되겠지요. 이제 비행기에 오르려 합니다. 오늘 한국은 입춘이라고 하네요. 봄이 오는 날에 제가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의 손에는 왕복 티켓이 없네요.
조윤석, 2009년 2월 4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에, 인조 때의 홍만종이란 분의 글이 있습니다. ‘춥지 않을 정도로 따뜻하게 하며 시장치 않을 만큼 배를 채운다. 욕되지 않은 것을 영광으로 이해하고 화가 없는 것을 복으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윤석군이 자신의 음악에 대해 늘 고민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이런 시대에 고마운 일이고 존경할 만한 일입니다.
마종기, 2009년 2월 26일
…항상 선생님의 시에 나오는 그 ‘쉽고 좋은’ 시에 대한 생각, ‘쉽고 좋은’ 음악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답니다. 지난 편지에 썼듯이 그 ‘쉬운’ 시라는 것, ‘쉬운’ 음악이라는 것, 그게 참 어렵지요. 작자와 독자(청자)가 더 ‘쉽게’ 만나면서도 감동을 교감할 수 있다는 것. 멋진 일인 만큼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합니다.
조윤석, 2009년 3월 27일
아동문학가 이오덕과 권정생 1973년부터 2002년까지,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권정생의 동화에는 바보, 거지, 외로운 노인, 강아지 똥 등 하나같이 힘없고 약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강아지 똥》, 《몽실 언니》 등 베스트셀러를 집필한 그도 평생을 낮은 곳에서 살며 글을 썼다. 가난과 전쟁, 평생 앓았던 결핵과 늑막염에도 끊임없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에는 이오덕의 힘이 컸다. 《우리글 바로 쓰기》, 《우리문장 바로 쓰기》 등 우리말 연구에 힘썼던 이오덕은 어른, 아이가 모두 권정생의 작품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 그의 작품을 세상에 알렸다. 권정생이 편지를 통해 자신의 고독과 생활을 이야기했다면, 이오덕은 그런 그가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창작에 몰두하도록 격려했다. 이오덕이 보낸 편지에는 한 번도 글을 쓰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동화, 수필, 소설, 논설문, 평론, 좌담회 등을 끊임없이 권했고 출판과 계약, 인쇄, 고료 수금 등 세세한 일을 모두 챙겼다.
선생님, 너무 염려하시지 말아 주세요. 물론 저는 선생님만은 믿고 의지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을 수 있는 선생님을 알게 된 것만으로 더할 수 없이 기쁩니다. 앞으로도 역시 제가 쓰고 있는 낙서 한 장까지도 선생님께 맡겨 드리고 싶습니다.
권정생, 1974년 4월 9일
제가 돈이 생기게 되면, 건강해진다면, 사회가 알아주는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많은 것을 잃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싫답니다. …선생님, 편지를 써 놓고 읽어 보니 제가 좀 흥분한 것 같습니다. 병 때문에도 그렇지만, 저는 항시 가슴이 울렁거리니까요.
권정생, 1974년 4월 22일
선생님의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 보겠다는 분이 있다니 다행한 일입니다. 책이 나오면 상당한 부수가 나갈 것 같습니다만, 대중들의 유행 취미물이 아니어서 크게 팔리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동화란 것을 심심풀이 오락물로 읽는 백만 명의 독자보다 단 백 명의 가난한, 그러나 슬기로운 어린이들과 진실한 삶을 찾는 젊은이들이 읽어 주는 것이 더욱 기쁘고 보람 있는 것이지요. 부디 몸조심하시고, 글 너무 쓰지 마시고 쉬시도록 바랍니다. 선생님은 좀 더 오래 사셔야 합니다.
이오덕, 1974년 4월 30일
기다리지 않아도 올 것은 오고 마니까 사람들은 바보입니다. 하루도 기다리지 않고는 못 배기니까요. 선생님은 찾아오시지 않아도 항상 제 곁에 계신답니다.
이오덕, 1974년 4월 30일
이발을 꼭 한 달 반 만에 한 것 같습니다. 싹싹 깎아 버리고 살았으면 가장 좋겠습니다. 옷도, 속옷 겉옷 필요 없이 자루처럼 하나만 입고 음식도 하루 세끼는 너무 많아요. 한 끼로만 살 수 있게, 그리고는 잠들지 말고 눈을 감은 채 오래오래 앉아 있고 싶습니다.
