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박온도 — 아키비스트
아키비스트 박온도의 일상은 평범하게 흘러간다. 일주일 중 5일은 남편과 함께 작업실로 출근하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반려견 지구와 산책을 나선다. 밥을 차려 먹고, 다도를 하며 몸과 마음을 다스린다. 그 사이사이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은 모두 기록이 되었다. 그만의 시선으로 해석되어 글과 사진, 영상으로 남겨졌다. 습관처럼 쌓아온 기록 덕분에 평범한 날들이 고유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그에게 기록은 자신과의 내밀한 만남을 넘어 그림을 그리는 남편의 작업을 말없이 지지하는 일로 이어졌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후의 해가 한가득 들어오는 아늑한 집이네요.
그렇죠? 이 시간이 되면 아래층 소파가 놓인 공간과 위층 테이블이 있는 쪽으로 따뜻한 빛이 들어와요. 원래 아래층에 별다른 게 없었는데, 살다 보니 너무 인위적으로 느껴져서 얼마 전 구조를 좀 바꿨어요. 잘 보지는 않지만 TV도 걸어두고요. 이제 조금 사람 사는 공간 같아요(웃음).
온도라는 이름 때문에 차분하고 다정한 분일 거라고 짐작 했는데, 직접 뵈니 밝고 씩씩한 인상도 함께 풍겨와요. 본명이 아닌 걸로 아는데, 어떻게 지은 이름이에요?
SNS나 온라인상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을 잘 지어두고 싶었어요. 평소 지향하고 좋아하는 것들에 어울리는 단어가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온도’가 떠올랐어요. 온도는 따뜻하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잖아요. 저는 자연스러운 조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데, 그걸 한 단어로 표현하기에 알맞은 단어인 것 같더라고요. 그때 생긴 별명이 이름처럼 불리게 됐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어요.
온도 씨가 이번 호 주제에 꼭 맞는 인터뷰이라고 생각 했어요. SNS, 유튜브 등 공개된 것만 보더라도 꽤 오래전 부터 계속해서 뭔가를 남겨왔더라고요.
기록하고 정리하고 편집하는 건 늘 좋아했어요. 무언가를 보거나 느낄 때 그냥 지나가게 두지 않고 제 언어로 남기고 싶어 했고, 어디에든 어떤 방식으로든 생각을 표출하고 공유하는 게 즐거웠어요. 사람들과 길게 대화 나누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마 같은 이유인 것 같아요. 어릴 때 일기를 꼬박꼬박 쓰거나 얌전히 앉아서 책만 보는 아이는 아니었어요. <반올림>을 정말 좋아했는데, 그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들이 꼭 겉면이 가죽으로 된 다이어리 들고 다니잖아요. 너무 멋져 보여서 문구점에서 가죽 노트나 수첩을 사서 거기에 카드를 꽂고 다녔어요. 하나도 쓰지도 않으면서요(웃음). 싸이월드도 그렇고, 제가 가진 기질과 시대의 유행이 맞아떨어져서 더 재미를 붙이게 된 것 같아요.
글, 사진, 영상 등 다방면으로 일상과 단상을 담는데요. 어느 기록물에서든 ‘자연스럽다’, ‘꾸밈없다’는 인상이 가장 크게 남아요.
20대 때, 친구가 저를 “자연스러움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어요. 무의식중에 말하고 행동하니 잘 몰랐는데 그 말을 듣고 깨닫게 됐어요. 너무 맞는 말 같아서 막 웃었죠. 스스로도 주변 환경도 세월의 흔적이 묻은 것들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본능적으로 이끌려요. 그렇다고 무조건 오래된 것만 찾아다니는 건 아니지만, 사람이든 물건이든 새롭게 만나게 되면 곁에 두고 손때가 타게 해요. 그러면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제가 자연을 좋아하거든요. 자연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처럼 가식 없고 꾸밈없고, 그래서 어떤 의도 없이 존재하는 것이 좋아요. 그렇게 살고 싶기도 하고요.
최근 SNS 피드에 “요즘에는 집착처럼 틈만 나면 일기를 쓰고 있다.”고 했죠.
요즘 문득 느낀 건데, 가만히 있어도 바깥에서 들어오는 정보가 너무 많은 시대이다 보니 스스로 내면을 돌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더라고요. 저 역시 그 시간을 놓치고 있었고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평소보다 더 자주 제 안에 있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어요.
