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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여기에 작은 책방이 있다
망원동에는 목욕탕이 있다. 줄을 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호떡 가게가 있고, 1500원짜리 국수를 파는 집도 있다. 채소장수는 배에 힘을 주고 소리친다. “신선한 시금치 사세요!” 철물점과 빵집, 피아노 학원 그리고 동네책방. 아주 평범해서 쉽게 지나치게 되는 골목 안 풍경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 책방 앞을 서성였던 걸까? 그저 작은 가게일 뿐인데.
오래된 골목
다정한 공간
내가 어렸을 때는 동네마다 작은 책방들이 많았다. 여기서 ‘많다’라고 힘 줘서 말할 수 있는 건 또래 아이들에 비해 이사를 자주 한 탓에 비교적 여러 곳을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기억 속에는 동네마다 적어도 두 개쯤, 이른 바 참고서나 문제집을 파는 책방들이 있었고 만화책을 빌려볼 수 있는 대여점은 그보다 더 많았다. 왜 그랬는지 몰라도 친구들과 지칠 때까지 축구를 하다가 해가 떨어지면 어김없이 책방으로 향하곤 했는데, 핸드폰은커녕 삐삐조차 없었던 그 무렵에는 그것이 거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던 듯싶다. 책방 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서 읽었던 책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당시 꼬질꼬질한 나를 내쫓지 않았던 책방 주인과 오래된 책의 질감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요즘에야 굳이 오프라인 서점이 아니더라도 책을 주문할 수 있고, 어쩐 일인지 눈에 띄는 곳에는 언제나 대형 서점이 있어서 잊고 지냈는데 여전히 동네에는 그곳만의 작은 책방이 있었다. 마침 배가 고파서 들렀던 망원시장을 지나 평범한 골목, 간판도 없는 가게 하나를 만났을 때, 여느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잠시 헷갈리기도 했다. 통유리 너머로 책이 진열되어있기는 한데 특별한 표시가 없으니 작업실인지, 카페인지, 그도 아니면 누군가의 말처럼 실험을 위한 연구실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창문 한 귀퉁이에 새겨진 ‘책방’이라는 표시를 보았고, 그러자 이번에는 이 작고 따듯해 보이는 공간이 이토록 평범한 골목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INTERVIEW 이승주
‘만일’은 어떤 곳인가요.
‘만일’은 동네의 작은 책방이에요. 주로 다루는 책은 인문교양과 문학이고요. 세부적으로는 환경과 인권 같은 조금은 무거운 주제부터 먹거리와 동·식물, 주거, 노동과 일터, 지루함, 부모와 아이같이 흥미를 끌만한 키워드를 정해서 거기에 맞는 책을 선택하고 있어요.
일종의 편집숍인 셈이네요.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인가요?
출판사를 많이 보려고 해요. 다양한 장르를 다루는 곳보다는 추구하는 성격이나 방향이 일관된 출판사를 선호하는 편이에요. 책방의 성격과 맞다 싶으면 그 출판사의 모든 책을 다 가지고 오기도 하고요. 대형 서점의 서가에서는 숨겨져 잘 보이지 않는 책이나,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작가의 책을 소개하는 것도 만일의 역할 중에 하나예요.
‘만일’이라는 이름이 궁금해요. 어떤 의미인가요?
이장욱 시인의 ‘만일의 세계’라는 시에서 이름을 따왔어요. 지금과는 다른 어떤 것들을 상상하고 싶었거든요. 그러니까 만일의 밥상, 만일의 일터, 만일의 소비, 만일의 사회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었던 거죠. 그리고 우연찮게도 이곳 망원동과도 자음이 같네요(웃음).
만일이라는 것은 결국 지금이 아닌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일 수도 있겠네요. 책이 그런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고 믿으시나요?
어렸을 때부터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제 안으로 가져오기보다는 구조적인 문제로 생각하는 편이었거든요. 아무래도 그런 생각들이 책방을 구성하는 데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싶어요. 사실 책 말고도 우리 주변에는 영향을 주는 다양한 매체가 있잖아요. 이미지도 있고, 아니면 음악이 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책이야말로 사회의 문제를 가장 밀도 있게 다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책을 통해 다른 사회나 삶을 모색하고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본 거죠. 사실 처음부터 책방을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어떤 방식이든 책과 사람을 잇는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책방이 바로 그 역할에 적합할 거라는 판단은 나중 일이었어요.
그렇다면 책방은 바로 그 책을 즐겁게 접할 수 있는 일종의 ‘수단’으로 볼 수도 있겠네요?
사실 저는 ‘독서운동’ 같은 구호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아무리 좋은 취지여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강하면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그 좋은 것을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스며들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남는데요. 책이 여느 문화 콘텐츠처럼 쉽고 재미있게 전달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편하게 들어와서 책을 구경하고, 그러다 보면 자신에게 맞는 걸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책방의 인테리어나 배치 방법, 혹은 다른 어떤 방법을 생각할 수도 있는 거고요.
