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자신을 믿지 못한 날들에 어퍼컷!

영화

“계속하다 보면 나아져요, 언니.” 복싱장에 등록한 지 일주일째였다. 복싱으로는 1년 선배인 중학생 여자아이가 헥헥거리는 나에게 말했다. 그 애는 입매도 몸피도 다부졌다. 그 말을 믿고 계속 제자리를 뛰며 허공을 찔렀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찼다. 변하고 싶었다. 변해야만 했다. 뭔가를 오해한 상사가 나를 쏘아붙일 때 어버버버 하고 싶지 않았다. 야근과 폭식에 물러터진 몸을 그만 미워하고 싶었다. 나 여자친구 있는 거 이제야 알았냐는 어느 뻔뻔한 얼굴에 한 방 먹여주고 싶었다.

‘지금 변하지 않으면 나는 남은 생 내내 잘못한 타인이 아닌 나를 미워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던 시절이었다. 복싱이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면 이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백엔의 사랑>의 이치코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겐 꿈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엄마 집에 얹혀살며 홈비디오게임으로 시간을 죽이는 게 일상이다. 보다 못한 언니가 그녀를 내쫓아 독립을 시작했다. 편의점에 일자리를 구했지만, 그곳의 동료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이후 그녀는 무엇인가 결심한 듯 동네 복싱장에 등록한다. ‘그 주먹으로 세계를 뚫어라.’ 는 문장이 대문짝만하게 붙어있는 복싱장에서 이치코는 자신의 세계를 허문다.

내가 기다리는 일도, 나를 기다리는 것도 없다는 듯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던 그녀의 걸음이 반짝 멈추던 곳. 복싱장 앞이었다. 한 남자가 미친 듯이 샌드백을 치고 있었다. 세상에 샌드백과 자신밖에 없는 것처럼,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시원해질만큼 땀에 흠뻑 젖어서. 아마도 이치코는 할 수만 있다면 자기 자신을 미워했던 과거를,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내버려 뒀던 과거를 그처럼 미친 듯 때려 부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홀린 듯 빠져들어 봤던 복싱장의 남자, 카노가 우연히 편의점에 들르고, 둘은 함께 지내는 사이로 발전한다. 카노는 이치코를 웃게 만드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웃음이란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당신이 좋아.’ 하는 당당함 보다는 ‘이런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하는 비굴한 웃음에 가까웠다. 복싱으로 단련을 시작한 그녀지만, 30년 넘게 방치해온 마음의 근력이 금방 강해지기란 어려울 것이다.

둘이 함께 잠을 자고 밥을 먹던 어느 날, 카노는 두부 장수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 이치코는 분노를 연료삼아 샌드백이 너덜해지도록 연습에 매진하고, 복싱 선수권 시합날이 다가온다. 결전의 날, 강력한 상대를 만난 그녀는 KO패를 당한다. 입술에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그녀의 머릿속으로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쓸모없는 인간이라며 언니와 몸싸움했던 날, 부끄러워서 카노에게 말 한마디 못 붙이다 용기 냈던 날, 성폭행을 당했던 순간. 이대로 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벌떡 일어나 보지만, 이미 경기는 끝이 났다. 그제야 이치코는 상대방 선수를 뜨겁게 끌어안고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아마도 그녀 인생에서 처음으로, 스스로가 만든 링 위에서 마지막 힘까지 다해 싸운 경험이 그토록 고마웠을 것이다. 이가 빠지고 눈두덩이 짓눌리도록, 얼굴이 망가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싸웠다. 경기가 끝나고, 그녀는 눈물을 터트렸다.

“이겨서 승자가 되고 싶었어. 단 한 번이라도 이겨보고 싶었어.”

 

눈물은 쉽게 나약함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무언가를 간절히, 간절히 원해본 사람만이 서럽게 울 수 있다. 어떤 바람도 품어보지 못했던 이치코는 ‘이기고 싶다’ 는 욕망 때문에 의욕을 가진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규칙적인 운동이 만들어낸 에너지로 그녀는 엄마의 도시락 가게 일을 배웠고, 걸음걸이는 빨라졌고, 등이 곧게 펴졌다. 자신이 무엇인가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 더욱 건강한 몸, 나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몸, 위험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강한 몸으로 그녀는 자신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 변화는 그녀를 웃게 했다. “나 젊지 않아.(그래도 하고 싶은 걸 하기로 했어.)” 말하며 웃어 보이는 이치코와 맥주를 한잔하던 아버지는 말한다. “너 조금 변했구나.” 졌지만 그거면 괜찮은 거 아닐까. 웃을 줄 모르던 사람이 한여름 맥주처럼 청량하게 웃는 거.

시작이 있으니 끝이 있죠

싸울 수 있었기에 질 수도 있었죠

<백엔의 사랑> OST 중에서

We Around Project
영화 속 그녀들을 말하다

 

에세이《혼자서도 일상이 로맨스겠어》(2019, 새움출판사)를 썼습니다. Humans of Seoul 인터뷰어, MBC 다큐스페셜 취재 작가로 있었습니다. 지금은 영화제 스태프로 일하며 ‘글로 나와 타인을 위로하며’ 살고자 합니다. 다 그만두고 싶어질 때마다,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에게서 삶의 태도를 배워왔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혹은 애달파서 응원하는 영화 속 여자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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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도상희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