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자연스레 태가 나겠지

박온도 — 아키비스트

아키비스트 박온도의 일상은 평범하게 흘러간다. 일주일 중 5일은 남편과 함께 작업실로 출근하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반려견 지구와 산책을 나선다. 밥을 차려 먹고, 다도를 하며 몸과 마음을 다스린다. 그 사이사이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은 모두 기록이 되었다. 그만의 시선으로 해석되어 글과 사진, 영상으로 남겨졌다. 습관처럼 쌓아온 기록 덕분에 평범한 날들이 고유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그에게 기록은 자신과의 내밀한 만남을 넘어 그림을 그리는 남편의 작업을 말없이 지지하는 일로 이어졌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후의 해가 한가득 들어오는 아늑한 집이네요. 

그렇죠? 이 시간이 되면 아래층 소파가 놓인 공간과 위층 테이블이 있는 쪽으로 따뜻한 빛이 들어와요. 원래 아래층에 별다른 게 없었는데, 살다 보니 너무 인위적으로 느껴져서 얼마 전 구조를 좀 바꿨어요. 잘 보지는 않지만 TV도 걸어두고요. 이제 조금 사람 사는 공간 같아요(웃음). 

 

온도라는 이름 때문에 차분하고 다정한 분일 거라고 짐작 했는데, 직접 뵈니 밝고 씩씩한 인상도 함께 풍겨와요. 본명이 아닌 걸로 아는데, 어떻게 지은 이름이에요? 

SNS나 온라인상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을 잘 지어두고 싶었어요. 평소 지향하고 좋아하는 것들에 어울리는 단어가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온도’가 떠올랐어요. 온도는 따뜻하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잖아요. 저는 자연스러운 조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데, 그걸 한 단어로 표현하기에 알맞은 단어인 것 같더라고요. 그때 생긴 별명이 이름처럼 불리게 됐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어요. 

 

온도 씨가 이번 호 주제에 꼭 맞는 인터뷰이라고 생각 했어요. SNS, 유튜브 등 공개된 것만 보더라도 꽤 오래전 부터 계속해서 뭔가를 남겨왔더라고요. 

기록하고 정리하고 편집하는 건 늘 좋아했어요. 무언가를 보거나 느낄 때 그냥 지나가게 두지 않고 제 언어로 남기고 싶어 했고, 어디에든 어떤 방식으로든 생각을 표출하고 공유하는 게 즐거웠어요. 사람들과 길게 대화 나누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마 같은 이유인 것 같아요. 어릴 때 일기를 꼬박꼬박 쓰거나 얌전히 앉아서 책만 보는 아이는 아니었어요. <반올림>을 정말 좋아했는데, 그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들이 꼭 겉면이 가죽으로 된 다이어리 들고 다니잖아요. 너무 멋져 보여서 문구점에서 가죽 노트나 수첩을 사서 거기에 카드를 꽂고 다녔어요. 하나도 쓰지도 않으면서요(웃음). 싸이월드도 그렇고, 제가 가진 기질과 시대의 유행이 맞아떨어져서 더 재미를 붙이게 된 것 같아요. 

 

글, 사진, 영상 등 다방면으로 일상과 단상을 담는데요. 어느 기록물에서든 ‘자연스럽다’, ‘꾸밈없다’는 인상이 가장 크게 남아요. 

20대 때, 친구가 저를 “자연스러움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어요. 무의식중에 말하고 행동하니 잘 몰랐는데 그 말을 듣고 깨닫게 됐어요. 너무 맞는 말 같아서 막 웃었죠. 스스로도 주변 환경도 세월의 흔적이 묻은 것들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본능적으로 이끌려요. 그렇다고 무조건 오래된 것만 찾아다니는 건 아니지만, 사람이든 물건이든 새롭게 만나게 되면 곁에 두고 손때가 타게 해요. 그러면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제가 자연을 좋아하거든요. 자연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처럼 가식 없고 꾸밈없고, 그래서 어떤 의도 없이 존재하는 것이 좋아요. 그렇게 살고 싶기도 하고요. 

 

최근 SNS 피드에 “요즘에는 집착처럼 틈만 나면 일기를 쓰고 있다.”고 했죠. 

요즘 문득 느낀 건데, 가만히 있어도 바깥에서 들어오는 정보가 너무 많은 시대이다 보니 스스로 내면을 돌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더라고요. 저 역시 그 시간을 놓치고 있었고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평소보다 더 자주 제 안에 있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어요. 

 

누군가는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누군가는 특별한 날을 잊지 않기 위해 일기를 쓸 텐데요. 온도 씨는 언제 일기장을 펼치나요? 

