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이곳을 그리워할 것을 알기에

어라운드 빌리지

시간이라는 마법은 많은 걸 흐릿하게 만든다. 그때 내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도. 그렇지만 점점 선명해지는 것도 있다. 마음껏 놀고 웃던 때 공기의 질감과 바람의 온도 같은 것. 그리고 그 순간을 감싸는 장소. 그렇다면 내 아이가 그리움으로 기억할 공간은 아마도 여기가 아닐까. 어라운드 빌리지.

©박이룸

할머니 집으로 떠난 여름방학

가족 여행에 대한 추억이 많지 않다. 경주월드나 어린이대공원에 다녀온 사진은 있으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부모님은 삼남매를 키우느라 늘 바빴고, 휴가 때는 시골 할머니 집이나 친척 집에 가는 게 전부였다. 할머니 집 식구들은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신기하게도 명절이나 휴가 때는 빠짐없이 모였다. 그러면 칠 남매의 아이들만 열 다섯이 됐다. 오랜만에 만난 어른들이 담소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할머니 집 마당에서 막대기로 흙을 파고, 뒷산에 올라 미끄럼틀을 탔다. 그리고 노래자랑도 열었다. 그게 지루해지면 마을 정자에서 숨바꼭질을 했다. 어느새 옆집 아이들도 나와 땅따먹기를 했던 것 같다. 아니 사실 그런 세세한 것들은 기억나질 않는다. 하루 끝까지 놀아볼 것처럼 뛰어놀던 시절이었다. 그 친구들이 원래 그곳에 살던 아이들이었는지, 휴가를 맞아 들른 아이들이었는지도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약속 없이 만나 놀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헤어질 때도 크게 아쉽지 않았다. 아마도 짐작했던 거 같다. 다음 방학 때 또 만날 거라고.

어라운드 빌리지에 오면 그 시절 할머니 집이 떠오른다. 도시에 사는 아이들은 울타리가 좁다. 놀기 위해서 차를 피하고 건물을 피하고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눈초리를 피해야 한다. 하지만 어라운드 빌리지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는 본능적으로 안다. 그리고 달린다. 곳곳에 핀 민들레를 후 불어보고, 꽃팔찌를 만들고, 거미줄에 걸린 파리를 보고 소리를 지른다. 흙을 파서 물을 담으면 어느새 언니 오빠들이 다가오고, 함께 마법 수프 요리사가 되기도 한다. 사실 내가 보지 못한 놀이가 더 많을 것이다. 멀찌감치 떨어진 어른들은 어떤 약속을 한 듯 아이들의 놀이를 그저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의 유년기를 메웠을 그날을 떠올린다. 

지오의 돌잔치

지오는 어라운드 빌리지가 폐교였을 때부터 이곳을 지켜본 아이다. 풀과 나무가 에워싸고 잡초가 허리춤까지 솟아 있었을 때, 엄마 품에 안겨 운동장 한가운데의 플라타너스 나뭇잎을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다. 어라운드 빌리지가 캠핑장과 게스트하우스로 다듬어지고 사람들을 맞은 다음 해, 지오의 돌잔치를 열었다. 가족들이 모였고 길쭉한 상에 떡과 꽃이 차려졌다. 소반 위에는 실과 붓, 판사봉, 공이 옹기종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지오와 마주칠 때마다 웃으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아이는 한복을 입고 초를 먹어 삐걱대는 마룻바닥을 총총 걸어 다녔다. 그리고 판사봉을 집었다.

쓸데없는 일들을 하는 시간

올봄 아이의 친구네 가족과 캠핑을 했다. 작년, 어린이집 가족 모임을 어라운드 빌리지에서 한 적이 있는데, 캠핑 장비를 사면 여기서 꼭 캠핑을 하겠노라고 했다. 그 집 아빠는 캠핑 페어에서 신중히 고른 면텐트를 성실하게 쳤고, 엄마는 테이블과 의자를 세팅한 뒤 음악을 틀었다. 텐트를 칠 즈음부터 두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울타리 안에서 무언가 열심히 찾고 있을 게 뻔했다. 밥시간이 되면 알아서 돌아오겠지.

