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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 어디인지 물었을 때, 사람들은 저마다의 추억이 담긴 바다를 떠올린다. 같은 질문을 ‘영화 좀 본다.’ 하는 친구들에게 건네면 그들은 같은 바다라도 사뭇 다른 풍경을 들려준다. 해운대 모래사장에 설치되어 있던 거대한 스크린을. BIFF 광장에서 빠져나와 국제시장 포장마차에서 산 주전부리를 먹으며 흥에 취해 걷던 영도다리를. 우리가 함께 본 영화가 얼마나 위대한지 열변을 토하다 바라본 수영강변과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 시간쯤 걸은 끝에 마주한 광안대교의 눈부신 빛을 추억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영화를 볼 수 있는 세상 속에서 기차를 타고 서너 시간이나 걸려 부산에 가는 마음이란 무엇일까. 그렇게 한 편의 영화를 통과한 뒤에 닿아오는 도시의 감각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남을까. 두 시간 남짓한 암흑에서 벗어나 마주한 부산은 그토록 ‘영화’로울 수밖에 없었다.
날이 서서히 선선해질 무렵이면 친구들은 부산국제영화제에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매번 별말 없이 먼 길을 향하는 여정에 함께하곤 했다.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간 김에 영화관에서 보기 힘든 영화도 보고, 겸사겸사 바다도 보면 참 좋을 테니까.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늘 남아 있었다. 어째서 영화 한 편을 보러 부산까지 내려가야 하는지(어차피 반응 좋은 영화는 서울에서 개봉할 텐데), 왜 부산이 영화의 도시라고 불리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달리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부산이 영화의 도시라고 불리게 된 것은 부산국제영화제의 역할이 크지만, 그 전부터 독자적인 길을 걸어오며 부산 영화의 역사를 차곡차곡 쌓아온 결과이기도 하다. 이는 무려 한국 영화사 100년의 흐름과 맥을 함께할 정도다. 우리나라에 영화가 뿌리를 내리던 시기에 부산의 영화사도 발맞춰 시작된 셈이다.
1895년 12월 28일, 그랑카페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제작한 최초의 영화가 상영되었다는 것은 영화 좀 본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1-2년만에 일본과 중국을 필두로 동아시아까지 영화라는 매체가 전파되었다는 이야기는 영화 연구자가 아닌 이상 대부분 낯설게 여긴다. 한국에서 언제 처음 영화가 상영되었는지는 의견이 꽤 분분하다. 놀랍게도 1903년쯤으로 추정된다. 횡성신문에 실린 활동사진(당시에는 ‘Motion Picture’를 직역하여 활동사진이라 불렀다) 상영 광고가 이를 증명하는 유일한 기록이다. 지리적 특성상 서양 문물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부산 또한 비슷한 시기부터 남포동을 중심으로 극장가가 형성되었다. 당시 일본인 거류지에서는 상설 공연장과 함께 부산 최초의 극장인 행좌와 송정좌가 운영 중이었다. 1924년에는 그 근방에서 한국 최초의 영화 제작사 ‘조선키네마 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나운규, 윤백남, 안종화 같은 당대 최고의 영화감독들이 한국 영화사에서 길이길이 회고될 만한 극영화들을 배출해 냈다. 그렇게 영화의 발상지가 된 남포동은 영화인들의 무대로 자리매김한다.
부산이 한국 영화의 중심지가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부터다. 혼란한 상황 속 남과 북에서 수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었고, 부산은 임시 수도 역할을 하며 오갈 데 없는 이들을 품었다. 남하하는 인파에는 서울 충무로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영화인들 또한 뒤섞여 있었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영화에 대한 열정을 거두지 않은 그들 덕분에 이 기간에만 무려 20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물론 영화만 제작한다고 해서 다는 아니었다. 이를 소비할 사람들 또한 필요했다. 피난 온 평론가들 또한 언론 매체에 글을 쏟아냈고 그들의 문장이 쌓인 자리에는 영화 감상과 비평의 장이 마련되었다.당시 부산의 극장들은 전쟁에 지친 국민을 위로하고 배움을 제공하는 장소였다. 삼삼오오 모여 영화를 보고 이에 대해 한마디를 얹는 동안, 모두의 마음속에 시네필의 감수성이 피어나지 않았을까. 영화 한 편이 선사하는 희노애락에 기대어 힘겨운 시대를 버텨낸 부산 사람들은 훗날 한국 영화 역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휴전 이후 5년 뒤인 1958년에는 부산영화평론가협회가 창립되었고, 같은 해에는 영화 시상식인 ‘부일영화상’이 개최되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나라 최초’로 일어난 일이다.