권정생, 1976년 2월 11일
아동문학에 몹시 실망하신 모양인데, 사실 지금 아동문학 한다고 동시니 동화니 하는 것을 쓰는 사람들, 그리고 잡지 같은 것, 동인지 같은 것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이란 참으로 한심스럽지요. 그러나 때가 되면 이런 불순물이 다 씻겨 없어질 것입니다. 고독을 영광으로 아는 지혜를 우리도 가져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오덕, 1976년 6월 15일
생활에서 도피한다는 것, 저는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생활이 없이 어떻게 글을 씁니까? 제 동화가 무척 어둡다고들 직접 말해 오는 분이 있습니다만, 저는 결코, 제가 겪어 보지 못한 꿈 같은 얘기는 쓸 수가 없습니다. 쓰려고 노력하지도 않겠습니다.
권정생, 1977년 7월 5일
약을 계속해서 잡수셔야 할 터인데 걱정입니다. 어디 돈을 빌려서라도 약을 잡수시면 제가 가서 갚겠습니다. 그렇게 쇠약하신데도 책을 읽고 싶어 하시니, 저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반성됩니다.
이오덕 1979년 11월 19일
선생님, 이제 장마가 걷히려나 봅니다. 모종을 얻어 심어 놓은 분꽃이 저녁때가 되면 한 송이 한 송이 피어나는 것이 즐거움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어줍잖은 작은 것에서 즐길 수 있는 행복도 있군요.
권정생, 1980년 7월 24일
여기는 어제 아침에 벌써 된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꽤나 얼었습니다. 그 허술한 방에 무더운 여름을 지나게 하고, 또 겨울을 보내도록 해서 참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사람 같지 않게 살고 있는 나 자신이 한없이 미워집니다. 선생님의 새 동화집을 모든 아이들이 읽을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하고 빌 뿐입니다. 부디 조심하시고 쉬어 가면서 천천히 쓰시기 부탁입니다.
이오덕, 1981년 10월 16일
창비에서 《몽실 언니》를 5천 부나 초판본으로 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세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75만 원 통상환 증서를 받아 놓고 우체국에 어떻게 이 많은 돈을 찾으러 갈까 자꾸 쑥스럽고 이상합니다.
권정생, 1984년 5월 11일
참나무 잎이 눈부신 산들을 멀리 바라보면서 한숨만 쉬는 시간을 또 보냅니다. 곧 또 연락하겠습니다.
이오덕, 1984년 5월 17일
지난번에 제가 여태까지 보낸 선생님 앞으로의 편지를 책으로 묶으신다고 해서, 이젠 편지 쓰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선생님께 드린 편지는 모두가 저의 감정을 쓰고 싶을 때마다 쓴 것이어서 정말 남에게 보이게 되면 부끄러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그만둬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앞으로도 마음 놓고 편지 쓸 텐데, 여간 괴롭지가 않습니다.
권정생, 1986년 2월 12일
화가 이중섭과 그의 남덕 씨 오래 오래,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편지》
‘귀엽고 소중한 남덕 씨.’, ‘예쁘고 소중한 내 사람이여!!!!!’, ‘가장 아름답고 소중하고 또 소중한 내 사랑 내 기쁨의 샘 남덕 씨.’, ‘나의 진정한 희망의 꽃봉오리 남덕 씨.’ 이중섭이 그의 아내를 편지 첫머리에서 부르는 말이다. 이중섭과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은 일본에서 만나 1945년 혼례를 올리고 태현과 태성 두 아이를 낳지만 6·25전쟁으로 전국을 전전하며 피난 생활을 하게 된다. 생활고에 이기지 못한 남덕은 두 아들과 일본으로 떠난다. 편지는 이중섭이 가족과 떨어진 시간 동안 쓰인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가족과 재회할 것을 원했지만 1956년 정신이상과 영양실조로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중섭은 외롭고 지난한 생활 속에서도 담배 내부 포장지인 은지, 합판, 종이, 책의 속지를 가릴 것 없이 그림을 그렸다. 그의 유명한 그림 중에서도 가족이 담긴 그림이 유달리 마음에 남는 건, ‘오래 오래,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가족과 함께하고 싶었던 그리움이 여실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진심 어린 편지와 셋이서 찍은 사진과 친구와 찍은 사진 네 장을 받고 너무 기뻐서 기뻐서 기뻐서…… 내가 이렇게나 행복할 수 있다니…… 꿈 같은 기분이란 지금의 내 마음을 말하는 것일 테지요. 사진에 나온 남덕 태현 태성의 모습은…… 그냥 그대로 가슴에 담아버리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소. 그대는 너무도 아름답고 소중하고 훌륭한 나의 유일한 사람이라오. 빨리 만나서 오래 오래 끌어안고……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하나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멋들어진 일들을 만들어갑시다.
