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사는 게 행복해요?

한국이 싫어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한국이 싫어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Are you happy
living
here?

여기서 사는 게 행복해요?

어떤 사람들은 한국이 싫어서, 한국엔 답이 없어서 여길 뜨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돈도 없고 희망도 없어도 나름대로 만족하면서 산다. 아니, 삶에 만족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만 같다. 언제나 세상은 이상했지만, 요즘처럼 이상한 때도 또 없는 것 같다.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읽었다. 주인공 ‘계나’는 20대 후반의 여자다. 그녀는 평범한, 아니 사실은 대한민국에서 버티기에는 가진 게 너무 없는 집의 세 딸 중 둘째로, 한국을 떠나기 전에는 금융회사에 다녔다. 계나는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월급이 따박따박 나온다는 데 안심하며 시키는 일을 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아현역에서 역삼역까지 신도림을 거쳐 매일 울면서 출퇴근을 했고(출퇴근 시간에 이 노선을 매일 타보면 누구라도 이민을 가고 싶어질 거다), 늘 지긋지긋한 김치찌개 아니면 된장찌개로 점심 메뉴를 통일해야 했다. 재미도 없는 일을 꾸역꾸역 하고, 때마다 구호를 외치며 정신교육을 받고, 회식 자리에서 팀장의 음담패설을 듣고, 회사가 어려워졌을 때는 곧 부도가 날 회사채와 어음도 팔았다. 그리고 노래방에서 팀장이 거북이의 ‘빙고’라는 노래를 목이 터지라 부르던 순간 계나는 생각했다.

중년 남자들이 ‘빙고’를 부르는 이유는 다들 너무 힘들어서 아닐까. 다들 이 땅이 너무 싫어서 몰래 이민을 고민하는 거지. 그걸 억지로 부정하고 자기 자신한테 최면을 걸고 싶은 거야.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어”라고,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라고. 그런데 이민을 가면 왜 안 되지?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 

–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중에서


요즘 20대와 30대 중에는 복지 시스템이 탄탄하고 삶의 질이 높은 선진국으로 이민을 떠나기 위해 ‘이민계’라는 것을 조직하는 이들도 있다던데, 아슬아슬하게 그 세대와 가는 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나는 그들의 심리가 궁금했다. 어쩌면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 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됐어? 내가 지금 “한국 사람들을 죽이자. 대사관에 불을 지르자.”고 선동하는 게 아니잖아? 무슨 불매운동을 벌이자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태극기 한 장 태우지 않아. 미국이 싫다는 미국 사람이나 일본이 부끄럽다는 일본 사람한테는 ‘개념 있다’며 고개 끄덕일 사람 꽤 되지 않나?

–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중에서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한국이 싫다, 사실은. 정치인들이 하는 짓을 보면 한숨이 다 나온다. 개발한답시고 전 국민이 땅을 칠만한 액수를 쓸어 넣어 멀쩡한 땅과 산과 바다와 강을 뒤집어엎는 걸 보면 열불이 뻗친다.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들 의식하고 남과 다른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는 문화도 싫고, 창의적 인재를 키우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실제로는 시키는 대로만 하라며 윽박지르는 학교도 회사도 싫다. 노는 건 죄다 돈 쓰는 일뿐이고 이게 유행이라면 이리로 우르르, 저게 뜬다면 저리로 우르르 몰려가는 작태도 꼴사납다. 길에서 부딪치거나 발을 밟아도 사과 한마디도 안 할뿐더러 아예 손으로 붙잡고 밀치는 것도 예사고, 낯선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면 일단 경계심에 눈을 번뜩이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그렇게 만드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싫다. 

