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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다정함
어떤 음악은 나를 멀리 데려다준다. 가끔은 아직 플레이 버튼을 누르기 전인데도.
지금은 여행을 자주 가지 못하는 형편이지만, 시도 때도 없이 여행을 떠나던 시절, 여행의 기쁨 중 하나는 기념품을 사는 일이었다. 거리를 걷다가 기념품을 파는 가게를 만나면 반드시 들어갔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지. 흔하지 않은 기념품일수록 좋았다. 기념품의 ‘기념’은 벼리 ‘기’에 생각 ‘념’ 두 개의 한자로 이루어져 있다.‘벼리’는 그물코를 꿴 굵은 줄이란다. 일이나 글의 뼈대가 되는 줄거리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기념품은 줄거리를 생각하게 하는 물건이란 의미다. 이렇게 의미가 적확하게 담긴 단어가 있다니! 나에게 기념품은 단어 뜻 그대로 여행의 줄거리를 기억하는 방법이었다.
지금도 방 한구석에 여행을 다니며 산 기념품들을 모아둔 커다란 플라스틱 상자가 있다. 다양한 나라에서 산 각종 기념품이 들어 있다. 어떤 기념품은 산 지 10년이 훨씬 넘었다. 평생 머물 수 있는 내 집이 생기면 그때 다 꺼내서 늘어놓고 살아야지 생각하곤 했지만, 2년에 한 번 이사를 다니는 입장에서 모두 꺼낼 날이 쉬 올 거 같지 않다. 그 상자는 이사할 때나 짐을 정리하며 한 번씩 열어 본다. 그때마다 잠깐 고민한다. 전부 다 버릴까? 이내 다시 닫는다. 그리고 그 상자 그대로 새 집으로 옮긴다. 그대로 닫힌 채 다시 머문다. 이걸 지금도 기념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쓰레기는 아닐까? 여행을 다녀온 지 10년이 넘어도 썩지 않는 쓰레기. 아마 내가 죽어도 이것들은 살아 있겠지. 그 생각을 하면 조금 끔찍하단 생각마저 든다.
이제는 기념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 된 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봤더니, 사람들이 기념품이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게 된 후부터인 것 같다. 요즘은 기념품 대신 굿즈라고들 말한다. ‘줄거리를 생각하게 하는 물건’이라는 멋진 단어가 그냥 ‘물건’이 되어 버렸다. 여기저기서 행사를 하면 별의별 굿즈를 나눠 준다. 예전에도 행사를 하면 기념품을 나눠주기도 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더 흔해져 버렸다. 문제는 대부분 잘 사용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얼마 전에도 어떤 회의에 갔다가 회사 로고가 박힌 머그컵을 주길래 난처했던 적이 있다. 그럴 때 “저는 굿즈를 받지 않습니다.”라고 담백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말을 하는 상상만 잠깐 할 뿐,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받아 왔다. 그 컵은… 정말 (지구에게) 미안하지만 집에 와서 분리수거해서 버렸다. 이런 나지만, 여전히 좋아하는 기념품이 있다.
10년도 더 전에 남아메리카를 몇 개월간 여행한 적이 있다. 여행의 마지막 도시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 곧 여행이 끝난다는 아쉬움에 사로잡혀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조금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냈다. 내내 숙소에 머물며 소고기를 굽고 와인만 마셔댔다. 소고기와 와인이 저렴한 아르헨티나는 허름한 숙소에도 고기를 구울 수 있는 도구와 와인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숙소에서 뒹굴거리며 먹고 마시며 밀린 영화를 보다가 심심해지면 숙소 앞 거리에 나가 생과일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그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마지막 도시에서 이러고 있다는 말에 먼저 이 도시를 지나간 여행 친구가 말했다. 일요일에 열리는 산텔모 벼룩시장에 가보라고,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 벼룩시장이라니, 귀가 솔깃하다. 돌아온 일요일, 우리는 오랜만에 아침 일찍 부지런히 숙소를 나섰다. 일요일 오전 산텔모 시장이 열린 거리를 걷는 동안, 스타워즈 티셔츠를 하나씩 샀고, 별이 박힌 체 게바라 모자를 샀고, 카펜터스 LP를 몇 장 골라 담았다. 그리고 LP판에 애비로드를 걷는 비틀즈를 오려 만든 벽시계를 샀고, 직접 손으로 나무를 깎아 만들었다는 와인 홀더를 샀다.
배낭을 메고 하는 여행이라 그간 기념품을 사기 어려워 봉인되었던 쇼핑 욕구가 산텔모 시장에서 해제되었다. 그나저나 LP판이라니, 돌아갈 집에 턴테이블이 있었냐고? 그럴 리가. 없었다. 집도 없는데, 턴테이블이 있었을 리가 없지. 그런데 샀다. LP는 배낭에 들어가지 않아 손에 들고 비행기를 타야 했지만 그땐 왜인지 이걸 꼭 사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산 티셔츠는 몇 번 입고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모자도 마찬가지다. 시계는 몇 년 거실 벽에 걸어두었는데 언제부턴가 작동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잘 쓰는 건 와인 홀더, 그리고 의외로 카펜터스 LP다. 그렇다. 얼마 전 드디어 턴테이블을 샀다.
거실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마침 같이 남아메리카를 여행한, 짝이 왔다.
“카펜터스 듣자. 산텔모 시장에서 사 온 거”
“그거 상태 되게 안 좋은데, 판 가장자리가 깨졌어.”