이중섭, 1953년 3월 말경
내 사랑,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상냥한 사람, 존경하는 내 사람 남덕 씨. 오늘 4월 28일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 얼굴을 씻고 그림을 그리기 전, 마당에 선 푸르른 나무 이파리에 쏟아지는 햇살의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다가 당신의 모든 것을 떠올려 봅니다. 이 그림쟁이, 그대를 너무 너무 사랑하여 가슴이 터질 것 같으오. 이 뜨거운 그리움을 어떻게 하나요. 그대와 나의 아름다운 결실 태현이 태성이에게 뽀뽀 뽀뽀.
이중섭, 1953년 4월 28일경
그대가 그립기에 마음이 괴로워요.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것만을 오로지 바라고 노력하여 손에 넣어야 하오. 언제든 마음을 하나로 모아 그것만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오.
이중섭, 1953년 5월 23일
나만의 훌륭한 사람이여…… 이제부터는 멋지고 건전한 생활을 시작합시다. 멋진 일을 성취합시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새로운 예술은 우리의 것이오.
이중섭, 1953년 6월 15일
잘 지내시나요. 아픈 이는 많이 좋아졌나요? 나는 새로 지은 판잣집에서 혼자 조용히 앉아 온갖 생각을 해본다오. 불 피울 돈이 생기면 바로 작업에 들어갈 생각이오. 내 사랑스러운 그대 볼에 있는 아름답고 커다란 점을 떠올려보오. 그 점에 길게 길게 입맞춤하고 싶소.
이중섭, 1953년 8월 27일
귀여운 태성이에게. 잘 지내나요. 아빠는 건강히 그림을 그려요. 빨리 빨리 태성이와 엄마와 태현이 형과 할머니를 보고 싶어 죽겠어요. 건강히 아빠를 기다려주세요.
아빠 ㅈㅜㅇㅅㅓㅂ
내가 제일 좋아하고 늘 보고 싶은 태현아, 잘 지내지요? 오늘 엄마한테서 편지를 받았어요. 태현이가 매일 운동회 연습을 하느라 새카맣게 타서 온다고. 태현이가 건강하게 지낸다는 것을 알고 아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져도 이겨도 다 좋으니 씩씩하게 운동하세요 아빠는 오늘도 태현이와 태성이가 물고기와 노는 모습을 그렸어요.
아빠 ㅈㅜㅇㅅㅓㅂ
태현이에게. 이제 아프지 않나요? 감기 때문에 많이 고생했지요? 감기 같은 건 그냥 걷어 차버려요. 더욱더 건강해져서 열심히 공부하세요. 아빠가 태현이와 태성이가 복숭아를 가지고 노는 그림을 그렸어요. 사이좋게 나눠 먹어요. 그럼 건강히.
아빠
화공 이중섭은 반드시 가장 사랑하는 현처 남덕 씨를 행복한 천사로 하여 드높고 아름답고 끝없이 넓게 이 세상에 돋을새김해 보이겠어요. 자신만만 자신만만. 나는 우리 가족과 선량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진실로 새로운 표현을, 위대한 표현을 계속할 것이라오. 내 사랑하는 아내 남덕 천사 만세 만세.
이중섭, 1954년 11월경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모든 것을 바쳐 하나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어요. …예술은 끝없는 사랑의 표현이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