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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김남주
전문가를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전문가란 어떤 것에 정통하거나 큰 성과를 이뤄낸 사람일 수도 있지만, 한 분야에 평생을 투신한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자기만의 정원을 갖고 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기를 반복하는 동안 조용히 무언가를 매만지고 키워내는 사람들. 나는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글을 만져온 사람을 만났다. 그녀의 오래된 정원이 궁금했지만 그저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내가 받은
고통의 대가로
한 권의 책을
학창시절, 독서 모임에 간 적이 있다. 매달 한 권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는게 유일한 과제였는데, 나는 그것마저 귀찮아 한참을 미뤄놓곤 했다. 한번은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해 급한 마음에 역자 후기를 펼쳤다. 그리고 그 글을 참고해 독후감을 완성했다, 아니 거의 베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며칠 뒤 담당 선생님으로부터 “작품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구나”라는 칭찬을 들었을 때 나는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칭찬의 진짜 주인은 따로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해외 문학 작품을 볼 때면 옮긴이의 말을 찾아 읽었다. 과거 일을 반성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하는 데 절대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옮긴이의 말은 어느 책에는 있고, 또 어느 책에는 없었다. 후자는 미처 읽히기도 전에 나의 신뢰를 잃었다. 번역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의 글로 옮기는’ 행위다. 말 그대로 원작을 집필한 작가와 다른 언어권의 독자를 이어주는 중간자의 역할인 셈이다. 중요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외국 작가의 책이 2쇄, 3쇄를 찍고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동안 미로같이 촘촘한 활자들 사이로 먼저 길을 낸 존재는 너무 쉽게 잊혀지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 한 권의 책을 만났다. ‘김남주 번역 에세이’,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는 내게 꽤 익숙한 이름이었다. 1988년부터 수많은 문학 작품을 번역해온 그녀의 ‘첫 책’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아멜리 노통브Amelie Nothomb, 로맹 가리Romain Gary, 장 그르니에Jean Grenier, 프랑수와즈 사강Francoise Sagan, 나열된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법한 작가들과 그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빼곡했다. 작업이 끝날 때마다 틈틈이 써놓은 후기를 모아 하나로 엮어냈다는 그 책을 나는 밤새도록 읽어 내려갔다. 좁은 행간마다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언어의 무게에 좌절하면서도 결국은 감당하고야 마는 외로운 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졌다. 번역이라는 건 자신의 글을 쓰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치열한 작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그녀에게 직접 묻고 싶은 것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 후로 내가 번역가 김남주를 만나기까지는 꼬박 1년 3개월이 걸렸다. 어쩌면 그녀의 서재에 초대받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지만 병상에 계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말에 어디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옥인동의 한 카페에 마주 앉아 진한 커피를 시켰다.
번역하는 사람
지난해 ‘옮긴이의 말’을 모아서 책을 내셨어요. 그동안 남의 책을 위해서만 일하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책을 갖게 되었을 때 느낌이 어떠셨나요?
사실 ‘내 책’이라는 말은 어색해요. 저자들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글이기 때문에 온전한 나만의 책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해요(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기쁘더라고요. 저자의 말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의 말을 전할 수 있어서요. 역자는 어쩔 수 없이 텍스트에 갇혀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는 존재인데요. 전부터 거기 있는 줄 알고 있었고, 가끔 소매 끝으로 문질러 닦기도 했지만 줄곧 닫혀 있던 창을 마침내 열어본 기분이었어요. 이제 그 창을 통해 제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아요. 《나의 프랑스식 서재》에 실린 글들은 그동안 번역을 해오면서 하나의 작품을 끝낼 때마다 썼던 글들이라 어떤 문장, 어떤 행간에서 그 시절의 제가 보이더라고요. 독자들에게는 번역자가 옮긴 책에 대해 쓴 글로 보인다면, 저 자신에게는 오랜 세월 바꾸지 않고 몇 줄씩 써넣은 수첩을 펼치는 느낌이었죠. 실제로 그 책을 읽은 친구는 제 앨범을 보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본인만의 책을 낸다면 그건 어떤 모습일까요?