사실 내 주변에도 할 수만 있다면 호주든 뉴질랜드든 어디든 떠나고 싶다는 사람이 많다. 아예 적극적으로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국을 떠날 생각이 없는 나는 잘난 척을 하며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행복이 없는데 거기라고 뭐가 다르겠어?”, “세상에 낙원 같은 건 없는 거야. 순진하긴. 쯧쯧.”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아이티나 필리핀의 빈민가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를. 얼마 전 TV에 나온 나보다 어린 필리핀 엄마는 온종일 쓰레기통을 뒤져 번 천원 남짓한 돈으로 다섯 아이를 먹여 살리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 아이티의 빈민들은 먹을 것이 없자 진흙을 이겨 구운 것으로 허기를 달랬다고 한다. 시리아 난민들이나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인생을 떠올려 보라. 그들의 운명과 나의 운명을 가른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국적밖에는 없다. 당장 우리 할아버지가 용단을 내려 전쟁통에 배를 타고 고향 함경도를 떠나기로 한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의 최소한 절반 정도는 환경이다. 누군가 그랬다. 신중현이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존 레넌처럼 세계 음악사에 길이 남을 아티스트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굳이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내가 복지 천국 스웨덴에서 태어났다면 한국에서 태어난 지금보다 더 행복한 여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내가 한국이 싫어 한국을 떠나겠다는 이들에게 “흥,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라고 하는 건, 용기없는 자의 질투심이거나 친구가 없어질 자의 두려움인 것이다.그런데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젊은 세대가 ‘나라가 싫으니 이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상황 말이다. 이들에게 사는 게 절망적이고 지옥 같은 것은 어른들이 얘기하는 것처럼(생각해보니 나도 어른이었네!) “요즘 젊은 애들은 근성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나라가 정말로 지옥으로 변하고 있어서일까. 

그게 궁금하던 차에 발견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이라는 책은 제목부터가 유혹적이었다. 일본의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쓴 이 책은 젊은 세대의 대다수가 비정규직 노동자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고 장차 나이 든 세대까지 책임져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사토리(득도) 세대’ 라 불릴 정도로 모든 것에 초연해진 이유를 파헤친다.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우선 일본의 젊은 세대가 현실에 저항하지 않고 이렇게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데 대한 의아한 시각에 이런 답을 내놓았다. “왜냐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아버지 세대처럼 뭔가를 이루어내겠다는 투지도,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야망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크게 바랄 것도 없이 Wii 게임기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 때때로 만날 수 있는 연인과 친구가 있는 정도의 사회성이면 이들에게는 충분하다는 것이다.현대 일본의 젊은이들은 경제 성장의 혜택을 충분히 받은 이전 세대를 ‘자신들과는 다르다’라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주변에서 행복을 찾고 동료들과 함께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며 지낸다. 이제 젊은이들은 무언가를 쟁취함으로써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 수 있던 시대와 선을 긋고, 작은 공동체 안에서 소소한 상호 승인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대에 적합하고, 또 현명한 삶의 방식이다. 예를 들어, 지금과 같은 시대에 ‘부자’를 삶의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는 영영 그것을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따라서 ‘넘버원’을 목표로 하는 레이스는 고될 뿐이다.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그런 경주에서 내려와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행복해지는 방법이기도 하다. 

– 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중에서


계나가 그린 지옥도에서 보듯,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 부르는 젊은이들이 등장한 것에서 보듯, 심지어 IS에 입대하겠다면서 중동으로 떠난 한 청소년의 예에서 보듯, 한국의 젊은 세대는 일본의 젊은 세대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있다. 사회학자 오찬호는 이 책의 서두에 붙인 해설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행복조차도 스펙으로 만들 정도로 절망적이라 평한다.

‘상황은 좋지만 열심히 일해라’ 라는 어처구니없는 강요는 정규직이 되기 위해 인턴으로 몇 개월을 버티고, 다음은 수습사원으로 몇 개월을 버티고, 다음은 비정규직으로 몇 년을 버텨야 하는 끔찍한 과정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누구도 이것을 문제라고 가르쳐 주지 않는다. 절망적인 상황을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현실에 만족하는 행복한 젊은이조차 등장할 수 없다. ‘나는 할 만큼 했다, 하지만 사회가 이 모양인데 더 이상 뭘 하겠어? 이제 내 행복, 나 스스로 찾겠어!’라는 행복한 젊은이들이 일본에 존재하는 이유는 그나마 자신을 사회적 관계 내의 피해자로 볼 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두 나라의 결정적 차이다. 그나마 일본은 한국에 비하면 유토피아였다. 부럽다. 

