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외로움을 혼자 걷는 법

영화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품이 필요했다. 늘 그랬듯 가장 안고 싶은 사람은 곁에 없었다. 데이트 앱을 켜서 매치된 사람을 만났다. 그는 택시를 타고 15분 만에 왔다. 다시는 볼 일 없는 사람과 잠깐의 따뜻한 만남이 지나가고 나니 나는 더 추워졌다. 내 뒤에 따라붙는 죄책감과 허탈함을 흩으며 밤길을 걸었다. 방금 맞닿았던 살의 감촉이 몇 년 전의 것처럼 아득해지는 걸 느끼면서, 오래오래 걸었다. 길 잃은 사람처럼.

<와일드>의 주인공 셰릴에게서 헤매던 나를 보았다. 그녀가 스스로 붙인 성 ‘스트레이드’에는 ‘길 잃은’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누구보다도 소중한 친구였던 엄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셰릴은 텅 빈 마음을 마약과 섹스로 채우다 결국 남편과 이혼한다.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아이를 가진 겨울. 완전히 길을 잃었다고 느낀 순간, 그녀는 PCT(Pacific Crest Trail) 트레킹 책을 보게 된다. 4,285km의 기나긴 사막과 눈길. 그녀는 책 표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나 자신으로 다시 사는 길

 

“엄마가 자랑스러워하던 딸로 돌아갈 거야.” 셰릴은 자신의 키보다 큰 짐을 지고 트레깅에 나선다. 캘리포니아 주의 멕시코 국경부터 워싱턴 주의 캐나다 국경까지, 미국 서부를 종단해 ‘신들의 다리’에 이르는 94일간의 여정. 그녀는 혀를 태우는 사막과 살을 에는 칼바람이 공존하는 길을 걷는다. 방울뱀을 만나고, 자신을 겁탈하려는 남자와 마주치고, 돌길에 발톱이 빠져 그만두고 싶어질 때마다 셰릴은 엄마를 떠올린다. “너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찾아 그걸 지키렴.” 살아야 한다면 기쁘게 살고 싶다며 흥얼거리던 엄마의 콧노래가 그녀의 머리맡을 지킨다.

“내가 미안해. 그 일(이혼) 때문에 먼 길을 걷고…” 이혼한 남편은 전화로 사과하지만, 셰릴은 이혼이나 한 남자 때문에 트레킹을 결심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길의 끝에서 자신을 되찾고 오롯이 ‘나’로서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그녀는 “나 자신으로 살아보질 못했어. 엄마 아니면 아내로만 평생을 살았어. 시간이 많은 줄 알았지….”라는 엄마의 고백을 되새기며 고단함을 견딘다.

 

 

트레킹 가방 속 호루라기와 콘돔

 

여성 혼자 하는 트레킹은 험난하다. 혼자 PCT를 걷는 여자를 의심스럽게 여긴 숙소 주인은 일행이 있는 것 아니냐며 숙박비를 더 요구했고, 히치하이크를 할 때는 운전자가 자신을 해칠까 경계해야 했다. 그러나 트레킹에서 만나는 남성들은 경계해야 할 두려운 존재인 동시에 그녀의 여정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그들은 셰릴이 혼자 건널 수 없는 곳을 건너도록 돕거나, 꼭 필요한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셰릴의 가방 속에는 호신용 호루라기와 콘돔이 있다. 비단 트레킹에서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남성은, 여성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사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두 가지 사물은 보여준다. 셰릴은 함께 걷는 남성들과 동료이고 싶고, 함부로 성적 대상으로 여겨지고 싶지 않다. 동시에 ‘내가 원하는 상황에서 내가 하고 싶은 사람과 안전하게 섹스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기도 한다. 호루라기를 불거나 콘돔을 사용하는 일. 두 욕망의 균형을 지키는 일은 아슬아슬하지만, 셰릴은 무사히 여정을 마친다. 그리고 셰릴은 도착한 도시에서 만난 한 남성과 하룻밤을 보낸다. 그녀가 진심으로 원했기에. 이렇게 셰릴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첫 걸음을 내딛는다.

 

 

너도 아름다움의 길에 들어설 수 있어

 

동료: 외로워요?

셰릴: 솔직히 내 진짜 삶에서 더 외로운 거 같아요. 친구들이 그립긴 하지만 집에서 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당신은 어때요, 왜 왔어요?

동료: 내 안의 뭔가를 찾아야겠다 싶어서요. 제대로 온 것 같아요. 보세요. 보기만 해도 재충전되는 풍경이에요.

셰릴: 저희 엄마가 지겹게 하던 이야기가 있어요. 일출과 일몰은 매일 있으니까. 네가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어. 너도 아름다움의 길에 들어설 수 있어.

여정의 끝에 다다를 즈음, 셰릴은 여성 동료를 만나 드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눈다. 엄마가 남긴 말처럼, 일출과 일몰은 매일 있다. 셰릴이 엄마의 죽음 이후 새로운 길을 나서기까지 힘들었던 건, 길을 떠날 때는 꼭 누군가와 함께여야만 의미 있다고 여겨서는 아니었을까. 사랑하는 사람 없이 혼자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말하는 일은 처량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셰릴의 마음속엔 혼자 걷는 길에서 본 아름다운 풍경들이 새겨졌다. 흰 설경에 점 찍은 여우의 검은 눈빛, 새벽잠을 깨우던 개구리들, 푸른 숲과 그곳에서 스쳐 지나갔던 아이가 불러주던 노래, 끝없던 지평선…. 셰릴의 실제 트레킹을 영화화한 <와일드>는 혼자 견뎌낸 고통도, 혼자 아름다움을 느낀 시간도 자신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두라고 말한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자신을 잃어간다고 느낄 때,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을 때, 꺼내어 볼 소중한 순간을 만들어 두기를. 그리고 다시 걷기를.

We Around Project
영화 속 그녀들을 말하다

 

에세이《혼자서도 일상이 로맨스겠어》(2019, 새움출판사)를 썼습니다. Humans of Seoul 인터뷰어, MBC 다큐스페셜 취재 작가로 있었습니다. 지금은 영화제 스태프로 일하며 ‘글로 나와 타인을 위로하며’ 살고자 합니다. 다 그만두고 싶어질 때마다,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에게서 삶의 태도를 배워왔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혹은 애달파서 응원하는 영화 속 여자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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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도상희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