누군가는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누군가는 특별한 날을 잊지 않기 위해 일기를 쓸 텐데요. 온도 씨는 언제 일기장을 펼치나요?
제 노트는 일기장보다는 불렛저널에 가까워요. 몇 년 전부터 불렛저널 형식을 빌려 매일의 업무 일지와 개인적인 활동을 기록하고 있어요. 그날 느낀 것들을 짧게 쓸 때도 있고, 종종 감정을 해소하고 싶은 날에는 생각나는 대로 긴 글을 써요. 좋은 글이나 영감이 된 것들을 옮기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생겼을 때는 포토 프린터로 사진을 인쇄해서 붙이기도 해요. 용도를 따로 나누지 않고 한 권에 쓰기 때문에 페이지마다 기록 형태가 다르죠. 일반적인 불렛저널처럼 기호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쓰고 싶은 만큼, 쓰고 싶은 대로 쓰고 표시해 둘 부분은 제가 알아볼 수 있도록 형광펜별로 고정값을 두고 칠해 둬요. 밖에 나갈 때는 작은 메모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때그때 생각들을 적어두고 나중에 노트에 다시 옮겨요. 재미있는 건 며칠 전에 쓴 메모를 옮기려고 하다가 그때와 생각이 달라져서 내용을 조금 바꾼다거나 아예 생략하기도 한다는 거예요. 고작 며칠 사이에 꼭 남기고 싶었던 생각이나 감정이 달라지고 사라진다는 게 참 묘해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는 말을 체감하고 있네요.
드라마 <안나>에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씁니다.”라는 대사가 나와요. 그 대사를 듣자마자 ‘혹시 나도 그런가?’ 하면서 약간 흠칫했어요. 저는 일기 쓸 때만큼은 솔직해지려고 부단히 노력하거든요. 굳이 쓰지 않아도 될 내용은 생략하기도 하지만, 종이 위에 새기는 모든 텍스트에는 거짓이 없기를 바라요. 내 감정과 상태, 생각을 자유롭게 쓰다 보면 어느 순간 객관적으로 자신을 분석할 수 있게 돼요. 안 좋았던 기억을 곱씹으면서 왜 그랬는지 명확히 짚어내고 앞으로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생각하는 시간도 생기고요. 만약 제 일기를 타인이 보게 된다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길이 없겠지만, 전 알잖아요.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일은 진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나간 기록을 다시 들춰 보기도 하나요?
무조건 다시 봐요, 무조건(웃음). 지난 기록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분들도 있다고 하는데 저는 루틴하게 돌아보는 편이에요. 일단 월요일마다 지난 일주일을 돌아보면서 그간의 업무 일지를 데이터화해 놓고, 한 달, 상반기, 하반기, 1년 단위로 훑어보면서 그동안 나한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올해는 어떻게 살았는지 되짚어봐요. 좋았던 일도 있고, 잊고 싶은 일도 있지만, 그 모든 게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자양분이 된다고 믿어요. 지난날의 나에게서 무언가를 깨닫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고, 스스로 돌보는 일과도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더 기꺼이 돌아보게 돼요.
온도 씨의 기록 안에는 유독 걷는 장면이 많아요. 평범한 날에도, 여행을 떠나서도 걷고 또 걷더라고요.
저한테 걷는 시간은 무엇이든 바라보고, 경험하고, 느끼고, 그것에 집중하는 시간이에요. 처음 가보는 동네를 산책하거나 여행지를 탐방하는 것도 다 걷는 행위를 기본으로 하잖아요. 다리가 움직이는 것뿐인데 시야는 초마다 바뀌고, 저는 계속해서 비슷한 듯 새로운 풍경들을 눈에 담아요.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혼자일 때는 내 기분과 시선에 집중하고 사색할 수 있으니 좋고, 누군가와 함께라면 이야기가 풍부해지니 또 좋죠. 원래도 걷기를 즐기지만, 요즘은 반려견 지구 때문에라도 무조건 하루에 두 번씩 산책을 해요. 지구가 없었다면 안 걸었을 날씨에, 못 걸었을 거리를 걷게 되니 저의 산책 바운더리도 넓어졌어요. 조금 힘든 날도 있지만 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나서요.