다른 방법이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대단한 건 아니지만 몇 가지 시도하는 게 있는데, 대표적으로 ‘주민지기’라는 프로그램이에요. 동네의 친한 주민들의 제안으로 시작한 건데, 일정 시간동안 원하시는 분에 한해서 저의 자리를 대신 지켜주시는 거예요. 책을 읽거나 자신의 작업을 하며 간단한 계산업무를 처리하는 게 전부이지만 이를 통해 책방이라는 공간을 조금 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서 시작했어요. 또 다른 일로는 ‘이웃의 서가’라는 것이에요. 만일의 이웃들을 책방에서 만나고 그들이 추천하는 책으로 책장 한쪽을 채우는 거죠. 이웃 중에는 뮤지션도 있고 학자나 작가분들도 많아요. 그들의 작업을 소개하고 좋아하는 책을 공유하는 작업이에요. 그 외에도 따뜻한 뱅쇼를 마시며 함께 나누고 싶은 구절을 적는 일이나, 독서 모임에 공간을 대여하기도 하고요. 앞으로는 키워드를 정해 인문교양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기도 해요.
그런 다양한 작업들이 이 공간을 친근하게 만드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 같나요?
그 부분에서는 사실 조금 고민이 있어요. 오래전부터 이 터를 지켜온 동네 주민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 말이에요. 특히나 홍대 주변은 조용한 동네에 이질적인 상점들이 하나둘 들어와 빠르게 개발되는 상황이 많았잖아요. 이런 변화가 젊은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일일 수 있지만 조금 나이가 있으신 분들에게는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도대체 저 세계는 뭐지? 자기들끼리만 재미있게 노는, 나와는 상관없는 저 모임은 뭘까?’라는 의문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러운 마음을 갖게 돼요.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서 기존의 주민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책방을 이용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물론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말이에요.
책방이 생소한 공간도 아닌데 기존의 주민들이 불편해할 이유가 있을까요?
인테리어도 생소할 테고, 아무래도 젊은 여자가 주인으로 앉아있는 곳은 더욱 낯선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래서 ‘주민지기’ 분들이 가게를 지키며 다양한 분위기를 내주시는 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다행히도 누구나 조금씩은 책에 대한 관심들이 있어서,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물어보는 분들도 종종 계세요. 가게 밖에서 빠끔히 고개만 내민 채로요(웃음). 대여점은 아닌지, 시민 단체에서 운영을 하는 것은 아닌지, 심지어 실험보고서를 쓰려고 일부러 만든 장소인지 물어보시는 분들도 계세요.
아마도 간판이 없기 때문에 더 그런 반응들이 나오는 건 아닐까요?
일부러 안 만든 건 아니예요. 사실은 아직 디자인을 정하지 못했어요. 더 멋진 디자인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큰 것 같아요. 그리고 워낙 정신이 없기도 했고요. 주변에서는 지금 이대로 놔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저로서는 의도치 않은 반응들이 나오기도 해요. 인테리어가 아주 세련되거나 한 건 아니라서 조금 어설프더라도 이해를 해주시지 않나 싶어요.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에, 책을 구입하기보다는 이곳의 느낌만 가져가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요. 가게의 운영이 힘들지는 않나요?
글쎄요. 정확하게 확인해보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적자이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만일은 주민들과의 소통이 먼저라는 생각이에요. 조금이라도 더 책을 많이 접하도록 유도해서 독자의 외연을 넓힐 수만 있다면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앉아서 편하게 책만 읽고 가셔도 좋아요.
과거에 출판 분야에서 일을 했다고 들었어요. 그에 비교하자면 지금 책방을 운영하는 마음은 어떤가요?
과거에 했던 일들에 대한 회의는 없어요. 하지만 저는 지금 소수로 무언가를 만드는 형태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죠. 여러 작은 단체들이 어떻게 활동하고 자립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게 흥미로워요. 공동체 같은 이상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좀 더 느슨하게 그 과정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에요. 물론 쉬운 일은 아니죠. 특히 만일이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주목을 받으면서부터 부담감이 커졌어요. 감사한 마음과 어떻게 서가를 꾸릴 것인가 하는 책임감이 공존하기 시작한 거죠.
하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런 고민들을 잘 모를 것 같아요. 전혀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거든요.
어찌되었든 책방은 다정한 곳이잖아요. 평화로워야하고요. 저 역시 조금 더 잘하고 싶어서 부담을 느낄 뿐이지, 일 자체가 싫지는 않으니까요. 책방을 찾는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받기도 하고 무엇보다 틈틈이 책을 읽으며 위로를 얻어요. 그러면서 될 수 있으면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죠.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책들을 가지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요. 물론 번거롭고 까다로운 일일 테지만, 공공의 장소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자주 책을 보여주고 싶어요. 실제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렸던 ‘공원예술상점’이라는 행사에 책을 가지고 나간 적이 있었어요. 물론 흥미로운 소품들 속에서 사람들이 책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더라고요(웃음). 하지만 어쨌든 책이 있는 공간 자체에 자주 노출되는 건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어렸을 때 동네의 책방 하나쯤은 어렴풋이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책을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요.