막연하게 소설을 쓰리라고 생각했어요. 언젠가는 텍스트를 번역하는 사람이 아니라 텍스트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늘 있었거든요. 그래서 조금 쓰기도 하고 묵히기도 했는데요. 최근 십 년 동안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전과는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하고 싶은 말을 내 방식대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몇 가지 주제로 에세이를 쓰고 있어요. 그중에는 소설적인 요소가 들어간 것도 있고, 번역과 관련된 에세이가 있어요. 고여 있는 걸 길어내고 가야 할 것 같아요. 제 삶의 전반기에 했던 작업에 대한 경의나 애정일 수도 있고요. 그다음엔 저를 만들어낸 책에 관해서, 생활의 기쁨과 사라지는 시간에 관해서 쓰게 될 듯해요. 각각 파일을 하나씩 만들어놓고 그 방들을 드나들고 있어요.
원래 작가를 꿈꾸셨나요?
어릴 때, 2000년이 되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아득한 미래였죠. 그런데 떠오른 모습이 제가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 쓰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글 쓰는 사람이 되겠구나 했어요. 그게 번역일 줄은 몰랐죠(웃음). 20대 때는 출판사 편집자로 일했어요. 그러다 일이 밀려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시점에 서게 됐는데, 번역을 택한 건 무슨 사명감에서가 아니라 시간을 내 마음대로 배치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어요. 하지만 마감 때가 되면 자율적인 인간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되죠. 저는 오랫동안 번역가로서 합당한 정체성을 갖지 못한 채 번역을 그저 밥벌이로 여겼던 것 같아요. ‘절대 오역’만 없으면 된다, 원고지 매당 2만 원 정도 주면 정말 갈고닦은 문장으로 이뤄진 원고를 넘길 텐데, 이러면서요. 사람이 꼭 뭔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죠. 다시 말해 삶은 그저 그것만으로 이미 뭔가 된 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의 평가, 심지어 역사의 평가가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우리는 모두 사라지는 존재들인데요. 누군가 엄청난 작품이나 업적을 남겼다면, 또 누군가는 평안히 자족하며 가족과 이웃을 행복하게 해주면서 살았으면 된 거죠. ‘어느 쪽이 더 낫다.’ 라고 말할 수 없어요, 적어도 제 관점에서는요. 다만 이제 쓰지 않고 죽으면 후회할 것 같아요. 그나마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는 모양이에요.
외국 문학을 읽을 때 번역자를 의식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옮긴이의 말이 유일한 목소리인 셈인데, 그마저 읽지 않는 독자들도 많고요.
사실 저는 번역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어요. ‘번역가는 텍스트 안에 묶이는 존재다, 번역가는 텍스트를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옮긴이의 말을 쓸 때도 최대한 독서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쓰려고 했고요. 대신 누군가 서점에서 그 책을 집었을 때 읽고 싶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하지만 옮긴이의 말을 읽고 안 읽고는 독자의 선택이에요. 영향받는 게 싫어서 안 읽는다는 사람도 봤어요. 한편으로는 공감해요.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나요?
예전에 어느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어요.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는 프랑스 번역자들의 모임이었는데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다들 원작 못지않게 번역된 글에 관심을 두고 있었거든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의《지하생활자의 수기》 한 페이지를 불어로 옮겨야 했어요. 그리고 한 명씩 일어나 각자의 의견을 말했죠. 그건 철저하게 해석의 문제였어요. 맞느냐 틀리느냐를 떠나 다양한 관점을 존중하려는 태도에 자극받았어요.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세미나’였고, 절대 오역의 경우에는 역자가 책임을 져야 하죠.
아무리 정교하게 작업해도 분명 휘발되는 것이 있겠죠? 번역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도 있고요.
당연히 그렇죠.
그래서 순수하게 원작만 보겠다, 국내 문학만 읽겠다고 선언하는 독자들이 있어요.