이야기 나온 김에 지구를 소개해 줄래요?
지구는 이제 네 살이 좀 넘은 남자아이예요. 파주에서 한 번에 150여 마리를 구조하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그때 구조된 어미의 아이였어요. 늘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했고 이왕이면 유기견을 데려오고 싶어서 알아보다가 지구의 프로필 사진을 보게 됐어요. 두 귀가 다 접혀서 해맑게 웃는 얼굴이 너무 귀여운 거예요. 곧장 가서 데리고 왔어요. 아까 들어오실 때 많이 짖었잖아요. 예민하고 겁이 많아서 그래요. 사람들한테 주목받는 거 싫어하고, 낯선 장소도 싫어해요. 좀 고양이 같은 면이 있어요. 아는 척 안 하고 저희끼리 대화하면 먼저 다가올 거예요.
오, 맞아요. 아까 테이블 아래로 와서 제 손 냄새를 맡고 갔어요(웃음).
산책할 때 어떤 계절, 어떤 동네 좋아해요? 종로 일대를 다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서촌을 제일 좋아해요. 서촌에서부터 광화문, 삼청동, 인사동, 종묘 거리까지 한국적이고 예술적이면서도 우리나라의 현재를 가장 잘 들여다볼 수 있는 곳들이 쭉 이어지잖아요. 고층 건물이 없으니 눈을 돌리면 인왕산과 북악산이 훤히 보이고요. 산세와 어우러지는 경복궁, 광화문 광장, 현대식 건물과 한옥이 이질감 없이 어우러지는 모습이 너무 멋져요. 밤이 늦어도 위험하지 않아서 꽤 오래전부터 혼자서 정말 자주 걸었어요. 최고로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에서 가을로 바뀌었어요. 한 해가 저물기 전에 찬란한 빛을 내는 단풍들이 너무 아름다워서요. 가을에 입는 옷들도 좋아하고요. 계절을 만끽하러 자주 나가야 하는데 점점 짧아지기만 하니까 마음도 몸도 바빠요.
유튜브에 간간이 여행 브이로그도 올리죠? 여행지도, 복장도 확실히 자기만의 방식이 있는 것 같았어요.
고유한 히스토리가 있는 곳을 좋아해요. 평소 궁금했던 지역으로 여행을 가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나 유명한 문화재를 찾아 꼭 들르는 편이에요. 그리고 주변을 탐색하면서 그 지역이나 나라의 자연과 일상을 최대한 느껴보려고 해요. 현지의 일상을 경험하기엔 카페만큼 좋은 답이 없다고 생각해서 한, 두시간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요. 사람들의 소음을 귀에 담고 일기를 쓰기도 하죠. 관찰 노트는 아니고, 그 공간에 잠시 속해보는 경험을 하는 거예요. 복장은… 이미 여러 번 나온 단어인 것 같은데 최대한 ‘자연스럽게’ 입어요(웃음). 어디를 가든 두 손과 발에 최대한 자유를 주는 아이템을 골라요. 그래야 더 잘 즐길 수 있고, 사실 예쁘게 꾸민다고 한들 몇 시간 못 가서 흐트러지더라고요. 가방은 크로스백이나 백팩을 메고, 얇은 스카프와 선글라스, 작은 텀블러를 챙겨요. 리스트만 나열하면 언제나 하이킹하는 사람의 복장 같지만, 그래도 때와 장소에 따라 복장을 맞추기는 해요(웃음).
화면 너머의 온도 씨 부부와 지구의 일상은 참 단란하고 평화로워 보여요. 두 사람이 비슷한 결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요.
연애할 땐 남편과 비슷한 게 정말 많다고 생각했는데, 결혼하고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어느 순간 정말 다른 사람이라는 걸 느꼈어요. 남편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반응 속도도 빠른 편이고요. 일상의 많은 부분에서 무언가를 고민하고, 필요하다면 변화하고 움직이는 사람이죠. 반면에 저는 원래 있던 것을 유지하기를 좋아해요. 대체적으로 한번 마음먹은 일은 후회하지 않을 때까지 해봐야 하고, 새로운 것에 크게 흥미를 가지는 편은 아니에요. 그래서 가끔씩 새로운 결정을 해야 할 때면 조율할 일이 생겨요. 다행히 서로의 성향을 존중하기 때문에 별 탈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요. 다른 점이 아홉 가지, 닮은 점은 한 가지 정도 될까요? 그런데 그 한 가지가 너무 크고 서로한테 가장 중요한 부분이어서 남들 눈에는 전체적으로 비슷해 보이나 봐요.