“못 들을 정도야?”
“아니야. 음악은 나와.”
LP들이 꽂혀 있는 선반을 살피며 산텔모 시장에서 산 바로 그 LP를 찾는다. 평소 말이 많지 않은 짝이 종알종알 여행 얘기를 하기 시작한다. 아르헨티나에서 샀기 때문에 스페인어 버전의 곡이 들어 있다나 뭐라나 그런 이야기를 하며 조심스레 판을 꺼내 턴테이블에 올린다.
치직치직 첫 곡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나는 산텔모 시장으로 간다. 신기한 것들을 팔던 시장, 비좁던 시장 거리에서 탱고를 추던 사람들… 침대에 벼룩이 기어다니던 숙소 4인실에 모여 앉아 작은 노트북 화면으로 보던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과 숙소에 있던 기타를 만지작거리던 일, 5월 광장과 근사했던 서점, 딸기 아이스크림까지 쏟아지듯 떠오른다. 여행지에서 사 온 LP는 타임캡슐과 같다.
산텔모 시장뿐만이 아니다. 낯선 도시를 여행하다가, 중고 LP판을 파는 가게를 만나면 불쑥 들어가곤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수잔 베가 음반을 살 거야.’ 같은 구체적인 다짐을 한다. 하지만 반드시 그걸 사야겠다는 마음은 없다. 여행지에서 반드시 필요한 게 있을 리가 없지. 그래서인가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갈 때, 이곳에 살고 있는 기분이 들곤 한다. 여기 살고 있는 것 같다는 감각을 느낄 때, 비로소 여행이 시작된다. 마치 이 판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 바로 음악을 들을 사람처럼 LP를 살핀다. 런던을 여행할 땐 브릭 레인 마켓 근처 레코드샵에서 윙스, 스팅, 폴리스, 엘튼존 등등을 샀다. 맞다, 거기서 수잔 베가도 샀다. 역시 런던이라 그런가 사고 싶은 음반이 많았다. 런던 애비로드에 갔을 땐 비틀즈의 애비로드 앨범을 사기도 했다. 중고가 아닌 새 LP를 산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바르셀로나에 살 때는 가장 좋아했던 거리인 라발 지구 타예르 길 레코드샵에 종종 들르곤 했다. 거기선 라디오헤드를 샀다.
그렇게 사 모은 LP가 지금 거실에 조금 꽂혀 있다. 하나씩 하나씩 사 모은 거라 많진 않다. 우리에게 턴테이블을 켠다는 건, 여행의 추억 스위치를 켠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여행과 관련되지 않은 판이 거의 없으니까. 학창 시절 좋아했던 한국 가수들의 LP도 몇 장 있는데, 이것도 서울 황학동에서 샀으니 여행이 아니었다고 말할 순 없다. 어느 연말엔 인터넷으로 찰리 브라운 크리스마스 LP를 사기도 했다. 그때도 턴테이블이 없었던 때다. 거실 한편에 LP를 꺼내 세워 놓기만 해도 크리스마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트리가 필요 없다. 카펜터스나 빙 크로스비 캐럴 앨범도- 크리스마스 즈음이면 꺼내 놓는 음반이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러브레터 LP로 바꿔 세운다. 본격적인 겨울을 기꺼이 환영한다는 의미다. 사실 LP는 선뜻 구매하기 꽤 비싸다. 게다가 당장 들을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크리스마스트리 대신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비싸게 느껴지지 않는다. 음악까지 나오는 크리스마스트리라니 너무 좋잖아?
클릭만 하면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아니, 몇 번 클릭하면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만들 수도 있는 시대가 되었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온갖 콘텐츠를 통해 우리는 낯선 도시에도 익숙해졌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왜 여행을 갈까. 여행은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라 그런 게 아닐까? 그곳에 가야만 알 수 있는 게 있다. 그곳에서 나는 냄새, 그 도시의 새벽 공기, 사람들의 미소, 길 고양이의 표정, 로컬 음식의 맛, 그건 정말로 그곳에 가야만 알 수 있다. 그리고 LP는 그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다시 떠오르게 하는 기념품이다. 내가 죽고도 남아 있을 물건을 산다는 건 언제나 머뭇거려지는 일이지만, LP는 내가 세상에 없어도 누군가의 곁에서 추억이 될 거라는 점에서 안심이다. 아, 여행 가고 싶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이 문장을 쓰고 잠깐 멍하니 있었다. 여행 가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한 지 정말 오래되었는데, 여행 가고 싶다.
낯선 거리를 걷다 우연히 발견한 레코드 가게에 불쑥 들어가, 레코드 가게 특유의 오래된 공기 속을 천천히 거닐며, 재즈, 팝, 클래식이라는 익숙한 글자가 쓰여 있는 진열대 사이를 천천히 돌며, 내가 좋아하는 앨범을 발견하는 즐거움, 낯선 화폐를 한화로 바꿔 계산하는 동안의 머뭇거림. 아주 얇고 네모난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와 숙소 한편에 두는 기쁨, 여행 마지막 날 짐을 싸며 LP를 캐리어에 넣을지 손에 들고 비행기를 탈지 하는 작은 고민. 그리고 집에 와서 선반에 LP를 꽂아두는 일. 수많은 추억들 곁에 새로운 추억을 놓고 싶다. 하지만 지금 당장 떠날 수 없다면, 턴테이블을 켤 수밖에. “우리 수잔 베가 들을까?”
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