번역은 ‘잘해야 본전’, ‘늦가을의 낙엽 쓸기’ 같은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사소하게는 ‘금요일’을 뜻하는 방드르디Vendredi를 ‘수요일’로 쓰는 단순 오역에서부터, 내용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경우까지 오역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은 한 사람에게 그가 모르는 언어의 세계를 열어주는 중요하고 민주적인 작업입니다. 문학 번역이란 정서를 전달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원문의 독자가 느낀 것을 우리도 느끼게 해야 하는 거죠. 그 과정에서 명사가 빠지든, 부사를 명사로 처리하든, 아예 생략하든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에요. 이를테면 ‘~마저’라는 조사 안에 문장 하나가 들어갈 수도 있어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에 의하면 “번역을 할 때 번역의 궁극적인 본질을 좇아 원문과 닮게 하려고 한다면 좋은 번역이 가능하지 않다…. 번역은 한 죽은 언어와 다른 죽은 언어를 일치시키는 메마른 방정식과는 전혀 다른 방정식”이라고 했어요. 고전이 거듭해서 새로운 언어로 번역되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죠.
원작이 가진 것을 얼마나 잘 전달하느냐가 우선이라는 말씀이시죠?
저는 번역의 그런 속성이 역사 발전의 단계라고 생각해요. 저는 을유판 세계문학을 읽고 자란 세대인데요. 그 책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뮈를 알았죠. 나중에 제가 읽은 문장이 일어에서 중역된 거라는 걸 알고 씁쓸하기도 했는데, 그게 아니면 그때 어떻게 세계문학을 접했겠어요. 프랑스 문학의 경우, 국내에 불한사전이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았을 때 직접 사전을 만들어가며 번역에 매달렸을 1세대를 떠올리면 뭉클하고 감사해요. 우리는 그 혜택을 입고 이만큼 온 거고, 그만큼 다음 세대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죠.
번역을 하면서 가장 어려움을 느낄 땐 언제인가요?
남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맡기 전에 충분히 검토해보고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늠해요. 최근에 ‘슈만 황혼(가제)’이라는 책을 번역했는데 굉장히 힘들었어요. 저자인 미셸 슈나이더Michel Schneider는 문학평론가로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라는 좋은 작품을 썼어요. 평소에도 음악에 조예가 깊은 그는 슈만의 고통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해요. 그런데 워낙 글이 생략과 압축이 심해 150여 쪽밖에 안 되는 분량을 2년간 띄엄띄엄 작업했어요. 미뤄두었다가 다른 작업을 마치고 다시 붙들기를 반복했죠. 내가 왜 이걸 한다고 했을까 수없이 탄식했어요(웃음).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요.
이를테면 이런 식이에요. “고통의 형태와 목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광기와 창조적 모드를 팽팽하게 긴장시킨다. 모든 것에 고통의 흔적이 숨겨져 있다. 이윽고 고통이 더는 지탱되지 못할 때 붕괴된다. 고통의 끝과 더불어 작품의 끝이 온다. 일종의 비심미성, 그리고 비심미성 속에서.” 저자한테 물어볼 수밖에 없었어요. 여기서 ‘비심미적인 상태’란 나중에 슈만이 마취제에 의해 고통이 가라앉은 상태를 뜻해요. 그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았으니까요. ‘비심미성’은 작품이라는 거죠. 슈만의 말기 작품들이 미학적으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거든요. 이런 내용을 아무 설명 없이 간단히 언급하면, 문장에 긴장이 생기죠. 제대로 이해하는 독자에게는 뇌세포를 늘어나게 하는 창조적인 독서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모호한 개념들의 나열이 되기 쉬워요. 이 문장의 경우 저자와 의논 끝에 살짝 풀어주고 주를 달기로 했어요. 슈만의 음악만큼이나 아름답고 아픈 이 책이 독자에게 친밀하게 다가가기를 바라면서요.
혹시 작업 중간에 포기한 적도 있으신가요?
이번 슈만 작업 때 몇 번이나 그러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러자니 얽힌 것도 많고, 결정적으로 참 멋진 책임에는 분명하거든요. 그럴 때 일에 대한 대결감 같은 게 솟죠. 이번에는 출판사와 감수자 두 분의 도움이 컸어요. 슈만의 음악, 독일어, 일반 음악 이론 등 여러 부분에서 귀중한 감수를 받을 수 있었어요. 음악과 문학을 이해하는 출판사 식구들과 의논도 했고요. 아, 중도 포기한 경우는, 무슨 심오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못하겠다고 한 적은 있어요. 제게 번역은 밥벌이거든요. ‘버스 요금이나 파 값이 오르는 만큼 원고료도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지불방식 역시 계약서에 정확하게 명시해주세요’라고 말해요. 결코 우아한 번역자는 못 되죠(웃음).
