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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더 작은 하루
나는 솔로다. 마지막 애인과 헤어지고 1048일이 지났다. 솔로 기간이 길어지는 이유는 내가 구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헤어진 날짜를 센다는 것 자체가 이미….) 대중목욕탕에서 샤워도 안 하고 탕에 들어간다거나 술값을 안 내려고 신발 끈을 다시 묶지는 않아도, 나라는 인간이 별로라는 증거는 곳곳에 널려 있다. 하루라도 빨리 덜 구려지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예전에 썸 타다 끝난 친구한테 그런 얘기를 들었다. “건태야, 너는 지금처럼 살면 나중에 아주 구려질 거 같아.” 그건 외모뿐만 아니라 나의 삶 전반에 대한 이야기였다. 흐지부지하게 끝난 관계에 던지는 저주처럼 들려서 그 애가 마녀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의 예언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방식으로 구려지는 나를 발견했다.
마녀의 첫째 예언은 몸속에서 일어났다. 언젠가부터 내 장기가 과도하게 가스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뿡, 점심 먹고 뿡, 자기 전에 뿡. 365일 방귀 대장이 된 기분이었다. 한번은 중요한 미팅 자리에서 신호가 왔다. 간신히 똥꼬에 힘을 주며 브리핑을 마쳤다. 질문을 받을 차례가 되어 사람들을 쳐다보는데, 불현듯 배 속에서 닭삑삑이 버튼이 눌렸다. 삐오오오오옹. ʻ아뿔싸,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는구나.’ 서라운드로 울리는 배 방귀에 모두가 침묵했다. “하하, 제가 공복이어서….” 헛소리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와중에도 장의 샤우팅은 멈추지 않았다. 삐옥-뾱-뾱. 폐결핵에 걸려도 담배를 피우고, 위산이 역류해도 꿱꿱거리며 양치질을 했으며, 간이 썩어 문드러져도 술만은 못 끊는다고 허세를 부리던 나지만, 배 방귀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문자 그대로 너무나 구린 몸이 된 것 같았다. (이런 글을 쓰면서 나는 민망해 죽을 것 같다.)
그다음 예언은 성격에서 드러났다. 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고 믿는 편인데, 일상을 살아갈 체력이 고갈된 나머지 짜증만 내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령 누군가 내 디젤 청바지를 뱅뱅과 혼동했을 때, 허락 없이 내 돈가스를 뺏어 먹었을 때, 노래방에서 내 순서 앞에 우선 예약을 입력했을 때, 나는 머릿속에서 그의 목을 조른다. 그리고 이렇게 윽박지른다. “내 가족은 건드려도 나는 건드리지 말라고!” 배터리 최대 성능이 73퍼센트에 불과한 내 아이폰8처럼 나는 이제 완충이 불가능한 구식 모델이 되어 인류 멸망을 꿈꾸는 것이다.
마지막은 점점 구려지는 감각이었다. 정확히는 해가 지날수록 일터에서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기획을 하고, 인터뷰와 글을 쓰고, 사진과 디자인을 다루는 업무에 자신감이 사라져갔다. 경력이 쌓일수록 숙련되는 장인(기술자)과 다르게 ʻ에디터’라는 직업에는 감각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적정 나이(전성기)가 있다고 여긴다. 기존의 해오던 것을 관성적으로 잘할 수는 있겠으나, 보다 예민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참신한 기획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힘은 ʻ젊음’ 그 자체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출한 프로젝트를 보거나 잘나가는 후배 에디터의 이름이 현장에 오르내릴 때마다 ʻ퇴물’이라는 단어를 생각한다. 은퇴하고 감독의 업무를 공부해야 할 나이에도 선수로 뛰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건 노욕이 아닐까? 더 잘할 수 있는 후배의 자리를 빼앗은 건 아닐까? 나는 왜 이리도 구릴까? 그냥 죽어버릴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결론적으로 마녀의 저주는 성공적으로 먹혀들었다. 나는 ʻ일못짜방, 일도 못하면서 자리만 차지하는 짜증 방귀 아저씨’가 됐다. (이런 줄임말을 쓰는 것부터가 문제라는 걸 알지만 멈출 수 없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방귀 대장 아저씨가 그냥저냥 구려진 채 살아갈 무렵, 전 썸녀가 결혼을 한다며 무려 청첩장을 보내왔다. 의도가 뭘까? 진짜 마녀 아니야? 한 가지 안도했던 건 상대 남자가 별로였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얼굴은 내가 낫지 않나?” 화장실 거울을 보며 삼류 오타쿠나 할 법한 대사를 중얼거리다가 순간 너무 비참해서 눈물이 났다. 한편으로는 이보다 더 구려질 수는 없을 테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바닥을 치면 올라가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ʻ복수를 하자, 개 멋있어지자.’ 그렇게 마음먹고 구글 캘린더를 만들었다. 불성실한 인간에게 연간 계획은 꿈같은 일이었으므로, 딱 1개월 치의 목표만 세우고 데일리로 해야 할 일들을 세분화했다.
데일리 목표 (주말 제외)
어휘 아침독서 50페이지,
밑줄 노트 만들어 기록
기획 출퇴근길 뉴스레터 구독 5개
몸짱 푸시업 100개
체력 주 2회 수영 강습
식단 매일 채소 한 가지 먹기
계획의 핵심은 이거다. ʻ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거창하게 시작할 것이 아니라 사소한 반복의 힘을 믿기로 했다. 하루가 한 달이 되었을 때 내가 달성해야 할 목표치 역시 놀라울 정도로 소소한 수준이었다.
한 달의 목표
독서 4권
창작 짧은 글쓰기 2편
운동 8회(체중 500g 감량)
음주 8회 미만
이런 반복을 1년째 하고 있다. 사실 내가 엄청나게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애인이 생긴 것도 아니고, 놀라운 기획을 하거나, 방귀가 획기적으로 줄어든 것도 아니다. 치밀하지 않은 계획 안에서도 나태하게 구는 날이 더 많았으니까…. 하지만 매일 캘린더의 체크리스트를 지울 때마다 작은 성취감을 느꼈다. 하루를 알차게 살아낸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자존감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존감 지옥에서 벗어났다고 진단한다.
고백컨대 나는 최대한 노력 없이 이루고 싶다. 노력하지 않아도 이룰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지 않아서 얻은 결과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지금 나는 매일 아주 작은 체크리스트를 지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하루를 살고 있다.
글·사진 김건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