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는 편지

배순탁

‘편지’ 하면 어쩔 수 없다. 여러분 중 대다수가 싫어할 것이 분명한 군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나는 1998년에 입대해 2000년에 제대했다. 즉, 군 생활 내내 인터넷이라고는 접해보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혹시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천도리 가봤나. 진짜 춥다. 여름에는 또 무지하게 덥다. 그렇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내 군 생활에 숨통이 되어준 존재는 오직 하나, 편지뿐이었다.

안부를 궁금해한다는 것

편지가 오면 기뻤고, 편지가 오지 않으면 우울했다. 유독 편지를 많이 받는 동기는 곧 동경의 대상이었다. 괜히 그의 편지 내용이 궁금했고, 그가 어떤 사람과 교류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랬다. 어리석은 나는 군대에 가서야 겨우 절감했다.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고, 누군가가 내 안부를 궁금해한다는 게 삶에 있어 얼마나 귀한 행동인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불현듯 배우 고故 키키 키린Kiki Kirin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나는 어떤 한 직업에 오래 종사한 사람의 인터뷰를 찾아서 꼼꼼하게 정독하는 버릇이 있는데, 정말 인상적인 인터뷰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유는 글쎄, 소설가 김훈의 다음 언급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 같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할 수 없지만 내용은 대략 이랬다. “책이라고는 거의 읽지 않았지만 평생을 농사일에 바친 사람과 얘기 나눠보라. 그 사람이 철학자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을 테니까.”

별거 아닌데

(물론 책도 많이 읽으셨겠지만) 키키 키린의 인터뷰가 나에겐 그랬다. 당시 인터뷰는 그가 암 투병 중에 이뤄진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인터뷰를 읽는 내내 그에게 다가올 죽음의 그림자가 글자 뒤에서 일렁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인터뷰에서 키키 키린은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죽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누구든 인생의 어딘가에서 꿈이나 이상을 포기할 때가 옵니다. 그렇다 해도 ‘아, 차가 맛있구나.’, ‘아, 무사히 태풍이 지나갔구나.’ 하고 사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어떤 현실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이 인터뷰를 다시 보면서 안부를 묻는다는 행위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당신에게 안부 묻는 것은 뭐 특별한 이벤트가 있어서가 아니다. 안부는 평범한 일상 속에 스며들 때 도리어 의미를 지닌다. 차가 맛있다는 것, 태풍이 지나갔다는 것, 이 모든 게 나의 안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기어코 자주 안부 물어야 한다. 안부는 어디까지나 다다익선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언제나 후회한다. 뭐가 그렇게 바빠서 돌아가신 아빠에게 자주 안부 묻지 못했던 걸까. 내일은 한동안 안부 묻지 못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아니다. 지금 방금 전화했고, 4월 중 꼭 만나기로 했다. 이 세상에는 하고 나면 참 별거 아닌데 이상하게 잘 안 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 바로 안부 묻기가 아닐까 싶다.

‘가을편지’

김민기

봄이지만 어쩔 수 없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라는 노랫말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속은 무너지는 동시에 충만해진다. 이런 곡을 ‘애정한다’. 모순적인 방식으로 나를 기어코 쭉 끌어당기는 곡들. 맑고 청아한 양희은의 재해석도 좋지만 역시 김민기의 설득력을 넘어설 순 없다. 원곡은 1970년 최양숙. 굳이 편지로 안부 묻지 않아도 괜찮다. 전화기를 들고 당장 안부를 묻자. 상대도 당신의 안부를 마침 궁금해하고 있을 테니까.

[Past Life Of Kim MinGi](2004)

‘꿈에’

박정현

안부를 차마 물어볼 수 없거나 안부를 묻는 게 불가능한 관계 또한 있다는 것, 잘 알고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꿈을 통해 상대의 안부를 묻는다. 더 나아가 상대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고는 마침내 안부 묻지 못하는 깊은 슬픔을 받아들인다. 내가 생각하는 박정현 최고의 곡이다. 더 나아가 2002년을 넘어 한국 가요 역사에 아로새겨야 마땅할 위대한 성취라고 확신한다. 정말이지 언제 들어도 소름이 쫙쫙 돋는다.

[박정현 Op.4](2002)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이승열

이 글을 쓰는 와중에 부고를 접했다. 영화음악가이자 유앤미블루의 멤버였던 방준석 씨의 사망 소식이었다.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의 음악에 열광했을 뿐이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암으로 오래 고생했고, 이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상하다. 아티스트의 죽음에 대체로 동요하지 않는 편인데 이 곡을 들으면서 눈물 흘렸다. 신해철 씨의 죽음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뉴스를 접한 뒤로 계속 이 노래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유앤미블루의 동료였던 이승열 씨가 방준석 씨를 위해 부르는 조곡弔曲처럼 들렸던 까닭이다. 이 곡으로 뒤늦게나마 그의 안부를 묻는다. 명복을 빈다.

[이 날, 이 때, 이 즈음에…](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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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순탁―음악평론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