책 읽는 여자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카뮈를 꼽으셨어요. 어떤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나요?
고등학교 때 카뮈의 에세이 《결혼. 여름》을 읽고 그 감성에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기분이었어요. 《시지프스의 신화》와 《이방인》을 읽고는 삶의 부조리를 그렇게 섬뜩하게 표현한 것에 매료되었고, 《페스트》를 읽고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 대해 생각했어요. 지상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어떤 존재에게 내밀한 연대감을 느끼게 하는 게 바로 문학이죠. 이 사람이 쓴 바로 그 언어로 그의 글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불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그러고 보니 처음으로 번역한 책이 장 그르니에의 작품이네요. 카뮈가 그의 영향을 받았죠?
맞아요. 그르니에는 카뮈가 사랑했고, 카뮈를 사랑했던 스승이에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번역 초보가 겁도 없이 그르니에의 《몇 사람 작가에 대한 성찰》 번역을 맡았고, 그 후에는 지금은 절판된 청하판 카뮈 전집을 작업했어요. 그런 일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졌어요. 카뮈는 내색하지 않고 계속 마음에 품어온 어떤 사람 같아요. 앞으로도 그가 힘이 되어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어요. 카뮈는 글은 ‘코렉시옹Correction’, 곧 ‘수정’에서 나온다고 말했어요. 눈을 바르게 하고 거듭 고치다 보면 말하고자 했던 그 무엇을 제 방식대로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요. 또 인간은 성벽의 모든 자리에 다 서 있을 수는 없다고도 했지요. 잔가지를 쳐내고 집중해야 할 때 제가 떠올리는 말이에요.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이 있을 것 같아요.
제겐 프레드 바르가스Fred Vargas의 《4의 비밀》이 기억에 남네요. 이 책의 원제는 ‘빨리 떠나라, 그리고 늦게 돌아오라’인데요. 파리와 마르세유Marseille를 넘나들고 중세와 현대가 엇갈리는 대작이에요. 그런데 정작 저자의 페르소나이자 주인공인 ‘아담스베르’는 지극히 본능적이면서도 단순하죠. 아, 이 작품 참 좋은데! 추리소설로 고전의 경지에 이르는 매력적인 소설이에요.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에서 바르가스의 작품은 롬폴*이라 불리며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그녀가 어떻게 작품을 쓰는지 얘기한 적이 있어요. “아주 작은 실마리 하나가 머릿속에서 점점 굴러가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라고 수줍게 말하는 저자의 낮은 음성, 그 아이디어를 매만지는 듯한 손끝이 인상적이었어요.
이 소설의 무대는 파리 몽파르나스Montparnasse의 에드가 키네Edgar Quinet 광장이에요. 파리에 갈 때마다 무심히 지나쳤던 곳인데 이 책을 번역하면서 샅샅이 돌아다녔어요, 물론 작가는 지도에서 찾을 수 없는 새로운 공간을 작품 속에 구축해놓았죠. 제가 갔을 때 마침 근처에 시장이 열려서 냄새와 빛깔, 사람들의 체취가 뭉클하게 다가왔었어요. 마르세유에서는 그 도시의 강한 느낌을 좀 느끼고 싶어서 일부러 관광객이 많이 다니는 길 말고 뒷골목을 걸었고요. 바다 내음을 실은 바람을 맞으면서 주인공이 보았던 바로 ‘그것’을 본 기분이었어요.
*롬폴Rompol ‘바르가스의 추리소설’이라는 뜻. 소설을 쓸 때 각 장(章) 머리에 ‘Ro*man policier(추리소설)’란 표현을 쓰는데 나중에 이를 줄여 ‘rompol 1’, ‘rompol 2’라고 적기 시작함. 제목을 정하지 않고 소설을 먼저 쓰는 방식에서 비롯된 용어.