그 한 가지가 뭘까요?
글쎄요.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려워요. 내면에 있는 무엇인데….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는 점이 닮았어요. 저희가 처음 만난 게 남편의 첫 개인전 때였는데, 주제가 ‘자연스러운, 너무나 자연스러운’이었거든요. 관람하는 내내 나와 비슷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 여기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삶을 대하는 태도나 나아가려고 하는 방향도 닮았고요.
남편인 우병윤 작가의 작업을 기록하는 아키비스트로 일하고 있잖아요. 전부터 관련된 일을 했던 거예요?
아뇨.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다양한 일을 했어요. 첫 직장이 은행이었는데, 사진과를 가려고 준비하다가 선생님 권유로 은행에 입사 지원을 하고 들어가게 됐죠. 그런데 해보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어요. 너무 어린 나이에 꿈을 펼칠 기회도 없이 직장을 다니게 돼서 그랬던 것 같아요. 3년 정도 다니고 서울로 올라왔고, 옷을 좋아해서 의류 브랜드에서도 일해보고 또 가장 최근까지는 바리스타로 일했어요. 커피도 좋아하거든요. 3, 4년 주기로 직종을 바꿔가며 계속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찾아다녔어요. 엄청나게 진취적인 편도 아니지만 내면에 도전 정신이 있나 봐요. 궁금한 게 생기면 꼭 해보거든요.
직장 생활을 오래 했군요. 그럼 이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예요?
마지막 직장을 그만 둘 때가 딱 서른이었는데요. 이 일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다니던 직장에서도, 주변 사람들도 많이 말렸어요. 지금은 좋겠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너무 어려운 길 아니겠냐고요. 남편과 함께 일하면 따로 돈이 들어오는 게 아니니까 저 역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걱정이 컸죠. 아키비스트가 되기로 결심한 건 남편 덕이에요. 저는 일상 속에서 기록하는 게 습관 같은 사람이거든요. 남편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그냥 자연스럽게 이 사람을 담고, 기록하고, 공유하기를 좋아했던 건데, 그 기록에 대한 가치를 존중해 줬어요. 앞으로는 더 마음껏, 네가 기록하고 싶은 만큼 해보라고 용기를 줬죠. 그렇게 기회가 생겼고, 남편의 작업을 아카이빙하면서 매니저 역할도 겸하게 됐어요. 정확히 11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는데, 안정적인 생활에서 벗어난다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확신이 있었어요.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때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선택이라는 확신이요.
흔히 볼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서 혼자 고민하는 시간도 많았겠어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같아요. 다만, 분명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 일임에도 불안한 지점이 있죠. 무언가를 만들어서 노출시키고 소비하기 바쁜 시대잖아요. 그런데 기록이라는 건 이미 완료된 일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는 건 아닌지 고민스러운 순간이 종종 왔어요. 저는 우병윤 작가 한 사람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보관하고 있지만, 보편적으로 아키비스트는 훨씬 큰 규모를 다루니까 내 직업을 정말 아키비스트라고 소개해도 되는지에 대한 부담감과 의문도 들었어요. 고민을 나눌 동료가 없으니 외롭기도 했고요. 그럴 때마다 쌓여가는 데이터를 보며 잘하고 있다고 주문을 걸어왔고, 요즘은 이 일을 더 체계적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전문적인 강의나 강연이 있으면 들어보고 싶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정리하고 기록하는지 배우고 공부하고 싶어요.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궁금해요.