제 노트는 일기장보다는 불렛저널에 가까워요. 몇 년 전부터 불렛저널 형식을 빌려 매일의 업무 일지와 개인적인 활동을 기록하고 있어요. 그날 느낀 것들을 짧게 쓸 때도 있고, 종종 감정을 해소하고 싶은 날에는 생각나는 대로 긴 글을 써요. 좋은 글이나 영감이 된 것들을 옮기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생겼을 때는 포토 프린터로 사진을 인쇄해서 붙이기도 해요. 용도를 따로 나누지 않고 한 권에 쓰기 때문에 페이지마다 기록 형태가 다르죠. 일반적인 불렛저널처럼 기호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쓰고 싶은 만큼, 쓰고 싶은 대로 쓰고 표시해 둘 부분은 제가 알아볼 수 있도록 형광펜별로 고정값을 두고 칠해 둬요. 밖에 나갈 때는 작은 메모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때그때 생각들을 적어두고 나중에 노트에 다시 옮겨요. 재미있는 건 며칠 전에 쓴 메모를 옮기려고 하다가 그때와 생각이 달라져서 내용을 조금 바꾼다거나 아예 생략하기도 한다는 거예요. 고작 며칠 사이에 꼭 남기고 싶었던 생각이나 감정이 달라지고 사라진다는 게 참 묘해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는 말을 체감하고 있네요. 

드라마 <안나>에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씁니다.”라는 대사가 나와요. 그 대사를 듣자마자 ‘혹시 나도 그런가?’ 하면서 약간 흠칫했어요. 저는 일기 쓸 때만큼은 솔직해지려고 부단히 노력하거든요. 굳이 쓰지 않아도 될 내용은 생략하기도 하지만, 종이 위에 새기는 모든 텍스트에는 거짓이 없기를 바라요. 내 감정과 상태, 생각을 자유롭게 쓰다 보면 어느 순간 객관적으로 자신을 분석할 수 있게 돼요. 안 좋았던 기억을 곱씹으면서 왜 그랬는지 명확히 짚어내고 앞으로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생각하는 시간도 생기고요. 만약 제 일기를 타인이 보게 된다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길이 없겠지만, 전 알잖아요.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일은 진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나간 기록을 다시 들춰 보기도 하나요? 

무조건 다시 봐요, 무조건(웃음). 지난 기록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분들도 있다고 하는데 저는 루틴하게 돌아보는 편이에요. 일단 월요일마다 지난 일주일을 돌아보면서 그간의 업무 일지를 데이터화해 놓고, 한 달, 상반기, 하반기, 1년 단위로 훑어보면서 그동안 나한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올해는 어떻게 살았는지 되짚어봐요. 좋았던 일도 있고, 잊고 싶은 일도 있지만, 그 모든 게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자양분이 된다고 믿어요. 지난날의 나에게서 무언가를 깨닫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고, 스스로 돌보는 일과도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더 기꺼이 돌아보게 돼요. 

 

온도 씨의 기록 안에는 유독 걷는 장면이 많아요. 평범한 날에도, 여행을 떠나서도 걷고 또 걷더라고요. 

저한테 걷는 시간은 무엇이든 바라보고, 경험하고, 느끼고, 그것에 집중하는 시간이에요. 처음 가보는 동네를 산책하거나 여행지를 탐방하는 것도 다 걷는 행위를 기본으로 하잖아요. 다리가 움직이는 것뿐인데 시야는 초마다 바뀌고, 저는 계속해서 비슷한 듯 새로운 풍경들을 눈에 담아요.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혼자일 때는 내 기분과 시선에 집중하고 사색할 수 있으니 좋고, 누군가와 함께라면 이야기가 풍부해지니 또 좋죠. 원래도 걷기를 즐기지만, 요즘은 반려견 지구 때문에라도 무조건 하루에 두 번씩 산책을 해요. 지구가 없었다면 안 걸었을 날씨에, 못 걸었을 거리를 걷게 되니 저의 산책 바운더리도 넓어졌어요. 조금 힘든 날도 있지만 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나서요. 

 

이야기 나온 김에 지구를 소개해 줄래요? 

지구는 이제 네 살이 좀 넘은 남자아이예요. 파주에서 한 번에 150여 마리를 구조하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그때 구조된 어미의 아이였어요. 늘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했고 이왕이면 유기견을 데려오고 싶어서 알아보다가 지구의 프로필 사진을 보게 됐어요. 두 귀가 다 접혀서 해맑게 웃는 얼굴이 너무 귀여운 거예요. 곧장 가서 데리고 왔어요. 아까 들어오실 때 많이 짖었잖아요. 예민하고 겁이 많아서 그래요. 사람들한테 주목받는 거 싫어하고, 낯선 장소도 싫어해요. 좀 고양이 같은 면이 있어요. 아는 척 안 하고 저희끼리 대화하면 먼저 다가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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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다은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