프랑스 문학은 어떤 매력이 있나요? 자유롭고 즉흥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프랑스 현대 문학을 주로 번역해왔지만 제가 번역한 건 빙산의 일각 중의 일각에 불과해서 일반화시키는 데는 무리가 있어요. 다만, 문학이란 게 해당 국민의 정서와 언어상의 특징을 통해 구축되는 것이라고 보면, 프랑스 혁명으로 대변되는 프랑스인들의 자유를 향한 근성과 프랑스어가 지닌 논리성을 특징으로 봐야 할 것 같아요. 한 문장이 한 페이지를 넘어가는 발자크Honore de Balzac의 만연체 문장과 “하나의 사물을 표현하는 데에 가장 적절한 하나의 말이 있다”고 말하는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엄정한 표현, 징그럽도록 사태의 핵심을 해부하는 졸라Emile Zola의 자연주의, 관점이 자주 엇갈려 묘한 심리적인 울림을 주는 사강의 작품, 자기 자신, 프랑스인, 나아가 인간이라는 종의 DNA를 천착한 로맹 가리, 그리고 지금 현재의 프랑스 문학을 가장 박진감 있게 보여주는 야스미나 레자Yasmina Reza에 이르기까지, 이 가을, 프랑스 문학의 매력에 빠질 이유가 충분하죠.
번역을 하려면 외국어 실력보다 국어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동의해요. 도착어, 즉 옮겨놓는 말 실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외국어는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고 찾아보면 돼요. 그런데 국어는 그럴 수가 없어요. 모국어의 감은 체득된 것이라 오랜 시간 동안 갈고 닦아야 하는 부분이에요. 저 역시 하나의 작품을 끝내고 나면 우리말로 쓰인 걸 읽어요. 단어를 다시 머릿속에 집어넣는 과정이죠.
평소 즐겨 읽는 책이 있나요?
한때는 번역을 마치고 나면 우리말로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조차 더듬댔어요. 그럴 때면 백석을, 박두진을, 이문구를, 김우창을 읽었다고 제 책에 쓰기도 했는데요. 특히 토속어의 정감이 담긴 글들, 개념이 머릿속 회로를 돌면서 리듬을 만들어내는 글을 좋아해요. 늘 읽는 책은 《관촌수필》,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의 책, 그리고 낡은 시집들이요. 《백록담》, 《질마재 신화》, 《안 끝나는 노래》, 《님의 침묵》…. 이런 시집들을 책장이 떨어질까 조심해가며 읽어요. 한 편 들어보실래요? 박두진 시집 《하얀 날개》에 나오는 〈장미4〉라는 시예요. 무려 1967년에 나온 시집인데, 제가 아무래도 많이 낡은 모양이에요.
어쩌리. 나의 앞에 너는 너무 뜨거워. 나 혼자 이렇게 쯤 마음 달뜨는. 무너지렴, 무너지렴, 스스로를 꾀여내어. 입술을, 네 이마를, 네 익은 뺨을 더듬어, 목아지를, 귓부리를, 눈두던을 더듬어. 장미야. 너무 뜨건 진홍 장미야. 대낮 아님 달밤에, 대낮 아님 달밤에 만 억번 다시 사는 훼닉스처럼. 꿀집 깊이 파들어 가는 투구벌레처럼. 모르겠다. 나는 너를 짓이기겠다. 속속들이 안의 너를 짓이기겠다. 장미야. 너 꽃장미야. 짓이기겠다.
그리고 김남주
작업할 때 어떤 물건들을 곁에 두나요?
밤늦게까지 일하다 보면 문장들이 서로 얽혀서 한동안 제자리 걸음을 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문진을 원서 위에 올리고 한 줄씩 내리면서 읽어요. 그럼 하나하나 넘어가면서 집중이 잘 돼요. 긴 것은 캐나다 원주민이 상품용으로 만들어 파는 거고, 오리 얼굴을 한 건 병따개 겸용도 된답니다. 평소 맥주를 안 좋아했는데 이걸 책상에 올려둔 이후로 뚜껑 따는 재미에 맥주를 자주 마셔요(웃음). 아,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 모양의 연필깎이도 좋아해요. 책장에 메모를 할 때는 주로 연필을 쓰거든요. 로제타 스톤은 해독을 의미하는데 뒤집으면 연필도 깎을 수 있다니, 이런 조합 어때요? 좀 장난스럽게 말해서 자기 일을 제대로 해내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그밖에 가끔 글씨가 쓰고 싶을 때 서랍 속을 뒤져서 찾아 쥐는 과거의 만년필들도 있어요. 하지만 꼭 있어야 하는 건 음악과 커피와 3M 메모지예요.
