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에서 나오다가 다리 때를 한쪽만 밀었다는 걸 깨달았다. 싱긋 웃을 때 가늘게 올라가던 당신의 입꼬리를 생각하다가 깜빡했다. 옷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당신이 좋아하던 색의 체크 셔츠를 오래 보았다. 당신이 보내준 소포의 포장지를 여전히 버리지 못했다. 고작 한 계절을 보낸 사람이었다. 제대로 싸움 한 번 해본 적 없어서 영영 미워할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 조용히 울고 싶어, <한강에게>를 보러 영화관으로 숨어들었다.
시인 ‘진아’는 어느 날 한강에서 연인 ‘길우’와 싸운다.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진 ‘길우’는 한강에서 낯모를 타인을 구하다 혼수상태가 되어 돌아온다. 진아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물리적으로 잃은 것은 아니지만 부재의 터널을 지나는 나에게 ‘진아’는 그런데도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사소하고 무거운 슬픔
진아는 갑작스러운 길우의 빈자리가 낯설다. 그가 누워있는 병원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다. 웃고 말하고 화내던 그의, 멈춰버린 몸을 바로 볼 수 없다. 진아는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고, 밥을 해 먹고, 사람들과 대화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혼자가 되었을 때, 진아는 돌무더기에 짓눌린 사람처럼 침대에 파묻혀 잔다. 눈꺼풀을 덮는 무거운 잠, 아니 슬픔을 홀로 짊어진다. Grief(슬픔)의 어원은 ‘Gref(무거움)’이라고 한다. 그것을 짊어지고 그녀는 살아낸다.
그러나 평소처럼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지날 때, 기억이 그녀를 급습한다. 강은 길우의 마지막 모습을 담았다. 그 깊이 모를 물을 쳐다보지 못한다. 길우와의 기억은 이렇게 갑자기 튀어나와 진아를 내려친다.
비가 온 여름, 김치볶음밥을 만들려다 “맞다 빨래!” 하고 같이 옥상에 뛰어 올라가 걷어온 이불. 둘의 속옷이 섞여 돌아가는 세탁조를 들여다볼 때 발견한 무지개. 굵은 팔목이 가슴께를 지그시 누를 때 느꼈던 무게감. 집에서 머리를 염색할 때 “흰머리가 있네. 검은 머리 내가 사줄게, 주문해~” 하던 아무것도 아닌 농담. 사소한 일상을 잃는 일이 얼마나 참기 어려운 고통인지, 내가 지금 이토록 아픈 것은 당연함을 <한강에게>는 보여준다. 자잘한 기억은 끝없이 밀려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증명한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둘만 아는 순간을, 나만 알고 있는 당신의 습관을 기억한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괜찮지 않음’을 똑바로 바라보기
“사람들이 자꾸 괜찮냐고 물어봐. 그래서 안 괜찮은데 괜찮다고 말해야 해. 그게 힘들어.” 상실한 사람은 긴 그림자를 늘어뜨린다. 다른 사람은 그의 사정이 궁금하거나 단지 침묵을 견딜 수 없어서, 아니면 습관처럼 질문한다. “괜찮니?” “아니, 안괜찮아. 마음을 장기라고 하면, 그걸 강판에 갈고 소금을 친 것처럼 쓰라려”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
학교에서 만나는 학생마다, 낭독회에서 만나는 편집자마다 안부를 물어오는 바람에 진아는 지쳐있다. 길우와 함께 친했던 기윤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며 만취한다. 그 후에는 가장 애달픈 장면이 지나간다. 타인의 몸속에서 찰나의 위로를 얻으려는 어리석고 가여운 시도. 그러나 곧 진아와 기윤은 어떤 종류의 상실은 타인으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섹스를 포기한다.
영화에서 진아는 시를 쓰고 시집을 내는 일로 조금씩 슬픔을 추스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는 도구일 뿐, 그녀가 죄책감과 상실감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질문했기 때문이다. 도피하지 않고 스스로 물었기 때문에. 진아는 시 창작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실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시가 시작돼요. 보통 우리가 시를 쓸 때 ‘여기까지만 쓰면 되겠지.’ 하고 멈추는 경향이 있는데 절대로 그러면 안 돼요. 예를 들면, 나는 왜 외로울까? 왜지? 왜? 나는 왜 애인이 생기지 않아. 왜? 왜 저 사람은 내 마음을 몰라주지? 왜? 이렇게 계속 쓰다 보면, 나만의 ‘왜’가 찾아질 거예요.”
길우는 왜 그 사람을 구하려 강으로 뛰어들었을까? 나는 그에게 왜 화를 냈을까? 나는 어떻게 길우를 보내고도 먹고 자고 웃을 수 있을까? 길우 없는 세상에서 시를 쓴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계속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영화에 진아의 독백은 등장하지 않지만, 아마 진아는 이렇게 묻고 또 물으며 회복의 첫 걸음을 내딛었을 것이다. 결국 살아내야 한다는 답을, 당신이라는 이름을 시라는 비에 새기겠다는 답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진아의 대사처럼 ‘어떤 비극은 영원히 지나가지 않는다.’
<한강에게>
계단은 먼 곳으로 쏟아진다 강변에 서면 예외없이 마음은 낮은 곳으로 미끄러진다
강물에 아직 그의 얼굴이 걸려있고 흔들리는 다리에는 다 접지 못한 날개로 갈매기들이 앉았다 책의 첫 장에 그 사람을 써서 보냈다 그가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의 말이 떠오르고 떠오르는 모든 것을 미워했다
다음 말을 골라야했지만 물길이 높아져있었다
빛들이 강 건너에 오래 떠돈다 유일한 증인처럼 강물은 가장 어두운 곳까지 손을 놓지 않고 망망한 것들은 흐르지 않기도 했다
돌아갈 길이 아득해 더 멀리 가고만 싶었던 날들에게
꿈이라고 꿈처럼 말해야했지만
We Around Project 영화 속 그녀들을 말하다
에세이《혼자서도 일상이 로맨스겠어》(2019, 새움출판사)를 썼습니다. Humans of Seoul 인터뷰어, MBC 다큐스페셜 취재 작가로 있었습니다. 지금은 영화제 스태프로 일하며 ‘글로 나와 타인을 위로하며’ 살고자 합니다. 다 그만두고 싶어질 때마다,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에게서 삶의 태도를 배워왔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혹은 애달파서 응원하는 영화 속 여자들을 만나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