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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OUND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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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름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그곳은 실재하는 장소일 수도 있고 상상 속의 자리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에게 스며드는 마음일 수도 있다. 우리는 영화를 한 편씩 보고 각자가 생각한 공간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한다.
바그다드 카페, 1987
바그다드라는 먼 몸에 머무는 사람들
김건태
마음에 빈방을 만드는 일
“나쁠 건 없어. 모두가 마술이니까.”
‘바그다드’라는 먼 이름을 가진 카페. 그곳에는 제각기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무기력한 남편, 히피 노인, 철부지 딸과 피아노 치는 아들, 부메랑 던지는 여행자, 거울만 보는 여자, 소리 지르기에만 바쁜 여주인 브렌다까지. 그들은 커피 머신이 고장 난 카페 안에서 억지 연기를 하듯 각자 목소리를 높이는 데 한창이다. 사막 한가운데 있지만 오아시스와는 거리가 먼, 무척이나 꽉 막힌 공간 안에서 서로는 서로의 이방인이다.
어제와 같은 황량한 날, ‘Calling You’라는 신기루 같은 주문과 함께 사막에서 한 여인이 걸어온다. 과하게 멋을 낸 모자와 하얀 피부, 가진 거라곤 트렁크 가득한 남자 옷과 초보자용 마술 도구가 전부인 그녀의 이름은 야스민. 독일 사람이다. 그녀는 영어를 능숙하게 발음하지도 못하고 목소리마저 작으며 뒤뚱뒤뚱 걷는다. 카페에서도 늘 초대받지 못한 사람인 양 가장자리 테이블에 앉는다. 여주인 브렌다는 그런 그녀가 못마땅하다. 아무리 뜯어봐도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종 천진한 얼굴로 카페 안의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야스민과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라고 묻는 브렌다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나는 처음 이 영화를 다른 듯 같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변화시키는 성장 드라마로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를 열 번쯤 돌려본 다음 알았다.
‘아, 이 영화는 공간이 주인공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과장된 연극을 하던 영화 속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의 몸(바그다드 카페)에 담겨 단독적인 ‘마음’들로 행위 하고 있던 거였다. 그러니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저곳’의 마음(야스민)이 자신들의 몸으로 편입되려 노력할 때, 거부반응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원치 않는 이별들을 겪으며 마음을 닫은 적이 있다. 스스로가 더 이상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고 자책하며 어떤 다정한 얼굴 앞에서도 몸을 웅크린 거였다. 하지만 몸의 경첩은 생각보다 허술해서 불시에 틈을 만든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내 안에 들어왔다는 것에 놀라, 있는 힘껏 밀어내다가도 어느 순간 그녀의 마술에 넋을 잃게 되는 것이다.
바그다드 카페는 어느새 야스민이라는 마술로 가득 채워진다. 하지만 그녀 역시 잠시 머물다 떠나야 할 여행자의 신분이다. 영화 말미에 카페 안의 사람들은 떠난 야스민을 그리워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노란 보온병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한 카페는 더 이상 문을 닫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나 마음속에 야스민을 그리워하고, 언젠가 돌아올 그녀를 위해 내어줄 빈방 하나쯤 가지고 있으므로.
업, 2009
알록달록 풍선에 매달린 작은 이층집
이자연
어쩌면 이건 다신 없을 ‘영원’
“Thanks for the adventure. Now go have a new one! Love, Ellie.”
“그간의 모험, 고마웠어요. 이제 당신의 모험을 찾아 떠나요. 사랑하는 엘리가.”
영원하지 않을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습관처럼 영원을 말한다. 그것은 약속이기도 하고 맹세이기도 하면서 이름 모를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애초 그런 것들은 공기 중으로 쉽사리 휘발되는 속성을 가졌기 때문에, 수많은 ‘찰나’들을 버젓이 액자에 걸어 이를 닦거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평탄하게 바라볼 수 없는 노릇이다. 영원을 말했지만 정작 영원한 것은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모험을 사랑하는 어린 ‘칼’은 자기보다 더 모험을 사랑하는 소녀 ‘엘리’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미래에 남아메리카 어딘가에 있는 거대 폭포를 찾아갈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엘리가 빼곡히 모아둔 모험 스크랩북을 칼에게 보여주며 말한다. “Adventure is out there!”
엘리가 한 말대로 모험은 현관문 밖에 있지만, 칼과 엘리가 결혼을 한 뒤 그들의 집 안으로도 나름의 모험이 스며들었다. 그들에겐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마른 바람이 부는 정원에서 엘리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칼에겐 그간 깜빡 잊고 지냈던 것이 떠올랐다. 남아메리카에 있는 그 폭포를 찾아가는 것, 그래서 다시 우리들의 모험을 떠나는 것. 하지만 삶이란 게 물 한 모금 마시는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그들은 남아메리카로 떠날 시간도 돈도 없었다. 그저 함께 늙어가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리고 엘리는,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거 봐, 역시 영원한 것은 없다니까.