저는 단지 책 주변에 있을 뿐이에요. 살아가기 힘든 사회 안에서 아주 작고 연약하지만 책을 통해 무언가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마음. 그것만 지키려고 해요.
만일이 계획한 작지만
따뜻한 프로그램들
만일의 주민지기
책방 근처에 거주하고, 집중해서 책을 읽을 만한 공간이 필요한 주민들이 잠시 동안 책방 지기로 활동하는 것. 아르바이트가 아닌 자발적 활동이기에 주민들이 원하는 시간에 비정기적이며 느슨한 형태로 운영한다. 공개적인 모집은 하지 않고 신뢰가 쌓인 책방 단골손님들과 함께 한다.
만일의 독서 모임
매주 일요일에는 책방에서 주최하는 모임 외에 기존 독서 모임에 공간을 대여하기도 한다. 대여료는 따로 없고 모임에서 필요한 책을 책방에서 구입하는 것을 권유하는 정도로 진행된다. 현재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의 책 읽기 모임과 ‘현실탐구단’의 글쓰기 크리틱 모임이 진행된다.
·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BIYN.kr
· 현실탐구단 facebook.com/hstgd
밤의 책방 만일 x 아웃투런치Out to Lunch
먹거리와 아트웍을 함께 만드는 ‘아웃투런치’와 협력한 프로그램이다. 책방에 오래 머물며 책을 읽기 원하는 이들을 위해 겨울 시즌 한시적으로 뱅쇼를 판매하고 있다.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오후 6시 이후에 이용할 수 있다.
· 아웃투런치 letsouttolunch.tumblr.com
만일의 이웃, 이웃의 서가
이웃의 작가와 아티스트를 초대해 그들의 활동을 소개하고 책방의 한 켠을 이웃의 서가로 채운다. 작가, 편집자, 독립출판 제작자, 음악가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웃들이 하는 일과 작업, 활동을 세미나, 토크, 공연 등 자유로운 형식으로 구성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The Reader’s List 독서차트@책방 만일
회원가입 후 일정 금액 이상을 구입하면 중고책을 선물로 가져갈 수 있다. 책방에서는 손님들이 구입한 책의 목록, 취향, 관심사를 바탕으로 책을 추천할 수 있고, 손님들은 자신의 독서 이력을 점검하면서 독서의 방향을 일관되게 연결하거나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준비중인 프로그램
‘자살·요절한 작가들의 작품 읽기’, ‘한국과 일본의 근대를 둘러싼 담론’ 등이 있는데 아직 커리큘럼을 구성하는 단계이다. 손님들의 제안으로 시작되었고, 사전 준비 모임을 통해 읽어야 할 책의 리스트와 커리큘럼을 함께 만들고 있다. 책방에서 일방적으로 정한 책이 아닌, 어떤 책과 텍스트를 어떠한 방식으로 공부할지에 대한 고민부터 함께 해 갈 예정이다
만일이 권하는
분야별 서적들
01.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긴 호흡으로 텍스트를 읽기 어려운 시대, 문학과 예술은 우리 삶의 어떤 지점에 위치하고 어떻게 우리를 (그나마) 인간답게 살게 해줄 수 있을까? 이 절실하고 답답한 질문에 대한 일말의 단서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데이비드 실즈 | 책세상
02.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지리적인 범주의 서울이 아닌 정치·경제학적인 관점으로 보는 서울에서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타벅스’, ‘아파트’, ‘성형외과’ 등에 잠식된 도시에서 ‘소진’되는 삶을 살며, ‘알아서 생존’해야 하는 이 시대.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
류동민 | 코난북스
03. 동물의 권리
반려동물을 끔찍하게 사랑하면서 육식을 즐기기도 하는 우리에게 건네는 이야기이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 그 조화로운 미래는 과연 무엇일지 생각해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동물의 권리와 육식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한다.
피터 싱어, 엘리자베스 드 퐁트네 외 | 이숲
04. 괜찮아
‘절망의 시대에 행복한 젊은이들’,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들었는가’. 근래 출간된 일련의 사회 과학 서적들의 제목들이다. 지금 여기, 결코 괜찮지 않은 순간을 버티고 있는 모두에게 보내는 찰나의 온기 같은 책이다.
명난희 | 6699press
05. WTWWorks That Work
WTW는 생활 속에서 예기치 않게 발견되는 창의적인 삶의 방식과 그로부터 파생된 디자인 양식을 소개하는 잡지이다. 여행길에 오르는 여행객이 직접 책을 배달하는 ‘소셜 디스트리뷰션Social Distribution’이라는 방식으로 전 세계 곳곳의 독립 서점에 책을 보내고 있다.
에디터 김건태
포토그래퍼 안선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