크게는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기록, 두 가지로 대분류를 해요. 과거의 기록은 남편이 작가로서 쌓아둔 작가 노트, 영감을 받은 것들, 제가 보기에 남편이 화가로서 좋아하는 것들과 활동 기간에 생긴 사진, 홍보물, 인터뷰 등 모든 자료를 아울러요. 작가로서의 전체적인 흔적들을 모아서 차곡차곡 쌓아두고 정리하죠. 더 필요한 데이터가 있을 때는 보충해서 채워넣고요. 현재의 기록도 비슷한데요. 바로 지금, 작업하는 순간과 작업을 위해 하고 있는 생각들 그리고 진행 중인 전시나 작품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요. 남편은 최선을 다해서 작업하고 저는 계속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기록으로 남기는 거죠. 기록은 글이 될 때가 있고, 업무 일지 형식이 될 때도 있어요. 사진이나 영상이 되기도 하죠. 가끔 프로젝트성으로 작업 과정과 인터뷰를 담는 아트 필름을 제작하기도 해요. 저희가 살아 숨 쉬는 모든 시간이 기록의 소재가 될 수 있으니 업무는 끝이 없어요. 그저 우병윤 작가의 순간들을 모으고 편집해 두면 언젠가 쓰임이 있을 거라는 바람으로 작업을 이어가요.
기록을 남기는 사람과 기록으로 남겨지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인 거네요.
맞아요. 남편이 작업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으면 작품을 얼마나 진심으로 대하는지, 즐기는지가 느껴져요. 어떤 순간에는 “이거 찍어야 돼!” 하면서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는데요. 제가 이 사람의 가장 리얼한 모습을 담았다는 생각이 들면 너무 재미있어요. 남편도 제가 촬영하는 게 익숙하니까 옆에서 “이렇게 해봐, 저렇게 해봐.” 해도 크게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아요. 외부에서 인터뷰나 촬영을 하러 오시면, 아무리 오랜 시간 편하게 진행해 주셔도 본래 모습이 나오기는 어렵더라고요. 본래 모습을 보여주고 끌어내는 데서 서로 만족감이 커요. 만약 누군가 저를 기록으로 남긴다고 하면 손사래 치면서 “아니야, 내 건 내가 남길게.” 할 것 같은데 남편은 다행히 본인이 나온 영상을 꽤 좋아해요(웃음).
요즘에 기록 말고 푹 빠져 있는 일이 있어요?
다도요. 차를 좋아한 지는 오래됐는데 정식으로 다도를 시작한 지는 3년 정도 됐어요. 제가 웅크리고 잠을 자는데, 그래서인지 남편이 제 자세나 움직임이 뻣뻣하고 경직되어 있다고 하더라고요. 몸을 좀 이완시키려고 차를 마시게 됐어요. 기분 때문인지, 이제는 차를 마셔야만 몸 안의 장기들이 편해지는 것 같아요. 일주일에 두세 번 다도 시간을 보내는데요. 가지런한 자세로 찻물을 뿌리고 다구들을 정돈하는 고요한 과정을 정말 좋아해요. 3분 정도 짧은 명상도 하는데 몸과 마음이 정갈해지고 비워지는 기분이 들어요. 하루하루 바쁘게 움직이다가도 저 자신한테 ‘나 이제 가만히 앉아서 차 마시고 생각하고 일기 쓸 거야.’ 말하고, 실제로 그 시간이 주어지면 정해진 값 안에서도 충분한 자유를 느껴요. 보통은 한 시간, 쉬는 날에는 중간중간 책도 읽고 일기도 쓰면서 두 시간 정도를 보내요. 최근에 남편을 인도해서 함께하고 있는데 예상대로 좋아하는 것 같아요.
CD 수납장이 따로 있는 걸 보니 음악도 좋아하나 봐요.
집에 있을 땐 언제나 음악을 틀어놔요. 요즘은 한 곡 반복에 꽂혀서 종일 한 곡만 듣는데요. 눈치채셨겠지만 지금 나오는 곡도 계속 반복되고 있어요(웃음). 아나 록산느Ana Roxanne의 ‘Nocturne’이라는 곡인데, 이 앨범에 인도에서 느낀 고귀하고 신성한 경험을 담아냈다고 해요. 아침에 차 내려마실 때 집중하기 좋아서 내내 틀어두고 있어요. 전에는 이것저것 찾아 듣기도 했는데, 알고리즘을 타고 나오는 곡들 중에 취향이 아닌 것들도 꽤 있더라고요. 그래서 좋은 곡을 발견하면 그 아티스트의 앨범만 듣거나 그중에 마음에 드는 몇 곡만 골라 들어요. 요즘 제일 좋아하는 곡은 가스 스티븐슨Garth Stevenson의 ‘A love song’이에요. 그날의 기분에 따라서 선곡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일부러 정적인 음악 위주로 골라요. 그럼 덩달아 차분해지고 움직임 하나에도 더 신경쓰게 되거든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거기에 집중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음악을 배경에 두는 편이 좋아요.
