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가진 장소들

고성호 — 건축가

부서지는 콘크리트들이 자아내는 소음 속에서 건축가 고성호는 부산을 유랑하며 대지로부터 탄생한 오래된 이야기를 찾아 나선다. 기장의 바다와 수영강, 금정산과 마주 보고 선 그의 공간에 들어서며 그곳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준비를 한다. 몇 개의 계단을 오른 뒤 곳곳을 누비고 나면, 좋은 대화를 나눈 것처럼 마음이 넉넉해진다.

창 너머로 펼쳐진 강변이 너무 멋있네요. 그간 여러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하셨지요. 이 사옥도 직접 설계하신 거죠? 

맞아요. 제가 설계를 맡았어요. 저희는 건축이 어떤 지역이나 도시의 색깔을 부여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저 물량 중심으로 만들어진, 표정 없는 건축물은 지양하려 하죠. 주로 맡는 프로젝트도 카페나 레스토랑처럼 많은 이들이 공유할 수 있는 상업 공간이고요. 공간 하나하나가 자기만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 그 지역이 조금 더 풍요로워지거든요. 그런 전반적인 부분들을 구상하고 감독하고 있지요. 

 

인터뷰하러 오면서 사옥 주변 풍경을 쭉 훑어봤거든요. 강변 너머엔 고층 아파트들이 “표정 없이” 나란히 서 있는데, 회사가 위치한 동네 쪽은 건물들이 상대적으로 낮더라고요. 

부산 하면 바다, 강, 산 같은 자연물이 대표적인데요. 건축물들이 자연환경을 지배하는 광경을 보면 권위적이다 못해 폭력적이라고 느껴요. 이제껏 부산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많이 작업했는데 지역 주변 환경을 살피며 맞춰서 진행했어요. 그게 원래 우리의 건축이기도 하고요. 옛날 한옥만 봐도 ‘안채’, ‘사랑채’, ‘행랑채’처럼 구역을 쪼개서 사용자들이 쓸 공간을 구분 지어 놓았잖아요. 아무리 넓은 면적을 차지하더라도 공간을 장악한다는 느낌이 별로 안 들어요. 오히려 자연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죠. 

 

그렇다면 사무실이 위치한 망미동은 어떤 환경을 품고 있나요? 

앞에 보이는 강이 수영강인데요. 부산의 대표적인 명산인 금정산이 발원지예요. 계곡물이 하천을 따라 내려오다 합쳐지면서 바다로 향해가는 거죠. 이 구역이 강과 바다가 만나는 자리이다 보니까 생태계가 풍부해요. 바다에 사는 생물과 강에 사는 생물이 사이좋게 공생하는 공간이죠. 

 

부산 하면 보통 바다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강 주변에 자리를 마련하신 거네요. 

강과 바다가 주는 느낌이 또 다르잖아요. 오래된 비유를 해보자면, 바다는 아버지 같고 강은 어머니처럼 느껴져요. 저희는 건축을 통해 따뜻한 공간을 만들고 싶어, 어머니의 너른 품을 닮은 이곳을 택했죠. 

 

위치 선정마저 자연과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이 엿보여요. 

저희가 하는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이기도 해요. 쉽게 풀어 말하자면 자연과 건축을 조합하여 공간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일인데요. 저희 건축 사무소는 설계부터 시공까지 시작과 끝을 함께하고 있어요. 보통 건축물을 짓고 난 뒤 ‘화장한다’고 말하는 단계를 거치며 조경을 조성하곤 해요. 구상할 때부터 자연물들이 기존 건축물들과 어떻게 화합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편이죠. 이 건물에도 중정에 식물을 가득 심어두었어요. 

 

푸릇푸릇하니 아름다워요. 그간 진행하신 프로젝트들을 살펴보면 마침표처럼 꽃과 나무를 심어두시더라고요. ‘행서재’에는 살구나무, ‘더팜 471’에는 철쭉을 심을 자리를 따로 마련해 두셨죠. 

땅을 다루는 일을 하다 보니 직접 삽을 들고 현장에 방문할 때도 많아요. 대지에서부터 시작되는 건축물을 설계하는 것이라 조경과 정원의 역할이 정말 중요해요. 

