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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파리 그 숙소’에 없다
‘미안해요. 비행 중이었어요. 집엔 잘 들어갔나요?’ 무려 10시간 만에 온 클로에Chloe의 답변에 허무함과 하루 내내 눌러오던 화가 치밀었다. 지금 나는 좁고 낡은 호텔방에 있고 배수가 약한 욕실에서 힘겹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참이었다.
세 번째 파리는 신혼여행이었고, 우리는 파리 5구, 생제르맹Saint-Germain 골목에 위치한 아파트를 빌리기로 했었다. 스위스 바젤에서 넘어오는 TGV서부터 그녀는 내 연락에 답변이 없었지만 별일이야 있겠느냐 싶었다. 우리는 파리에 무사히 도착했고 리옹역에서 이곳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조차 사전 예약한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 사단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부득이 부재하게 된 이유와 열쇠를 둔 위치를 알려주는 메일이 내게 제대로 도착하지 않았고, 그걸 모른 우리는 그저 집 앞에서, 인근 카페에서 하루 종일 그녀에게 연락을 하며 기다린 것이다. 그녀 역시 나와 연락이 닿은 시점에야 메일 발송에 문제가 있었단 것을 알았고, 이미 숙소는 서비스 업체를 통해 취소한 뒤였기 때문에 몇 마디 미안하단 말과 함께 그녀는 연락을 끊었다.
오후 내내 전화를 붙들고, 숙박 서비스 업체의 현지 담당자와 사태를 수습하느라 진을 뺀 남편은 이미 잠들었고, 덕분에 이 새벽의 분노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 시작부터 엉망이란 꼬리표가 달린 여행이라고 한탄하며 침대에 누웠다.
이번 여행에도 내 노트엔 몇 달 동안 고심하여 만든 위시 리스트가 적혀있었다. 예기치 못한 숙소 사건으로 가장 상단에 적힌 몇 가지 항목에 문제가 생겼다. 클로에 집에서 느지막이 늦잠 자기, 클로에 집에서 아침 해 먹기, 클로에 집 소파에서 햇빛 받으며 하루 종일 뒹굴거리기, 클로에 집 테라스에서 늦은 밤까지 신랑과 와인 마시며 수다 떨기. 클로에 집을 무대로 한 모든 리스트에 빨간불이 들어온 상황이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내겐 이들만 묶어 별 표시 다섯 개를 쳐 두었을 만큼 중요한 사항이었다. 온라인에서 사진으로 본 그녀의 집은 넓었고, 큰 창으로 햇살이 잘 들었다. 거실엔 베이지색 패브릭 소파가, 침실엔 하얀 침구로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가 있었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의 부엌에는 로맨틱한 테이블 보가 깔린 식탁이 있었다. 작은 테라스가 있어 밤낮으로 한산한 생제르맹 거리를 구경할 수 있었다. 갓 결혼을 한 나는 파리의 집에서 남편과 일상 같은 날들을 시작해보고 싶었다. 이루기 수월할 거라 의심치 않았기에 생각할수록 이 상황이 억울하고 속상했다.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잠들기 전 다음 숙소를 결정하기 위해 두 시간 가량 서칭을 하고 호스트들에게 메일을 썼다. 몇 시간 만에 허락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이 황당한 사건이 내게 왔듯, 새로운 행운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부는 불가하단 연락을 주었고, 일부는 답이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당연하단 사실은 위로가 되지 못했다. 결국 이 호텔에 더 묵기로 할 수밖에.
중요했던 숙소가 엉망이 되자, 다른 것으로나마 이 부족함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덮쳤다. 남은 리스트를 한참이고 들여다보았다. 나는 불안해졌다. 이번 여행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그 이후로 난 더 리스트에 매달리고, 완수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가을 가로수길이 아름답던 보주광장, 아베스 역에서 몽마르트 언덕까지의 한가로운 뒷길, 뱃놀이를 즐기던 동쪽 외곽의 뱅센 숲, 모두 리스트를 지워가며 맛본 달콤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기쁨과는 별개로 계획에 집착할수록 매 순간은 긴장의 연속이었고 늘 불안하고 조급했다. 여행 내내 쌓인 불편한 감정들이 이것이 진정한 여행이냐고 내게 줄곧 묻고 있었지만 그때는 몰랐다.
준비된 것들은 언제든 틀어질 수 있었다. 오히려 그 틈새로 찾아온 우연들이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게 여행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써 내려가는 흥분과 기대가 여행을 준비하는 자의 특권이듯, 떠난 순간부터 내게 필요한 것은 지나친 간절함보단 느긋하고 여유로운 마음가짐이었다. 누군가는 여행이 권태 치유의 가장 나태한 방식이라고 질책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래 봐야 했다. 그저 떠나는 일로 행복을 기대하는 게으른 여행자가 되어봐야 했다. 목표를 위해 늘 분주하던 일상의 나를 버리고,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흘러가는 모든 것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한 발 물러서서 찾아오는 여행의 무수한 부산물들과 천천히 유희하면 되었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었음을 깨달은 지금, 조급하던 그날 파리의 내가 밉기보다 안쓰러워졌다.
클로에 사건이 있고 이튿날 아침은 유난히도 맑은 날이었다. 속상한 마음은 채 풀리지 않았지만 남편이 호텔을 연장하러 내려간 새 기지개를 한껏 켜보았다. 어찌되었든 이후의 숙소는 해결되었고, 안도감 같은 것이 밀려들었다. 더블 침대와 테이블, 우리의 짐 가방으로 가득해진 아담한 호텔방을 둘러봤다. 어젯밤 칙칙하던 분위기와 달리 오래된 커튼을 투과해 들어오는 햇살 덕분에 실내는 무척 포근했다.
남편은 맛있는 아침 식사로 어제의 기분을 풀자며 음식점 몇 군데를 찾아냈고 우린 호텔을 나섰다. 아쉽게도 기대했던 메뉴들은 오후부터나 주문이 가능했고, 우린 본의 아니게전형적인 프랑스식 아침 식사를 해야 했다. 바게트와 크루아상, 오믈렛, 커피와 오렌지 주스로 단출한 차림새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친 메뉴 고민도, 입맛에 맞네 맞지 않네 하는 일도 없으니 자못 편하기도 했다. 우리가 앉은 창가 테이블엔 아침 햇살이 가득 찼다. 오래되어 하얗게 벗겨진 나무 테이블과 촌스러운 듯한 식기류가 편안했다. 빵은 따뜻했고 커피는 부드러웠다. 생각보다 별 것 아닌 식사에 마음이 녹았다. 미리 준비된 적 없던 그 순간은 평온했고, 지금도 내게 따스한 풍경으로 남아있다.
뱅센 숲
Vincennes
C파리 동쪽 외곽 12구에 위치한 거대 규모의 뱅센 숲은 호수와 동물원, 공원 등 파리인의 휴식 공간으로 잘 꾸며져 있다. 그중 도메닐Daumesnil 호수에서 즐기는 보트 타기는 자연과 여유를 만끽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1유로에 나름 스릴까지 있다.
글 사진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