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AROUND REVIEW
영화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AROUND REVIEW
어라운드에 ‘위로 영화제’가 열린다면 어떤 영화가 개막작이 될까, 각자 상상했다. 위로라니, 조금 간지럽긴 하지만 어쩐지 기분 좋은 상상인 것은 틀림없다.
게으른 천재들을 위한 위로
힘내세요, 병헌씨 Cheer up Mr. Lee, 2012
에디터 김건태
이병헌은 영화를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배우 이병헌은 아니고, 영화감독을 꿈꾸는 이병헌이다. 〈힘내세요, 병헌씨〉는 입봉을 준비하는 감독 지망생의 이야기를 다룬 모큐멘터리Mockumentary(허구 상황을 실제처럼 만든 다큐멘터리)다. 그에게는 함께 미래를 꿈꾸며 매일 술을 마시는 세 명의 친구가 있다. 여섯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 배우, 입봉하지 못한 카메라 감독, 8년째 제작부에서 일했으나 정식으로 데뷔하지 못한 프로듀서. 그들은 모두 미생이다.
이병헌의 하루는 대략 이렇다. 정오 즈음 잠에서 깨어나 노트북을 켜고, 아침 겸 점심을 거하게 차려 먹고, 방 청소를 하고, 자신감을 얻기 위해 일부러 못 만든 영화만 골라 본다. 다시 저녁을 만들어 먹고, 스트레칭을 잔뜩 한 뒤, 시나리오 제목의 글씨체를 한 시간 넘게 고친다. 밤이 늦었으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마무리는 늘 술이다. 예술가의 나태함 속에 다큐멘터리는 시작한 지 15분 만에 강제 마무리될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그에게도 숨겨진 재능이 있었고, 2주 만에 나름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 한 편이 완성되었다. 다시 영화는 신인 감독 이병헌의 찬란한 데뷔 과정을 좇기 시작한다.
한편, 서른 살의 김건태는 소설가를 꿈꿨다. 등단만 하면 금은보화가 저절로 따라올 거라는 순진한 마음 같은 건 당연히 없었지만, 다시 돌이키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와버린 상태였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고 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더 나아가지도, 선뜻 돌아가지도 못하는 불완전한 청춘이었다. 초조함 때문이었을까, 자신을 천재라고 믿은 소설가 지망생은 매일 술에 취해 살며, 자신보다 못한 작품을 비난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정작 자신의 소설 첫 마디도 결정하지 못했으면서,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왕관 생각뿐이었다. 과연 이 게으른 천재의 미래는 어떻게 됐을까?
“빤한 시나리오 쓰면서 네가 무슨 예술간 줄 알아? 술이나 끊어. 너 이러는 거 다 어리광이야. 투정 좀 그만 부리라고 병신아!”, “내가 왜 병신이야. 우리도 영화 찍으면….”, “엎어졌어. 영화 엎어졌다고!”
끝내 이병헌의 영화는 투자 유치에 실패한다. 등단에 실패하고 월급쟁이가 된 한 게으른 소설가 지망생처럼 이병헌 역시 천재는 아니었던 거다. 모래사장에 코를 박고 깊은 한숨을 쉬며 캄캄한 바다를 바라보는 네 친구의 뒷모습은 얼마나 처량한지…. “안 울었어!” 불쑥 이병헌이 소리친다.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병헌은 울지 않았다. (장하다 이병헌!)
부러움과 소외감, 자기연민을 뒤로하고 이병헌은 10분 남짓한 자신의 첫 번째 영화를 준비한다. 단번에 정상을 노리는 게으른 천재가 아닌, 담담하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물론 이후로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그는 여전히 술을 마시고, 취하고, 길에서 넘어진다. 하지만 또 엎어져도 상관없다는 듯 이병헌은 얼굴에 드리운 가로등 불빛 아래서 조금 웃는다. “엎어진 김에 쉬어가면 되니까. 다시 돌아가 시작하면 되니까.”
다시 터널에 선 누군가를 위해
월플라워 The perks of being a wallflower, 2012
에디터 김혜원
“빛나는 별은 뜨거워서 견딜 수 없다.”고 기타노 다케시는 《생각노트》에서 말했다. 나는 청춘을 생각할 때 이 말을 떠올린다. “지금이 좋을 때다.”라고 누구나 말하지만, 정작 나는 혼란스럽고 괴롭던, 그래서 빨리 벗어나고 싶던 시절 말이다. 지금은 나는 전자에 가깝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하며 과거를 추억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성장 영화를 본다. 성장 영화의 주인공은 대부분 불안정하고 방황한다. 빛난다. 그러니까 그들이 별이라면, 나는 스스로를 태워 빛나는 영화 속 청춘들에게 온기를 얻는, 조금은 잔인한 사람이다.