서신은 저자와 주고받은 것인가요?
이건 우크라이나 친구가 보내온 건데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우크라이나어로 옮긴 번역자예요. 이 친구가 제게 이런 정성스러운 편지를 보낸 이유는 저랑 무슨 심오한 문학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이름은 밝힐 수 없는 네덜란드 번역자에게 반해서 그녀의 주소를 알려달라고 부탁하기 위함이었어요. 일방적인 사랑이라 가르쳐주지 못했지만요(웃음). 그리고 이 깃털은 아담이라는 폴란드 번역자가 준 거예요. 폴란드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작은 새의 것이라면서 건네더군요. 아담과는 사건 사고가 많은데요. 어디선가 풀어놓게 될 거예요.
재미있는 일들이 많네요, 국제 번역자 모임 같은 곳에서 만난 분들인가요?
프랑스의 작은 도시 아를Arles의 번역자회관CITL에서 만난 친구들이에요. 이들과 함께 작가와 작품 그리고 번역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비로소 번역가로서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갖게 됐어요. 벌써 10년이 넘게 그 인연이 이어지고 있네요. 가끔 프랑스어권 번역자들과 수다를 떨다가 지치면 제가 “이제 한국말로 하자”고 제안해요. 그럼 다들 호기심에 찬 눈으로 선뜻 해보라고 하죠. 제가 한국말을 마구 쏟아내면 가만히 듣고 있다가 “너 혹시 이런 얘기한 것 아니야?”라고 묻는데 대부분 맞아요(웃음).
에세이 서문에서 읽었는데 아를에서의 일화들이 흥미로운 것 같아요.
아를이라는 도시와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 문학과 번역, 삶과 사람에 대한 걸 지금 신나게 쓰고 있어요. 그 책이 내년쯤 나올 것 같아요.
어떤 내용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첫 책을 내고 마음에 걸렸던 게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글들이었다는 점이었어요. 이미 그 글을 읽었던 사람이라면 돈 주고 산 책에서 같은 얘기가 나오는 거잖아요. 되도록이면 한 번만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래서 아를의 친구들 이야기는 조금 아껴두려고요. 혹자는 글을 쓴다는 게 자아를 잘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글이든 말이든 자기를 드러내는 데도 어떤 기준이 필요하다고 느껴요.
그래도 오랜 꿈을 이루신 건데 감회가 새로울 것 같아요.
앞으로는 번역 일을 줄이고 쓰는 데 집중하려고 해요. 나이를 먹으니까 이제 허튼소리를 덜할 수 있겠다, 내가 쓴 글이 덜 부끄럽겠다 싶어서요. 저는 지금이 좋아요. 너무 젊지 않고, 너무 늙지 않은 상태. 지난해 앨리스 먼로Alice Munro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죠. 그녀의 나이가 여든이 넘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재작년인가 캐나다에서 제일 큰 섬인 빅토리아섬Victoria Island에 간 적이 있어요. 공기가 따뜻하고 여유로운 곳이라 은퇴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인데요. 시내 관광을 하다가 먼로 책방을 발견했어요. 대형 서점과는 다르게 주제별로 책을 모아놓는 게 재미있더라고요. 한참을 구경하다가 책을 몇 권 사서 나왔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앨리스 먼로의 첫 번째 남편이 운영하는 서점이었어요. 처음에는 같이 했겠죠. 어쨌든 먼로가 이런 말을 했어요. “다림질을 하다 말고도 글을 썼다, 그렇게 30년을 썼더니 되더라.”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제 앞에 아직 30년이 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서요.
이건 힘든 질문이 될 것 같아요. 근래 슬픈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다섯 자매 중 셋째인 전 바로 밑의 동생과 참 친했어요. 왜 살다 보면 눈에 띄지 않는 보석 같은 사람들 있잖아요. 한창 대화 중에 ‘아 내가 지금 참 특별한 누군가와 있구나.’ 하는 깨달음으로 자세를 바로 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요. 그 친구와 친한 몇몇 사람들만 아는 특징이에요. 꽤 오랫동안 병을 앓았는데 역설적으로 저에게 많은 행복과 깨달음을 주고 갔어요. 이제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라면 어떻게 하라고 할까, 하고 그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길이 보여요. 덕분에 제가 조금 나은 인간이 된 것 같아요.