이 가족의 식성은 볼 때마다 놀랍다. 먹는 일에 가장 큰 즐거움을 느끼는 가족 아니랄까 봐 캠핑장에서 먹게 될 네 끼 식단을 꼼꼼히 준비해왔다. 첫날 저녁은 조개구이. 다음 날 아침은 샌드위치, 점심은 칼국수와 닭꼬치, 저녁은 숯불 바비큐. 숯불에 쓸 참나무와 오크나무를 준비해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공들여 불을 지피고 음식을 굽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둠이 깊어졌다. 아이들 손에 스파클라 스틱을 쥐여줬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빛을 흡수했다가 천천히 사라져가는 불꽃들을 바라보며 ‘밤이네.’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했다. 때로는 필요 없는 것들이 필요하고 쓸데없는 일들이 쓸데가 있는 법이라고. 

비가 오면 조용히 지낼 줄 알았건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 가족과 만난 날은 비가 자주 왔다. 남산에 케이블카를 타러 갔을 때도 그랬고, 함께 사진 촬영을 하고 저녁 먹던 날도 그랬다. 이번엔 모처럼 다섯 가족이 모이기로 했는데, 태풍 소식까지 있단다. 날씨가 그러하다 보니 운동장에 빈 공간이 많았다. 숙연할 정도로 고요하다. 플라타너스는 생각했겠지. ‘이번 주말은 좀 조용하게 지낼 수 있겠군.’ 

틀렸다. 날씨는 아이들의 놀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넓은 운동장을 전세 낸 듯한 자유로움만 커질 뿐이다. 하늘이 푸르스름하다가 보랏빛으로 변했지만 아이들은 개의치 않고 트램펄린에서 뛰고 숨바꼭질을 했다. 어딘가에서 에어 로켓이 등장하자 네 살부터 열두 살 아이들이 한 줄로 나란히 줄을 섰다. 차례가 돌아온 아이가 펌프를 힘차게 밟으면 다 같이 목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잠깐 환호했다. 그러곤 다시 줄의 마지막에 섰다. 회색빛 세상에 내려앉은 묘한 질서, 예민한 살갗에 닿는 선득한 기운, 어색한 대화. 어쩌면 유년기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박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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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딩 학교의 사진 수업

내 딸 이룸이와 지오는 사촌지간이다. 지오가 어라운드 빌리지가 다듬어지는 과정을 봐왔다면 이룸이는 생애 첫 벚꽃을 여기서 보고, 걸음마를 이곳에서 단련했다. 둘에게 어라운드 빌리지는 내가 어릴 적 할머니 집에 가는 것처럼 당연하고 익숙한 일일지도 모른다. 

두 꼬마는 ‘푸딩 학교’에 다닌다. 둘만 다니는 비밀 학교였는데, 얼마 전 태어난 지오의 동생도 최근 입학한 걸로 안다. 거기에서 셋은 ‘니니’와 ‘라이카’ ‘존존이’로 불린다. 푸딩 학교에서 둘은 엉덩이춤을 배우고 때때로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로 지낸다.

두 녀석을 데리고 공원에 가던 날이었다. 이룸이가 갑자기 멈춰서 손가락으로 직사각형을 만들더니 찰칵 소리를 냈다. 생각해보니 얼마 전 횡단보도에서도 같은 행동을 한 것 같다. 좋은 생각이 났다. “니니, 라이카. 이번 휴가 동안 너희들에게 (일회용) 카메라를 하나씩 선물할게. 여기에 너희들이 찍고 싶은 걸 담아. 나중에 같이 사진도 찾아보자.”

어라운드 빌리지에 도착하자 둘은 그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짐을 풀고 막 나가려는 아이들에게 각자 이름을 쓴 카메라를 쥐여줬다. 아뿔싸. 한 자리에서 몇 장을 내리 찍더니 내팽개쳐두고 뛰쳐나간다. 한참 후 둘을 다시 찾은 곳은 정글 놀이터였다. 최근에 캠핑장 구석에 작게 마련한 공간인데, 모래 옆에 물을 틀고 놀 수 있게 되어 있다. 그 위로는 굵고 거대한 나무에 밧줄이 달려 있어, 바람이랑 타잔 놀이를 하기 딱이다. 한 명은 타잔이 됐고, 한 명은 바지를 걷어 열심히 모래를 파고 있다. 그 옆에 잘 보이게 카메라를 놓았다. 이후로 둘이 뭘 하고 놀았는지 나는 모른다. 카메라만이 그날 둘이 한 일을 알고 있다.

글·사진 김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