월플라워Wallflower는 파티에서 파트너가 없어서 춤을 추지 못하는 사람을 뜻한다. 찰리에게는 하루하루가 월플라워 같다. 절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그는 고등학교 신입생이 되어서도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한다. 첫날부터 졸업반 마지막 수업까지 남은 일수를 계산하고 버티는 것이 찰리가 계획한 유일한 일이다. 그런 그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온다. 졸업반이지만 1학년 수업을 듣는 패트릭. 패트릭은 타인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그리고 패트릭에게는 비슷한 성격을 지닌 이복남매 샘이 있다. 찰리는 어딘가 엉뚱한 구석이 있는 이 이복남매를 만나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월플라워〉는 빠르게 달리는 터널 안 풍경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터널을 벗어나며 끝난다. 친구들과 함께 차를 타고 달리는 터널 안에서, 찰리는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 터널은 찰리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고등학생 시절(물론 영화에서는 아직 졸업하지 못했지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그 안에서도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달리라고.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몇 개의 터널을 마주한다. 더 이상 빛나지는 않더라도 계속 달리다 보면 그렇다. 10대의 터널을 지나고 나면 20대의 터널이, 30대의 터널이 기다리는 것 같다. 계절이 반복되는 것처럼 새로운 시작도 반복된다. 그러니까 다시 터널에 선 사람에게, 그리고 낯선 곳에서 다시 벽에 등을 기댄 채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길 기다리는 모두와 〈월플라워〉의 온기를 나누고 싶다.
혼자가 편한 당신에게
더 테이블 The table, 2017
경영지원 양유진
퇴근길, 어김없이 편의점 파라솔 아래 내 전용석에 자리 잡는다. 손가락으로 두 번 탁탁 쳐 캔을 따고, 시원하게 한 모금 쭉 들이켜면 나지막이 나오는 말. “아, 살 것 같다.” 언제부터였을까, 혼자가 편해진 게. 지금보다 어린 시절, 열정 가득히 시작한 창업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실을 마주하게 하면서 참 많은 외로움을 안겨주었다. 결국 나도 취업 전선에 뛰어든 젊은이 중 하나가 되었다. 혼자 고군분투할 때보다는 남들과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더 많아졌다. 생각해본 적도 없는 기업의 미래와 내 포부에 대해 소리 없이 떠들어대며 외롭지 않을 날들을 상상하곤 했다.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 퇴근 후 친구들과 마시는 맥주, 덤으로 안주는 회사 이야기. 즐거웠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는 아무도 없다. 당연히 이야기도 없다. ‘이야기’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언제였더라.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맥주를 마시고, 혼자 산책을 하면서 종종 궁금했다. 남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더 테이블〉은 어느 날 어느 카페의 한 테이블에서 머물다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고, 나는 카페 주인이 되어 손님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내가 여행 가서 좀 그랬어요?”
“제가 뭐라고 그걸 좀 그래해요. 그렇게 물어보는 게 더 좀 그렇네요.”
낯선 이에게 벽이 높은 내겐 그리 익숙하지 않은 그들의 첫 만남, 하룻밤 사랑. 사랑을 나눈 뒤 덜컥 4개월씩이나 여행을 떠나버린 민호와 4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서운한 경진의 이야기. 어떤 감정도 직접 표현하지 않는 애매한 말이지만, 무엇보다 뚜렷하게 느껴지는 그들의 감정. 그렇게 모호한 말로 가득한 듯하면서도 둘은 서로 하고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분명히 기억했고, 확실히 표현하고 있었다. 겨우 몇 번 남짓 만나고 그들 자신에 대해 조금씩 대화를 이어나가는 둘을 보며 새삼 마음이 이상해졌다.