센텀시티역에서 내려 조금 걷다 보면 거대한 지붕을 가진 영화의전당이 펼쳐진다. 멀리서 봐도 웅장한 공간보다 더 압도적이었던 것은 그곳에 모인 인파였다. 아니, 머릿수만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거대한 정서였던 것 같기도 하다. 각국의 좋은 영화를 보겠다는 목표를 가진 사람들의 집념과 애정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속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과 마음을 나눈듯한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1996년 9월 13일에 개막했다. 세계인이 주목하는 3대 영화제와 차별화하기 위해서 그들이 마련한 패는 ‘아시아 영화’였다. 그 당시만 해도 대만, 홍콩, 중국을 필두로 한 중화권 영화와 아랍권 영화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었다. 정작 ‘아시아 영화 시장’은 개척되지 않은 금싸라기 땅이나 다름 없었다. 빈틈을 선점한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 영화의 허브’를 도맡아 아시아의 뛰어난 작품들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힘썼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차별점은 비경쟁영화제였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제들은 해마다 주목 받은 영화를 독점적으로 상영할 수 있는 기회를 두고 경쟁을 벌인다. 프리미엄 작품은 누가 먼저 선점하고 유치하느냐에 따라 영화제 관객 수가 좌우되기도 한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이미 치열한 경쟁에 가담하여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기보다는, 위 영화제 수상작들을 모아서 상영하는 방향을 택했다. 온갖 영화제에서 화제가 된 작품들만 쏙쏙 골라 볼 수 있으니 관객들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해양 도시 특유의 여유로움과 영화가 주는 낭만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는 것에 매료된 사람들은 매년 영화제를 찾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급격하게 성장하던 시기에는 모든 행사가 해운대를 배경으로 진행이 되었다. 드레스와 수트를 차려 입은 영화인들은 모래사장 위 굴곡진 레드 카펫을 밟고, 관객들은 푹신한 해변에 주저앉아 영화를 봤다. 다만 임시 상영관 위주로 운영되어 최상의 환경에서 영화를 즐기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를 보완하고자 센텀시티에 영화의전당이 들어섰고, 주변에 밀접한 멀티플렉스와 협업하여 쾌적한 상영 공간을 마련한 덕에 지금의 부산국제영화제가 탄생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비로소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남포동 시절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초창기 원도심 광장에서 진행되던 영화제는 그야말로 축제나 다름없었다. 서울 아닌 부산에서 영화제가 개최되는 것에 대한 우려섞인 시선 속에서 부산국제영화제의 막은 열렸다. 뒤이어 광장은 전 세계 영화인으로 가득 찼다. 당시 총 관객은 18만 명으로 합산이 되었는데, 이는 개최 측에서 예측한 인원보다 무려 세 배가 넘는 숫자였다. 사람들을 제대로 맞이할 공간이 마련되지 않았던 탓에 열악한 환경이었음에도 관객들은 남포동 특유의 독특한 분위기에 심취하였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맛있는 음식들을 나눠 먹으며 영화의 기억을 나누는 유명한 감독과 배우들. 너나 할 것 없이 포장마차에서 한데 어울려 소주잔을 부딪치고, 근처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10대 관객들이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찾아오는 장면은 어느 영화제에서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개막식부터 폐막식까지, 약 9일 간 이어졌던 광장의 시간 속에서 ‘부산’식 환대를 만끽한 사람들은 작은 희망을 맛보았다. 수많은 사람들과 이 도시가 기록할 영화의 역사를 그려보았다.
많은 시네필들은 부산국제영화제에 단순히 영화만 보러 가지 않는다. 밤을 새워 가며 치열한 티켓팅을 해 기어코 극장 한편에 자리를 마련하는 이유는 그 공간 안에서 느껴지는 자기장을 감각하기 위해서다. 크고 작은 극장들은 관객과 영화, 관객과 관객 사이에 오가는 수신호를 오롯이 품어준다. 사람들은 극장의 너른 품에 안겨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진귀한 영화들을 보고 영화를 만든 이들과 함께 장면 속 숨겨진 의미를 나눈 뒤, 혼몽을 꾼 듯한 얼굴로 상영관을 빠져나온다. 영화가 끝난 자리에서 탄생할 영화 같은 도시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2018년, 부산을 대표하던 독립 예술 영화 전용관 ‘국도예술관’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오랫동안 동네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잡고 있던 극장이 문을 닫는 장면은 ‘영화관의 죽음’을 실감케 하는 초유의 사건이기도 했다. 그 이후 코로나라는 사상 최대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덮치고, OTT 시대가 도래하면서 예술 영화관이 이 땅에 살아남는 것은 더욱 힘겨워졌다. 와중에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예술 영화관 세 곳을 다녀왔다. 마침 제40회 부산국제단편영화제가 진행 중이었다(부산국제단편영화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단편 영화제).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서 끝에서 끝으로 이동하는 여정은 부산에 도착해서도 어김없이 이어졌다.
