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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여행
“주말 대구 여행. 신체 건강한 용자 구함. 꿀잼 보장.” 내 다급한 구인 공고에 친구들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 여름에 대구라고? 거긴 지금 끓고 있어.”, “여행이 아니라 수련을 가는 거야?” 여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들 같으니라고. 나는 친구들의 비아냥을 뒤로하고 혼자 동대구행 기차표를 예매했다.
계획은 완벽했다. 아침 기차를 타고 대구에 간 뒤, 대구 최고의 음식을 먹고, 대구 최고의 명소에 들르고, 대구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한 다음,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온다. 큰 틀만 짜고 디테일은 그때그때 결정하자는 게 이번 여행의 콘셉트였다. 사실 여행은 일정 부분의 불확실성을 보장해야 더 풍성해진다. 작정하고 간 여행에서는 딱 계획한 만큼만 누릴 수 있지만, 훗날 기억에 남는 건 의도치 않은 사건과 인연이라는 것. 내게 주어진 시간은 6시간뿐이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혹 누군가 “고작 한나절 만에 한 도시를 여행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나는 “명상도 30분이 넘어가면 사색이 아니라 수면”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뭐든 적당한 게 좋다.
기차는 서울역에서 정시에 출발했다. 아침 해의 방향을 고려해 좌석을 서향으로 예매한 것이 주효했다. KTX의 비싼 가격에 걸맞은 적당한 실내 온도와 잘 정화된 공기, 차창 너머 흘러가는 여름 숲의 풍경이 아련했다. 낯선 도시를 여행하며 내가 준비할 건 딱 하나였다. 이방인의 마음을 갖는 것. 어릴 적 부모를 따라 LA로 이민 갔다가 수십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모든 게 다 신기한 이민 2세처럼, 길거리의 표지판 하나, 사람들의 복식과 표정 하나하나를 새롭게 바라보는 것이다.
이방인이 처음 만난 대구의 인상은 온통 빛뿐이었다. 동대구 역사를 나와 광장에 섰을 때,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태양 광선에 시야가 아득해졌다. “여기는··· 천국인가?” 어떻게든 정신을 다잡아야 했다. 드넓은 동대구 초원 위에 길 잃은 영양처럼 두리번거리며 지하철역을 찾았고, 멀리 “자유와 활력이 넘치는 파워풀 대구”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걸린 입구를 발견했다. “파워ᄅ풀!” 하고 미국식으로 발음하자 오히려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대구 지하철은 심플했다. 다지류 수십 마리가 엉긴 듯 복잡하게 꼬인 서울의 지하철 노선도와 달리 세 노선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이었다. 지하철에 앉자마자 귀에 꽂은 에어팟을 빼버렸다. 음악 대신 현지인들의 대화를 듣고 싶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안내 방송 역시 서울과 같은 억양이었다. 왜 대구 지하철인데 서울말로 방송을 하는가? 왠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는 돈가스 가게였다. ‘대구를 대표하는 먹거리’를 찾아봤더니, 막창과 무침회, 뭉티기가 검색됐다. 하나같이 군침을 흘릴 만한 것들이었지만 점심 식사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내 기준에서 그것들은 술안주였다. 언젠가 술을 즐기지 않는 친구와 ‘회는 식사인가, 안주인가?’ 문제로 논쟁한 적이 있었다. 단 한 번도 술 없이 회를 먹어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의 발상이 신선했다. 친구를 따라 회를 반찬 삼아 먹어봤지만 영 적응이 되지 않았고, 반면에 친구는 광어회와 청하의 어울림을 깨닫고 훗날 술 없이 못 사는 몸이 됐다.
‘대구에서 제일 맛있는 돈가스 집’이라는 지극히 광고스러운 리뷰에 혹해서 달려간 곳은 오픈 전에도 대기가 길었다. 이렇게 대단한 곳에서 대기 명단에 인원 1을 적는 게 영 미안했지만, 친구가 없는 게 죄는 아니잖아···. 한참을 기다려 모둠 카츠를 주문했다. 정갈한 모둠 카츠를 먹으며 ‘나는 지금 대구 최고의 음식을 맛보는 중이야.’ 하고 되뇌었다. 사실 연남동에서 파는 돈가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맛이었다. 연남동의 돈가스 가게도 줄을 서는 걸 보면 어쩌면 이게 돈가스가 닿을 수 있는 궁극의 맛이려나 싶었다.
대구 돈가스를 먹고 대구 버스를 타고 닿은 곳은 ‘프롬티디에스’라는 이름의 편집숍이었다. 우연히 영상에서 본 그곳에는 작은 모퉁이마다 해가 머물고, 그 자리에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그곳에선 낯선 이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는데, 편지를 써서 보관함에 넣고 누군가가 쓴 편지를 받아 오는 식이었다. 단단한 책상 위에 작은 편지지 두 장과 잘 깎은 연필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곳에 앉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타인에게 편지를 썼다.
악필이지만 더듬더듬 편지를 쓰고 스티커로 봉인하고 편지함에 넣었다. 준비 없이 아무 말이나 뱉은 것이 못내 미안했지만, 모두가 멋진 편지를 받을 수는 없는 거니까.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만큼 사소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편지를 쓰며 되려 위로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조용한 카페에 앉아 익명의 편지를 열었다. 별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다. 인생의 지침이 될 만한 문장을 기대했는데 그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글씨가 예뻤기 때문에 버리지는 않기로 했다.
대구 제일의 돈가스를 먹고, 시답잖은 편지를 쓰고, 카페에 가서 망고 주스를 마시고, 헌책방에 들러《솔로몬의 보물》이라는 낡은 책을 구입한 뒤에도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대구의 자랑이라는 중화 비빔밥을 먹고, 하천을 산책하며 길고양이와 숨바꼭질했다. 바위 턱에 앉아 소다 맛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금세 녹아서 손이 잔뜩 끈적해졌다. “참, 별일이 다 있군.” 그렇게 혼잣말을 하는 사이 그림자는 길어지고,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시간에 맞춰 기차역으로 향했다. 한적하던 동대구역이 웬일인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대한민국 사람 절반이 그곳에 모인 듯했다. 상황판을 보니 모든 기차가 지연 상태였다. 대구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KTX가 철로를 벗어나 복구 중이라고 했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10분 뒤 출발 예정이던 나의 서울행 기차에도 ‘107분 지연’이라는 당황스러운 문구가 붙어 있었다.
나는 적당히 뭉갤 만한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때 출발하지 못해 잔뜩 화가 난 여행객과 그를 달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역무원, 매표소에 잔뜩 늘어서 환불을 원하는 여행자와 새치기하려고 눈치를 살피는 악당, 그 모든 상황을 중계하기 위해 출동한 취재 기자까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런 와중에 혼자 온 듯 보이는 여행객과 자꾸만 눈이 마주쳐서 살짝 설레었는데, 알고 보니 내 반대편의 텔레비전을 보는 거였다. 거기선 시골 산천을 배경으로 밥을 지어 먹는 예능이 나오고 있었다. 참으로 분주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2시간 30분이 지연된 기차는 자정 무렵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버스를 탔다. 차창 밖 곤히 잠든 서울의 밤을 바라보며 하루 동안 대구에서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 기억하려 했는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나의 여행을 말하기 위해선 먼저 그 여행에서 온전히 빠져나와야 한다. 그러므로 당장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거다. 나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가방 속 에어팟을 꺼냈다. 마침 데미안 라이스의 노래가 나왔고,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 노래를 자꾸만 자꾸만 반복해 들었다.
글·사진 김건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