칼에게 작은 집은 엘리로 채워졌던 자리였고 엘리의 빈자리였으며, 혹은 엘리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는 그곳에 머무르면서 집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엘리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반드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을 지켜내야만 했다. 밤을 꼴딱 새우면서 오색찬란한 풍선을 지붕에 매단 까닭이다. 천둥이 치고, 비구름을 만나면 풍선은 쉽게 불안해졌다. 흔들리고 요동치는 모습에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해진다. 그의 집이 무너지는 것은 비단 엘리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리뷰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들이 많다. 귀여운 러셀, 말하는 강아지, 도도새와 그를 쫓는 악당들. 영화 <UP>을 부단히 채워주고 이끌어 낸 인물들이지만 나는 온전히 칼과 엘리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집을 잃은 칼은 조용히 체념한다. 자신을 위로하는 이들을 향해 그는 말한다. “You know… It’s just a house(알잖아… 그냥 집인데, 뭘).”
처음 의도와 영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그의 모험이 끝이 났다. 되레 집은 그의 품에서 사라졌고, 다시 적적함을 이겨내는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모험’이라는 단어가 가진 거칢에 속상하던 와중 나는 적잖이 놀랐는데, 그가 잃어버린 집이 고요하게 폭포수 위로 내려 앉았던 것이다. 아주 거창했던 꿈이 끝내 이루어졌다. 그네들은 그곳에 서로의 영원한 사랑을 묻어두었다. 이건 다신 없을 ‘영원성’. 어쩌면, 정말 어쩌면 영원한 것이 이 세계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술관 옆 동물원, 1998
머물다 조금씩 스며드는 남녀
안가람
나는 당신에게 머무르는 중이다
“춘희야. 예쁜 양말, 새 구두, 새 옷, 그런 거보다 더 예쁜 건 너 자신이야.
세수도 잘 안 하고 이빨도 제대로 안 닦고, 음식 먹을 때 괴상한 소리를 내는 너.
그런 너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 거야. 힘내.”
어느 화창한 날, 군인으로서 마지막 휴가를 나온 철수는 언제나 휴가 때마다 머물렀던 애인의 집으로 간다. 마지막 휴가여서 기쁘고, 보고 싶었던 애인 다혜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 기쁘다. 철수는 다혜와의 행복한 저녁을 위해, 미리 장을 보고 적당히 예쁘게 핀 장미꽃을 사 집으로 간다. 그러나 들뜬 마음도 잠시, 그곳엔 다혜가 아닌 춘희라는 다른 여자가 있다. 그런데 이 여자, 잠깐 만났지만 여자다운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다. 부스스한 머리에 씻지도 않은 몰골이며 힐끔 살펴본 집안엔 먼지만 가득하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심지어 다혜는 두 달 전에 이사를 가버렸단다. 어떤 말도 없이.
어느 화창한 날, 춘희는 한낮인데 아직 꿈나라다. 결혼식 전문 비디오 촬영기사이긴 하지만 밤마다 공모전에 낼 시나리오를 쓰느라 늦은 새벽에 자는 게 일쑤다. 그날도 어김없이 떠오르지 않는 시나리오와 소극적이며 진전없는 자신의 짝사랑과 씨름하며 겨우 새벽에 잠들었는데 웬 막무가내 무대포 같은 놈이 한낮부터 방에 쳐들어와 다혜라는 여자를 찾는다. 다혜…. 생각해보니 두 달 전 나에게 침대와 가구를 모두 주고 이사 간 여자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행동만 일삼는, 자신이 실연당했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알아챈 철수라는 이 남자, 왠지 모르게 측은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영화는 철수가 춘희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시작된다. 너무나 다른 둘이 만나 각자 미숙한 사랑에 대해 위로하며 조금씩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곤 주옥같은 이 영화의 명대사가 등장한다. “사랑이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리는 것인 줄은 몰랐다.”
머물다 조금씩 스며드는 이 영화를 빗대어 나를 돌아보면 나 또한 처음부터 풍덩 빠져드는 전자가 아닌 서서히 물들어 버리는 후자에 가까웠다. 첫눈에 풍덩 빠져 미칠듯한 사랑의 고열에 시달리고, 그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은 마치 신앙이 되어 온몸의 감정기능을 마비시켜버리는 듯한 사랑은, 아직까지 나에겐 없었다(아쉽게도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다). 타인들의 연애 사전 중 첫 장만큼은 그렇게 저마다 특별한 사연들을 지녔다고 하던데 나의 첫 장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늦은 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갈 때쯤 적당히 알맞은 공기와 갓 초록 잎사귀를 낸 식물들이 풀 냄새를 머금고 있을 때, 함께 짧은 거리를 긴 걸음으로 걸은 적이 있었다. 그때 오갔던 소소한 대화들이 왠지 모르게 떨림으로 다가와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심지어 그때의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사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만큼 평범한 연애의 시작이었다. 철수와 춘희만큼이나 달랐지만, 서로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공통점이었던 우리. 그는 미술관 자체였고 나는 동물원 그 자체였던 것이다. 어쨌거나 나의 지난날 연애담도 극적인 전개나 과격한 액션 신 하나 없는 <미술관 옆 동물원>처럼 시작되고 끝이 났지만 영화를 보며 다시 한 번 회상해 보게 된다.
철수가 춘희에게 머무르다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 철수가 머무르는 동안 춘희도 철수에게 머물러 있었다는 것. 둘은 그렇게 서로 조금씩 스며들었다는 것.
에디터 김건태
포토그래퍼 안가람 글 김건태 이자연 안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