요즘은 모친께서 병상에 계시니 간병 때문에 새벽같이 일어나요. 창을 열고 동쪽에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아요. 야행성인 제가 지금까지 못해본 일이거든요. ‘아, 이건 불면과 피로와 더불어 간병이 주는 선물이군’ 하고 느껴요. 가족이란 그런 거죠. 기꺼이 주고받는 무한 책임 같은 것. 어느 순간 모든 것에 고마운 마음이 생겼어요. 가족에게도, 동료에게도 그리고 이 우주에게도요. 되도록이면 즐겁게 지내고, 더럽히지 않고, 누군가를 돕고, 그렇게 살다가 잘 사라지자, 그런 생각을 해요.
번역 외에 살면서 꾸준히 해온 일이 있으신가요? 자기만의 습관이라든지.
바느질해요, 음악 들으면서요. 음악 들으면서 책은 읽기 어려운데 바느질은 하기 좋아요. 뭘 만들고 그런 건 아니고, 단추를 바꿔 단다거나 마음에 안 드는 옷의 장식, 호주머니, 깃, 심지어는 소매 같은 걸 떼어내요. 줄이거나 늘이고 가끔 달기도 하지만 주로 떼는 편이에요(웃음). 식구들이 뭘 그렇게 맨날 떼어내느냐고 하면, 해체주의를 손으로 이해하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하기도 했어요. 실제로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재킷을 만지작거리다가 옷 전체의 솔기를 모두 뜯어낸 적이 있는데요. 비로소 재킷을 ‘이해’한 기분이 들었어요. 아, 그리고 스트레칭도 좋아해요. 요가는 힘을 빼면서 힘을 주는 운동이에요. 그 과정에서 명상이 되죠. 거창하게 말해서 명상인데, 몸을 수행 안에 두고 가만히 정신을 가다듬고 들여다보는 거예요. 그러면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흙탕물이 가라앉아 윗물이 맑아지면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 나중에 앨리스 먼로의 나이쯤 되면 할머니들을 모아놓고 요가를 가르칠까 해요(웃음).
번역가 김남주가 추천하는 책
행복해서 행복한 사람들
야스미나 레자 지음 | 김남주 역 | 뮤진트리 | 276쪽
최근 들어 가장 신명나게 번역했고 작업하는 내내 역자에게 행복함을 주었다는 책. 저자인 야스미나 레자는 프랑스의 유명한 극작가다. 그녀가 쓴 희곡은 몇 차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18명의 인물을 통해 삶, 행복, 고독, 죽음에 대해 말하는 한 편 한 편의 짧은 소설들이 마치 잘 짜인 연극을 보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살아 움직인다. ‘지금 여기의 프랑스 문학’이라는 표현에 걸맞는 작품!
녹턴 – 음악과 황혼에 관한 다섯 가지 이야기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 김남주 역 | 민음사 | 257쪽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여섯 편의 출중한 장편들 후에 내놓은 소설집. 읊조리듯 서술되는 문장 속에 깃든 슬픔, 금욕과 위안을 결합시키는 작가 특유의 방식이 독자를 위로한다. 역자는 그의 소설을 이렇게 말한다. “결코 눈부시진 않지만 지나치게 암울하지도 않은 삶의 순간들을 이렇게 적절히 그려내다니!”
어느 번역자가 인생의 절반을 보낸 언어의 정원에는 깨진 사금파리나 떨어진 잎사귀, 흙 묻은 신발보다 훨씬 더 멋지고 심각한 것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엿본 그곳은 여느 정원과 같았다. 한철 만개한 꽃들 사이에서 마음껏 행복하다가도, 계절이 지나는 것도 모를 만큼 정성을 다해 키운 것들이 다시 고개라도 떨굴 참엔 눈 앞이 아득해지고 마는. 그녀의 말대로 ‘이국어가 담고 있는 풍요를 잡으려는 시도는 삶이 죽음으로 끝나듯 실패가 예정된 작업인지도 모른다. 다만 얼마나 제대로, 기분 좋게, 아름답게 실패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기억하며 또 한 권의 책이 내게 오길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에디터 오혜진
포토그래퍼 박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