– 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오찬호의 해제 중에서

너 없이는 안 되겠다는 지명의 청혼을 받고 호주에서 오랜만에 돌아온 계나에게 한국은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고 또 편리한 곳이다. 프랜차이즈 외식업체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신메뉴가 출시된다. 배달 전문 마트에서는 전화만 하면 생수 한 통까지 배달해 준다.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청소 도우미 서비스는 파출부와는 급이 다른 신세계고, 주문한 음식을 30분 만에 가지고 온 배달원은 신용카드를 양손으로 받으며 90도 인사까지 깍듯하게 한다. 늦게까지 집 밖에서 진탕 마셔도 대리운전 기사를 부르면 되니 걱정할 것이 없다. 돈만 있으면 한국처럼 살기 편한 곳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은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가 지나치게 치열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영혼까지 바쳐가며 고객의 지갑을 열어야 하고, 또 누군가는 그런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밤낮도 주말도 없이 일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일해서 누릴 수 있는 대가는 고작해야 주말 백화점 나들이나 외식이다. 결국 우리가 이 사회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인생이라고 해봐야 고작 이 둘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착취당하는 인생, 일에 착취당하는 인생.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소박하게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그저 끝나지 않은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 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중에서


계나와는 달리, 나는 여전히 한국을 떠날 생각이 없다. 한국이 싫지만 나는 한국을 못 떠난다. 한국에서는 내가 호주나 스웨덴에서보다 행복해질 가능성이 적다고 해도 나는 여길 못 떠난다. 왜냐하면 내가 싫어하는 한국은 내가 태어나 살을 비비며 자라온 이 땅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눈 속에 박힌 뒷산의 능선과 살갗에 스민 변덕스러운 날씨가 한국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나 사회적인 것, 국호나 국적인 ‘대한민국’과는 별개의 장소로 그저 ‘내가 태어나 자라고 지금껏 살아온 곳’, 그러니까 그저 ‘여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가 좋다. 한국은 싫지만 ‘여기’가 좋다. 저물녘 골목을 걷다가 누구네 집에서 나는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끓이는 냄새에 행복해지곤 하는 ‘여기’가 좋다. 나쁜 기억도 좋은 기억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은 ‘여기’가 좋다. 이해할 여지가 더 많은 사람이 사는 ‘여기’가 좋다. 아직도 내가 알지 못하고 밟지 못한 곳이 많은 ‘여기’가 좋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련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나고 자란 곳과 관계없이 어디서든 잘 살아간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나는 아마 후자에 속할 것이다. 눈에 익은 능선의 모양을 더는 볼 수 없다는 것. 내 체취처럼 익숙한 냄새들을 더는 맡을 수 없다는 것.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말과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대화할 수 없다는 것. 내가 뼛속 깊이 이해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영원히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런 것들을 견디면서까지 행복을 찾아 떠날 정도로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다시 호주로 가던 날에는 지명이가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 줬어. 공항으로 가는 길에 지금 내가 왜 호주로 가는 걸까 생각해 봤어. 몇 년 전에 처음 호주로 갈 때에는 그 이유가 ‘한국이 싫어서’였는데, 이제는 아니야. 한국이야 어떻게 되든 괜찮아. 망하든 말든, 별 감정 없어…. 이제 내가 호주로 가는 건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야. 아직 행복해지는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호주에서라면 더 쉬울 거라는 직감이 들었어.

–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중에서


한국이 아무리 싫어서 한국을 떠나도, 한국은 아마 지구 끝까지 우리를 쫓아다닐 것이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곳이 없는, 떠나고 싶지는 않지만 떠나야 할 것 같은 한국 사람인 우리는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의 마지막에 적었던 대로, 왠지 행복하고, 왠지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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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현아

글 한수희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