단출한 가족 구성원 안에서, 그리고 내면에서 에너지를 찾고 채우는 것 같아요.
맞아요. 저희는 정말 저희끼리만 있어요(웃음). 이렇게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느껴왔고, 새로운 관계를 맺기보다 가깝고 편한 사람들과 만나기를 선호했어요. 경기도로 이사 오니까 서울에 사는 친구들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고요. 그런데 살면서 조금씩 바뀌는 게, 요즘에는 각자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해요. 지구 산책을 항상 같이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더 붙어 있게 된 것도 있는데, 이제는 한 명이 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나머지 한 명이 산책을 나가요. 우리가 원해서 똘똘 뭉쳐 있었듯이, 우리가 원해서 조금씩 따로 생활해 보려고 해요. 익숙한 생활 방식에 얽매이지 않으려고요.
3년 전 한 인터뷰에서 “아키비스트라는 직업, 그리고 기록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알리고 싶다.”고 말했는데요. 몇 해가 지난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어요?
3년이라는 시간이 짧다면 짧은데, 그동안 너무 많은 변화가 있어서 그런지 10년 전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인터뷰 내용을 찾아보니까 막 일을 시작하던 시기여서 말 속에 푸릇함이 보이더라고요. 당시에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고 뭐든 더 시도해 보려는 포부가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계속 쌓아가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어요. 남편에 대한 자료든, 우리 둘이서 듣고 보는 것이든, 우리가 지금 겪어가는 이 과정을 목적 없이 성실하게 기록해요. 기록이 왜 필요한지 알리고 싶다는 욕심은 접어두었어요. 무언가를 바라지 않아도 꾸준히 하다 보면 알아서 태가 날 거라고, 자연스럽게 전해질 거라고 믿어요. 남편 역시 지금이 엄청난 작가로 거듭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본인과 본인의 작업이 다양한 방식으로 남겨진다는 데에 순수한 감사를 느껴요. 무형적인 걸 좇는 일이라 부자 되기는 힘들 것 같지만(웃음), 지금의 우리한테 집중하기로 했어요. 대신, 앞으로 나아가고 싶을 때마다 공부나 경험이 필요하다면 아낌없이 투자할 거예요. 더 단단해지기 위해서요.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오면 언제든 사람들에게 공유할 거고, 조금 더 먼 미래에는 출판도 해보고 싶어요.
기록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자신이 마음에 드나요?
일기를 쓰기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 인생을 조금씩 잘 걸어가고 있다는 걸 느껴요. 스스로 성숙해졌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이 더 먼저 알아채요. 가끔씩 남편과 대화를 나눌 때나 남편이 제가 쓴 글을 보고 나서 “너 많이 나아졌다. 많이 깊어진 것 같아.” 그런 말을 해줘요. 그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다는 확신이 들어요. 그 기분이 좋아서 더 잘하고 싶고 자주 하고 싶어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니까 대충 쓸 수도 있고 거를 수도 있지만, 기록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의 차이는 앞으로 나아갈 자아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드는지 생각해 보면… 사실 이 질문이 정말 어려웠는데요. 많이 고민하고 내린 결론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냥 인정한다.’예요. 잘난 부분은 잘난 대로 못난 부분은 못난 대로 인정하고, 스스로 잘 알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계속해서 스스로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것 같아요. 내가 어떤 사람이고,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즐거운 건 무엇이고 두려운 건 무엇인지 캐내요. ‘되고 싶은 나’의 기준을 높게 잡아놓고 스스로 못 미친다고 느낄 때 너무 속상하고 자책하게 되잖아요. 그런 감정은 별로 가지고 싶지 않아서요.
자기 자신을 파악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멋진데요.
파악하려고 노력할 뿐이에요. 자신을 완전히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 같아요. ‘난 이런 사람이야.’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바뀌기 일쑤니까요. 그래서 ‘난 날 너무 잘 알아.’라고는 못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저는 가끔 불안하고 많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이건 정말 잘 느끼고 있어요.
에디터 이다은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