 

이전에 하신 인터뷰를 찾아보다가 건축이란 “땅의 지문”을 찾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에 밑줄을 그었어요.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이 마음에 와닿았거든요. 

건축물은 살아 있는 유기체이기도 해요. 공간과 사람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사람이 어떤 공간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사실은 공간이 사람을 만드는 것에 좀더 가까워요. 좋은 공간에서 좋은 영향을 받은 누군가가 또 다른 공간을 만들고요. 

 

어렴풋이 이해는 되는데… 조금 더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인문학적인 접근인데요. 건축이 존재하는 이유는 ‘내가 왜 존재해야 하느냐.’에 대한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어요. 건축물은 누군가의 인격을 만들어 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거든요. 그 말인즉슨 어떤 공간은 결국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공간이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라…. 

우리가 어떤 곳에 찾아가서 400년 된 건축물을 관람하잖아요. 그곳에 살았던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을 테고, 우리가 그들과 동시대에 산 것은 아니니 어떤 삶을 살았을지 정확히 알 수도, 들을 수도 없어요. 다만 대략 판단은 할 수 있겠죠. 이 사람은 가족이 많았나 보네, 되게 검소한 사람이네, 조금 괴팍했나 보네. 그런 사소한 정체성을 건축물을 보며 상상하게 되거든요. 공간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누군가를 만나서 그 사람 공간에 방문을 해보면 한 사람의 삶이 정말 고스란히 느껴져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제가 받은 인상이 딱 들어맞을 때도 많고요. 정말 신기한 일이죠.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제 공간은 어땠는지 조금 되돌아보게 되네요(웃음). 공간에는 여러 요소가 존재하지요.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요? 

일하시는 분들께 이 질문을 하면 다들 다르게 답을 하더라고요. 구조 쪽을 담당하는 사람,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 디자인을 구상하는 사람마다 다 자기가 맡은 부분이 핵심이라고 말하죠. 들어보면 다 맞는 말 같아요. 어떤 빌딩을 무척이나 아름답게 만들었는데, 비가 새거나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우면 그게 제대로 된 건축이겠어요? 그렇다고 해서 미적인 요소를 놓칠 수는 없겠죠. 그러니 건축가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모든 부분을 살펴야 해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를 한데 모아두고 협주를 한다고 생각해 봐요. 그들이 각자 이야기에 심취해 연주하면 아무리 좋은 연주도 듣기 싫은 소음이 되고야 말겠죠. 각 부분이 완성도가 높더라도 조화가 되질 않으면 좋은 건축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무엇 하나 튀지 않게끔 조직화되어야 해요. 

 

소통의 문제처럼 여겨지네요. 건물 하나를 지을 때도 다양한 사람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일도 중요하겠어요. 

건축물은 대부분 클라이언트 의뢰를 받아서 제한된 예산과 공간 내에서 최선의 결과물을 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도 수용해야 해요. 건축가의 고집만 있어서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이끌기 어렵죠. 근데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해요. 그 공간을 이용하는 구성원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다를 거 아니에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요구 조건을 전문가가 가진 지식을 가지고 설득하는 과정이 건축 행위거든요. 

 

“나는 경계에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그 맥락과 같은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네요. 

맞아요. 어떤 경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해야 하는 일이에요.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적용한다고 해서 제 색깔이 안 나타나는 것은 아닌데요. 그럼에도 건물을 다 짓고 나서 결과물을 보면 의뢰한 분들과 너무나도 닮아 있죠. 그럴 때 오는 희열감이 정말 커요. 

 

건축 요소에 관한 이야기를 더 나눠보고 싶은데요. 인터뷰 전에 이흥용 명장과 협업하여 유명해진 ‘칠암사계’를 다녀왔는데, 유달리 창문이 눈에 띄었어요. 상업 공간이 성공하려면 사람들을 사로잡을 만한 뷰View가 필수인 것 같아요. 

뷰도 중요하지만 내가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에 무게를 둬야 해요. 꼭 보여줘야 하는 공간은 넓게 보여주고, 어떤 공간은 좁게 보여주는 식으로 말이죠. 