그래, 이야기는 이렇게 하는 거였지. 사회에 더 깊이 들어갈수록 다른 사람, 특히 잘 모르는 이와 나누는 이야기를 피했다. 짧은 대화로 나를 재단할까 두려웠다. 그렇다고 내가 누군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설명하기엔 이미 내 이야기는 너무 많이 쌓여있었다. 결국 시작하기도 전에 느껴버리는 일종의 두려움과 피로함이 도리어 나를 혼자로 만든 것이다. 물론 이런 이유로 혼자가 편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어느 날에는 경진과 민호처럼 누군가에게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꿈을 가졌는지 떠들어보는 일도 썩 괜찮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 후반부, 민호의 말은 내내 머릿속을 맴돈다. “이야기해요, 우리. 경진 씨, 저 잘 모르시잖아요.” 혼자가 익숙한 건지, 좋은 건지 헷갈릴 때, 혹은 어느 날 갑자기 남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한 순간이 올 때, 영화 속 그들처럼 누군가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떨까. 살 것 같은 순간이 하나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없지만 있는 여자들을 위해
플로리다 프로젝트 The Florida project, 2018
에디터 이자연
수많은 영화가 등장하면서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도 다양해졌다. 누군가는 영상미를, 누군가는 이야기의 얽음새를, 또 누군가는 메시지를 평가의 중점으로 두었다. 그리고 이제 여성이 나타났다. 이름하여, ‘벡델 테스트Bechdeltest’. 1985년 미국의 여성 만화가 엘리슨 벡델이 남성 중심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측정하기 위해 고안한 성평등 테스트이다.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등장하는지, 이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지, 대화 내용이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이 있는지를 충족시켜야 한다. 남성 중심 영화 사이에서 조금 지친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영화를 선택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갈 곳 없는 홈리스를 위한 미국 플로리다의 국가 지원 정책이다. 디즈니가 올랜도에 디즈니월드를 짓기 시작하자 주변엔 모텔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하지만 경기 침체와 더불어 관광업이 주춤하자 모텔은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고, 직업과 집을 잃은 사람들은 모텔로 모여들었다. 국가 지원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인, 그러니까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공식 지원 대상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모텔 방을 빌려 삶을 이어갔다.
무니는 엄마 핼리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여섯 살짜리 여자애다. 건너편에 자리한 디즈니월드의 마법의 성은 좀처럼 다가가기 힘들고, 영롱한 보라색 ‘매직캐슬 모텔’만이 무니를 반긴다. 즐거움과 환상의 나라보다는 술주정과 빈곤의 나라와 조금 더 가까운 무니. 무니 주변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여러 명의 여자가 보인다. 무니의 근원이자 가장 가까운 사이인 핼리는 지나가는 헬리콥터를 보면 손가락 욕을 하고, 모든 말에 ‘Fuck’을 끼워 넣어 말한다. 이렇다 할 직업이 없어 플로리다 프로젝트 지원 대상에서 제명된 탓에 불법으로 사람들에게 오래된 향수를 팔며 근근이 살아간다. 어느 날인가 곧 울 것 같은 여자를 보며 무니가 말했다. “나는 어른들이 울려고 하면 바로 알아.” 무니는 아마 핼리의 우는 모습을 많이 본 모양이다. 무니 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 핼리는 어떤 역사를 보내고 지금 여기에 있는 걸까?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이런 식으로 영화 속보다 영화 바깥으로 시선을 확장시킨다. 조금 덜 보여주면서, 조금 더 상상하게 하는 것. 핼리가 빈곤에 시달리다 결국 매춘을 하게 되었을 때, 화장실에서 목욕 놀이를 하던 무니는 모르는 사내가 화장실 문을 활짝 열자 온몸이 꽁꽁 언다. 욕조 커튼을 치라는 엄마의 말에 무니는 뭉개진 표정 그대로 커튼을 닫을 뿐이다. 사내는 오로지 목소리만 등장한다. 무니의 표정을 통해 그저 평범한 남자가 아닌 벌거벗은 남자가 등장하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무니도 이번은 무언가를 알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영화의 바깥은 계속해서 이런 방식으로 다가온다.
무니의 가장 친한 친구인 스쿠티의 엄마이자, 핼리의 친한 친구이기도 한 애슐리도 같은 모텔에서 살아간다. 역시 남편이 없는 그녀는 가까운 레스토랑에서 팬케이크와 소다를 팔면서 지낸다. 어느 날 스쿠티와 무니가 방화를 저지른 사실을 알게 된 애슐리는 스쿠티와 무니를 절대 만나지 못하게 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단절이 속상하지만 무니는 또 다른 놀이를 만들어간다. 아마 무니는 이런 일을 이미 여러 번 겪은 게 아닐까.
무니의 주변으로 수많은 여자가 있다. 무니에게 희망을 주는 것도, 즐거움을 빼앗는 것도 모두 여자다. 가난해서 그만큼 솔직하고, 잘 사는 법을 몰라서 그만큼 아슬아슬한 사람들의 모습이 날 것 그대로 보인다. 엄마인 핼리가 아이가 있는 방에서 매춘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을 때, 아동국은 결국 무니와 핼리를 떼어놓으려고 한다. 무니에게 전부인 여자들과의 갑작스러운 작별은 무니 곁으로 얼마나 다양한 표정을 가진 여자들이 그녀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동안 잊고 지낸 수많은 여자들을 떠올린다. 우리 삶이 그래왔듯이.