모퉁이극장은 부산의 “관객 문화 운동”을 이끌어 온 주요한 성지다. 그간 영화관은 관객을 흥행의 척도로 소비해 왔다. 좌석 수가 얼마나 채워졌는지 집계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개개인의 영화적 경험은 뒷전으로 미뤄두었다. 이러한 상황에 의문을 품은 김현수 대표는 관객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응원하는 마음으로 중앙동 40계단 ‘모퉁이’에 둥지를 틀었다. 시민 영화관으로서 독립 영화 정기 상영회과 관객 영화 모임을 진행해 오다 남포동의 중심부에 위치한 부산은행 건물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마침 개관 시기가 팬데믹과 맞물려 운영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간 수집해 온 관객 데이터를 토대로 극장의 시스템을 갖추고 재정비했다. 모퉁이극장은 관객들이 주체가 되어 소통하는 장소로 만들고자 관련 문화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각양각색의 영화적 기호와 취향을 가진 씨네필과 커뮤니티들이 자유롭게 마주칠 수 있는 중간 지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개개인이 품은 ‘영화로운’ 기억이 부산이라는 도시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BIFF의 열기를 품고 있는 이곳에서 다시금 영화의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대한다.
영화의전당 앞에 서면 ‘국내 최대 예술 영화 전용관’의 위용이 느껴진다. 2011년 9월에 개관한 이곳은 부산의 대표적인 비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그간 쉽게 볼 수 없었던 다채로운 예술 영화를 상영한다. 부산국제영화제 전용관이라는 명색에 걸맞게 중극장, 소극장, 인디플러스 등 다양한 규모의 극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부산국제영화제 사무동의 든든한 아지트 역할도 함께 하고 있다. 더불어 1999년부터 독자적으로 운영되어 오던 ‘시네마테크 부산’ 또한 영화의전당으로 이전했다. 시네마테크는 ‘영화 보관소’를 뜻하는 프랑스어이다. 인류의 문화유산인 명작들이 소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수집·이전했다. 일종의 도서관이나 박물관 역할을 하는 셈이다. 상영관에 들어선 관객들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 현실을 뛰어넘고선 머나먼 시공간으로 여행을 떠난다. 영화가 끝난 뒤에는 여운을 느끼며 영화도서관에서 끝마치지 못한 감상을 갈무리 지을 수도 있다. 오래된 영화 포스터나 DVD들이 가지런히 정리된 서가를 산책하다 보면 ‘영화’라는 단어에 함축되어 있는 수 백년의 시간을 어렴풋하게 실감하게 된다.
도시철도를 타고 해운대에서 화명역으로 한 시간 넘게 이동한 끝에, 정겨운 동네를 마주한다. 중학교와 아파트 사이에 위치한 상가, 그 지하에 작게 자리한 복합문화공간 ‘무사이’. 무사이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다’란 뜻을 지닌 그리스어다. 그리스로마 시대 때부터 극장은 광장의 역할을 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고 문화를 즐기고 교육이 펼쳐지던 드넓은 터를 생각하며, 무사이 또한 쓰임의 한계를 짓지 않았다. 동네에 위치한 공간답게 주민들이 오가며 이용할 수 있는 카페와 좋은 책들을 만나볼 수 있는 작은 책방을 꾸려놓았다. 30석이 채 안 되는 자그마한 ‘극장’은 가볍게 들를 수 있을 만큼 편안하고도 단란한 분위기다. 이곳에서는 문화 교육이 진행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극장에서 인간을 탐구하는 예술을 감상하며 자연스레 자신의 언어를 습득한다. 그렇게 학교의 시간은 마을로 이어진다. “문화가 우리 삶의 일부분으로 녹아들기 위해선 인근 학교의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드나들게끔 장벽을 낮춰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역의 문화 공간은 슬리퍼를 신고 갈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지론에 따라, 누구에게나 안전하고 자유롭게 쉬다가는 인문·사회·문화 예술 놀이터가 되기를 꿈꾼다. 걸음이 닿는 곳에서 누렸던 소비의 기쁨이 도시의 저 편까지 닿을 수 있게끔 동심원의 축이 되고자 한다.
글·사진 오은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