 

다른 상업 공간은 메인 창을 통해 사용자의 시야를 고정하는 반면에, 건물 이곳저곳에 큰 창을 두고 사용자들이 원하는 공간의 장면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선택지를 마련해 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칠암사계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공간에 ‘칠암의 사계’를 담아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동서남북으로 창을 냈죠. 무조건 바다를 보여주는 데에만 급급하지 않고, 동서남북의 풍경이 변하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길 바랐어요. ‘가든 하우스’에는 낮은 담장과 골목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곳곳에 작은 창을 냈고요. 메인 창은 중정을 담아내고 있죠. 넓게 조망할 수 있게끔 통유리를 썼고요. 각각의 창문이 자기 장소에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도록 설계했죠. 

 

안 그래도 말씀하신 가든 하우스에 머무르다 왔는데 마침 그 시간에 비가 내렸거든요. 잘 꾸려진 정원 위로 비가 들이치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웠어요. 와중에 뒤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 시끄럽게 떠들고(웃음). 

주말에 다녀오신 거죠? 자리 잡기 어려울 때 가셨네(웃음). 

 

공간 안에 꽉꽉 들어찬 사람들을 보다 문득 궁금해졌는데요. 처음 의뢰를 받았을 때, 수용 인원을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런 상업 공간은 많은 사람이 찾아올 걸 염두에 둬야 할 것 같아요. 

처음에 칠암사계를 지을 때 저랑 명장님이 공통으로 했던 생각은요, 공간에 충분한 여유가 있길 바랐어요. 현대인들이 살아가면서 과도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잖아요. 이곳을 찾아 맛있는 빵을 먹고 좋은 공간을 누리면서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많이 오시더라고요. 저희는 1년에 30-40만 정도를 목표 인원으로 삼고 좌석 수나 화장실 칸 수, 주방의 기능적인 부분들을 만들어 두었는데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오니까 예측에서 벗어나게 된 거죠. 그렇다고 해서 운영자 입장에선 오지 말라고 막을 수도 없는 거고요. 어렵게 걸음 하셨을지도 모르는데 돌려보내는 게 쉽진 않거든요.

딜레마네요. 공간의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느끼는 순간은 공간을 가득 채우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난 뒤잖아요. 그런데 또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공간은 실패한 공간이나 다름없을 테고요. 

상업 공간이 그런 지점이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수도원 같은 곳은 공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끔 정해진 인원만 받잖아요. 그런데 상업 공간은 그런 조절이 쉽지 않아요. 대신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을 때 소음을 줄일 방법을 고민하는 거죠. 공간을 분리해 둔다든가, 어떤 특정한 공간에서는 음악을 틀지 않는다든가. 사람들 떠드는 소리도 듣기 힘든데, 음악까지 시끄러우면 더 정신없잖아요. 그 외에도 화장실 칸 수도 최대한 늘리려고 해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거기까지죠. 

 

화장실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정말 넓고 좋더라고요. 안에 멋진 테이블 하나가 있던데요. 

거기서 빵 먹으라고 둔 건 아니고요(웃음). 저희는 상업 공간을 지을 때 화장실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런 이야기도 해요. “화장실에서 잘 수 있게끔 만들어라.” 상업 시설에서 화장실은 매출이 일어나는 공간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그 공간을 얼마나 세심히 매만졌느냐에 따라서 고객들에겐 배려로 다가올 수도 있겠죠. 주차장이나 화장실 혹은 쓰레기 버리는 곳처럼 사소한 공간에서도 우리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거예요. ‘여기까지 이 정도로 신경 썼으니, 주방도 정말 깨끗할 거야.’ 하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거죠. 그게 현수막에 ‘우리는 고객을 사랑합니다’라고 거는 것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해요. 다음에는 화장실에 침대를 하나 가져다 둘까 고민 중입니다(웃음). 

 

(웃음) 최근에 진행한 ‘선유도원’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선유도원은 선동에 있어요. 신선 선仙 자를 쓰죠. 풀어보면 신선이 사는 동네라는 의미인데요. 지역명을 네 글자로 풀어서 이름을 지었죠. 신선이 유유자적 거닐던 곳, ‘선유도원’이라고요. 

 

상상할 여지가 많은 이름이네요. 