다시 힘을 내기 위하여
리틀 포레스트 Little forest, 2018
마케터 최현희
바빴던 하루의 무게가 어깨에 내려앉은 퇴근길. 나는 축 처진 모습으로 지하철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생각에 잠긴다. ‘한 달만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싶다.’,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별을 본 지 얼마나 됐더라.’ 지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뒤로하고, 집을 향해 더 빨리 걷는다.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 좀 나아지겠지.’라고 위로하며.
혜원은 배가 고파 고향으로 돌아왔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준비하던 임용고시에 떨어지고 인스턴트 음식에 질려갈 즈음, 따듯한 밥상이 그리워 집에 온 것이다. 오랜만에 시골집 방 안에 혼자 누워 있으니 왠지 으스스하기만 하다. 도시의 소음이 사라진 시골의 밤은 스쳐가는 바람 소리만으로도 무수한 상상을 자아낸다. 그런 혜원에게 재하는 “온기가 있는 생명은 다 의지가 되는 법이야.”라며 귀여운 강아지 ‘오구’를 건넨다. 금방 서울로 갈 거라고 말하던 혜원은 어느새 성견이 된 오구와 산책을 하고, 텃밭을 가꾸고, 고모의 농사일을 돕는다. 도시 생활은 잠시 잊은 채, 매끼 정성스러운 음식을 뚝딱뚝딱 만들어낸다. 겨울에는 추운 바람을 맞으며 직접 만든 막걸리를 먹고, 뜨끈한 수제비로 몸과 마음을 녹인다. 봄에는 싱싱한 채소로 배추전과 꽃파스타를 만들어 먹고, 여름에는 시원한 콩국수로 갈증을 달랜다. 은숙과 사소한 다툼이 있던 날에는 달콤한 크렘브륄레를 선물하고, 스트레스를 받은 날에는 아주 매운 떡볶이를 함께 먹는다. 그렇게 혜원은 소꿉친구인 재하, 은숙과 소소한 행복을 쌓아간다. 잠이 오지 않는 여름밤에는 친구들과 다슬기도 줍고, 개울가에 앉아 별을 바라본다. 밤하늘을 바라보고 환하게 웃는 혜원의 얼굴은 참 평화롭다. 봄은 봄답게, 여름은 여름답게, 가을은 가을답게, 겨울은 겨울답게. 사계절을 온전히 느끼고 지내는 혜원을 보니 자꾸 눈물이 났다.
내게도 혜원처럼 살던 기억이 있다. 봉사 활동을 간 방글라데시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한 계절을 보내며, 자연이 주는 힘을 믿게 되었다. 사실 시골 생활이 그리 낭만적이진 않다. 서로 무관심하던 도시와 달리 나의 모든 행동이 이웃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혈기왕성한 모기들 덕에 다리는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조용한 밤엔 지붕을 뚫을 듯한 빗소리가 무서워 잠을 못 이룬 날도 많았다. 한번은 침대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와 엉엉 운 적도 있다. 그때 마음을 다스릴 겸 산책을 하다가 커다란 ‘레인트리’를 마주했다. 나뭇잎이 비 내리는 것처럼 축 늘어진 나무였는데, 200년도 넘은 고목이었다. 멍하니 나무를 쳐다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고 웃음이 나왔다.
그래, 구더기도 생명이고 자연인데 뭐 어쩌겠어? 그러고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야를 가로막는 어떤 건물도 없이 새파란 논만 펼쳐져 있고, 소들은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아침에는 새소리에 눈을 떴고, 밤에 찾아오는 반딧불이와 하늘의 무수한 별들은 존재만으로 큰 위로가 되었다. 자연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했고, 때때로 약한 내 모습에 실망할 때도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레인트리 앞에 서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진정되었다. 당시 나의 작은 숲은 그 나무 앞이었던 것 같다. 흙으로 돌아갈 우리들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이기에 그 안에 있을 때 비로소 평온함을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다시 힘을 내기 위해서는 온몸의 힘을 쭉 빼고 쉬어가는 시간도 필요하다. 나는 이 영화를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쳐서 너덜너덜해져 버린, 다 놓아버리고 싶은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다.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조급함을 느끼지 않는 일상, 심심한 하루를 살아보면 좋겠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통해 모두 자기만의 ‘작은 숲’을 찾게 되길 바라면서.
글 김건태, 김혜원, 양유진, 이자연, 최현희
일러스트 전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