직접 가보면 정말 신선이 살 것만 같거든요. 동네에 회동수원지라는 저수지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데,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면 무척이나 영험해 보여요. 만약 상상 속의 존재가 진짜로 있다면 이런 공간에서 살지 않았을까, 이쯤에 자리를 잡고서 차를 마시지 않았을까. 책을 엎어 놓은 공간에서 풍경을 누리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게 되더라고요. 신선들이 복숭아를 즐겨 먹었다고들 하잖아요. 근처에는 복숭아나무처럼 진한 분홍색 꽃이 피는 박태기나무도 심어두었어요. 현대판 무릉도원을 만들고 싶었죠. 되게 조용한 동네이다 보니까 차 한 잔을 시켜 두고 앉아 있으면 꼭 명상하는 기분이 들어요.

동네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건축가님의 시선이 남다른 것 같아요. 잠재되어 있던 가능성을 끌어내려는 하나의 시도처럼 느껴져요. 

어떤 상업 공간 하나에서 탄생한 마침표가 그 지역을 다시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하거든요. 그게 일종의 마중물 역할을 하는 거예요. 메마른 우물의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 펌프에 물을 한 바가지 붓듯, 건축물이 지역에 관해 다시금 고찰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거죠. 지역민들도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이 어떤 곳인지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겠죠. 그로부터 삶의 질이 높은 장소가 탄생할 수도 있을 테고요. 특히 칠암사계는 주변이 죄다 영업장인데요. 고향을 떠났던 자녀들이 잠잠하던 어촌 마을에 다시 돌아와서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들려와요. 어느 한 공간이 부흥하면, 자연스레 주변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시너지를 내는 거죠. 

 

무엇보다 공간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 한몫하지 않나 싶어요. 시간이 지나 어떤 장소로 돌아갔을 때 너무 상업화되어 있으면 나의 추억마저도 함께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기 마련이죠. 

기억에 남는 일화가 하나 있어요. 그 근처에 예술 고등학교가 두 군데 있는데요. 졸업생으로 추정되는 학생이 카페에 들렀다 SNS에 후기를 남겨둔 것을 보았어요. 예전에 학교 담을 넘고 활보하던 동네의 풍경들, 호숫가에서 물수제비 뜨면서 뛰어놀던 기억을 적어두었더라고요. 잊힌 기억을 선유도원이라는 장소를 통해서 한 번 더 길어 올려본 거죠. 사실 스트레스에 지친 현대인들을 살아가게 만드는 동력은 그런 소소한 추억들이거든요. 공간을 기억의 저장소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곳은 다시 찾아갈 수밖에 없어요. 

 

건축가님이 맡으신 공간들은 지역민과 타지인 모두의 기억을 품은 장소가 되었네요. 그렇다면 건축가님이 바라본 부산이란 도시는 어떤 곳일지도 궁금해요. 

저는 전 세계 도시들이 대부분 비슷한 생김새를 지녔다고 생각하는데요. 그중에서도 부산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이야기해 보자면, 여유가 아닐까 싶어요.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부산에는 여유가 있다고. 

맞아요, 상대적으로 그런 것 같아요. 서울보다는 밀도가 낮다 보니까 경쟁이 치열하지 않죠. 여유가 있다는 것은 도시 차원에서 보면 생산성이 좀 떨어지는 문제일 수도 있어요. 주거비도 그렇고 여러모로 물가가 조금 낮으니까 빡빡하게 살지 않아도 어떻게든 돌아가는 구조긴 해요. 상상해 보세요. 좁은 공간에 닭을 열 마리 풀어놓았다면, 그 친구들은 먹이를 더 많이 차지하려고 경쟁을 하겠죠. 빨리 일어나서, 더 많이 돌아다녀야지 자기 몫을 획득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스트레스도 많을 테고요. 장소가 서너 배 정도 더 크면 굳이 남의 걸 뺏어 먹지 않아도 내 분량은 이미 확보가 된 거잖아요.

그렇네요. 서울에서는 더 좋은 위치를 차지하려고 끊임없이 차별화를 해야 하거든요. 무엇보다도 발 닿는 거리에 너른 산과 바다가 있다는 점도 한몫할 것 같아요. 

자연물 덕택도 있죠. 다만 건축물들이 그런 풍경을 많이 해치고 있어요. 지역 특색에 맞게 개발되면 좋을 텐데, 쉽지 않죠. 바다나 강을 면한 지역은 조망권을 해치지 않게 가이드라인을 확실히 정해야 하거든요.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에게 동등한 혜택을 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바다 가까이에 위치한 건물들이 어느 기준 이상으로 높게 올라가 버리는 순간, 공간은 그들 소유가 되어버리고 말아요. 이 부분은 정책이나 법으로 규정해야 맞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질 못했죠. 

 

개인 차원에서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인가요? 

이건 시간이 조금 지나야 해결될 것 같아요. 우선 사적으로 공간을 소유한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변해야겠죠. 건축물은 지어지는 순간 공공재이기도 해요. 많은 사람이 이용하고 보게 되니까요. 그러니 도시와 잘 어울리는 공간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잘 안 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오래된 역사를 가진 민족이지만, 전통적인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내려왔다면 지금쯤 부산은 ‘부산다운’ 건축물이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 해운대만 봐도 건축물 소재나 디자인 등이 서울이랑 크게 다를 바가 없죠. 참 안타까워요. 

 

건축을 바라보는 관점과 아름다움에 대한 견해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건축가님이 생각하는 좋은 건축이란 무엇일까요? 

선순환을 갖는 장소요. 그러니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공간과 장소를 만드는 일이 저한테는 아주 큰 의미예요. 저는 동네의 모든 공간이 상생할 수 있도록 책임지고 좋은 건축물을 지으려고 해요. 그렇게 되면 이 옆에 무언가를 짓는 건축가들은 ‘나는 여기보다 더 잘 지어야 되겠다.’고 마음먹을 수밖에 없거든요. 아름답다는 도시들을 가보면 잘 지어진 건축물들을 중심으로 주변이 형성된 걸 볼 수가 있어요. 그런 공간들은 우리나라 아파트처럼 재개발한다는 명목 아래 부술 수가 없는 거죠. 정성과 공이 들어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도시를 이야기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정체성이 살아 있거든요. 그 하나가 없어지면 오스트리아가 사라지고, 로마라는 곳이 품은 이야기가 사라져 버리는 셈이나 다름없죠. 결국 건축물들은 도시의 정체성과 색깔을 덧입히는 셈이에요. 그렇게 잘 지어진 수많은 공간들이 모여 도시가 만들어지고 지역이 만들어지는 거죠. 무엇이든지 다 그렇게 시작돼요. 그게 건축가가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영향력이고요.

ⓒ PDM Partners

1. THE FARM 471

하마마을은 골짜기에 양귀비가 흐드러지게 피고 지는 마을이었다. 이제는 그 흔적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적홍’의 잔영만은 전해주고 싶었다. 지난 한겨울의 추위를 겪어보니, 무언가 따뜻한 온기 하나쯤은 심어줘야겠다는 발상도 하게 되었다. 채의 분리와 면의 분할은 자연의 산봉우리들이 중첩되며 하나 됨으로 보였으면 하는 게 소박한 바람이었다. 아래 심은 철쭉 또한 아직도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한 마지막 연정이다.

A. 부산 금정구 하마2길 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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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칠암사계

일상을 뒤로한 채 건물 너머 들리는 파도 소리와 나뭇잎 바람에 부딪쳐 내는 소리를 느끼고 냄새 맡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거운 장소가 된다. 중정의 싱그러운 이끼와 수목들 사이를 천천히 돌아보며 바쁘게 살면서 잊고 있던 무언가를 한 번쯤은 뒤돌아보기를, 천천히 걷기를, 산책하며 얻는 쉼과 휴식을 통해 이곳이 잊지 못할 마음의 성소가 되길 고대하였다.

A. 부산 기장군 일광면 칠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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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유도원

고유의 장소성과 지역성, 현재의 시대성과 미래의 가변성을 고심하며 조금은 덜고 조금은 더해서 공간을 구성했다. 어떻게 하면 산세와 물을 끌어 올릴 수 있나 고민한 끝에, 세 채에서 보이는 각각의 근경과 중경, 원경의 차경을 브릿지를 통해 연결하여 여러 단으로 나뉜 지형과 다섯 개의 정원을 통해 공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했다.

A. 부산 금정구 상현로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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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오은재

포토그래퍼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