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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디자이너 이용제
어쩌면 가장
단순한 그림
한글 디자이너 이용제
가끔 글자 위에 놓인 표정이나 말간 얼굴을 상상한다. 센과 치히로의 유바바처럼 글자를 쭈욱 떼내는 상상도 한다. 글자는 살아 있다. 그것들은 알게 모르게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글자의 의미가 아니라 다양한 그 얼굴 표정들이 말이다. 덜고 더하고 긋고 지우고 하면서 새로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니 이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간단하고 짧은 그림일지 모르겠다.
INTERVIEW 한글 디자이너 이용제
활자의 흔적을
좇아 가는 일
요즘엔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계원예술대학교와 타이포그래피 학교 ‘히읗’에서 활자 디자인 수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또 요즘에는 먹고사는 문제에 관심이 많아요. 활자 디자인이라는 일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보니 이런저런 고민을 안고 있는 학생들이 많거든요. 물론 이게 활자 디자인만의 문제는 아니겠죠. 디자인 동네에 있는 사람들, 또 앞으로 겪을 학생들의 이야기니까요. 그래서 문제 해결의 일환으로 수업 중 학생들이 창업 아이템을 내는 시간도 마련했어요. 학생들은 재미난 발상이 많은데 다듬어지지 않거나 이걸 어떻게 구체적으로 발전시킬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이 부분을 지도해 나가고 있죠.
‘히읗’에서는 어떤 일을 하나요?
타이포그래피 학교에서는 학생을 가르치고, 《히읗》 잡지도 출간하고 있어요. 타이포를 활용한 여러 제품도 만들죠. 제가 하는 일을 보고 주변에서 “넌 별 걸 다 한다.”라고 하더라고요.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작업을 아주 좋아해요. 특정한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생각을 공유할 단초가 될 수 있으면 무조건 만들지만, 그렇지 않다면 만들지 않아요. 히읗을 처음 시작할 때 활자 디자인을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을 받아줄 회사가 되고 싶어서 다양한 활동을 시작했죠.
《활자흔적》에는 근대 한글 활자의 역사가 섬세하게 정리되어 있더라고요.
대학에서나 히읗 내 수업에는 계속해서 학생들과 생각을 나누어요. 그런데 수업에는 교재가 필요하기 마련이잖아요. 처음에는 제 경험을 위주로 진행했어요. 하지만 그것도 점점 고갈되면서 한계에 부딪히더라고요.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좋은 활자 디자인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찾아보기 시작했죠.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근대 한글 활자 디자인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인쇄된 옛 책에 흔적만 남아 있죠.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찾아내고 조사한 자료를 정리한 게 《활자흔적》이에요.
한국사 서체 자료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들었어요. 여전히 지금도 자료가 부족한가요? 한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이런 부분이 제기되고 있는지 궁금해요.
안타깝지만 현실을 말하자면 옛 자료를 찾아가면서 한글 디자인을 하고 있는 디자이너들이 많지는 않아요. 당장 주어진 요구에 맞추어 일을 하는 것도 쉽지가 않기 때문에 과거 자료를 찾거나 궁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거죠.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전쟁, 산업 부흥기 등 백 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어요. 우리와 문화라는 낱말은 거리가 멀었죠. 어느 분야나 똑같은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음악이든 무용이든 영화든 정리가 되어 있지 않거든요. 아주 깊이 들여다보고 어떻게 이어왔고 연결되어 있는가를 연구한 적이 없던 거예요. 다들 안 하려고 하지만, 안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죠. 제가 괴로워하고 싫어하고 화내고 했던 상황들에 대해서 나는 모르겠으니 이건 원래 그렇다는 식으로 후배 세대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 싶지 않았어요.
활자 디자인이 대중적인 관심을 얻은 지는 얼마 안 되었어요. 시각 디자인 내에 굉장히 다양한 분야가 있는데 활자 디자인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나요?
서체는 과거에 인쇄업자들만이 다루던 영역이었죠. 90년대 이후 포토숍이 나오면서 일부 서체가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일반인들에게 널리 각광받기 시작한 건 아무래도 싸이월드에서 서체를 구입하면서가 아닐까 싶어요. 싸이월드가 서체의 세상을 열어줬죠(웃음).
한글은 가로로 읽는 글이어서 그런지 선생님이 제작하신 세로쓰기용 서체가 눈에 띄어요.
원래 한글은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읽는 글이죠. 옛 신문뿐만 아니라 한글이 만들어질 때부터요.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지만 교육의 부재 탓도 있어요. 너무 익숙해진 탓에 과거를 잊어버린 거예요. 딱히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고 자주 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모를 순 있지만 모르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세로쓰기 서체는 문화적 측면에서 재조명하고 싶었던 건가요?
세로쓰기용 서체의 시작점은 사실 지극히 개인적인 지점이었어요. 돌파구를 찾고 싶었거든요. 제가 학생 때 난데없는 이상한 것들만 만들다 보니 사람들이 읽기 어려운 모양이거나 기존 글자와 아주 똑같은 서체만 나오더라고요. 지식의 한계도 있었고, 경험도 부족했고요. 한글 디자이너로서 고민이 아주 많았어요. 그때 의도적으로 세로쓰기용을 만들어 보자고 생각하면서 디자인을 시작했죠.
서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요?
활자 디자인 과정은 일반 시각 디자인 과정과 유사해요. 제가 수업을 하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이 있어요. “활자는 내가 쓰려고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얼마큼의 시간이 걸리든 내가 쓰기 위해서 서체를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어떤 상황에서 누가 쓸 것이고 무엇을 표현할 것인지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길 바라는지까지도 전제적인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해요. 그 상황을 상상하지 않고 만든다면 뭉개지거나 찢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이게 가장 중요해요. 목적이 분명해지면 적합한 자료를 찾고 디자인을 하죠. 내가 지닌 감각에만 의존해서 만들 수 없어요. 사용 대상이라고 하면 아주 다양해요. 미취학 아동부터 성인, 노인 저시력자 등. 이런 배려를 하지 않고 만든 글자는 예쁠지라도 편안한 읽기 환경을 제공할 수 없죠.
서체에 이렇게 사람을 향한 걱정이 담겨 있는 줄 몰랐어요.
아이들의 경우 지각능력에 따라서 기울기, 굵기, 방향 등이 바뀌어요. 더 나아간다면 아이들의 정서까지 감안할 수 있겠죠. 딱딱하게 보일 거냐 부드럽게 할 거냐 귀엽게 할 거냐 하면서요. 단순히 정보 전달용인지 정서적 미감도 함께 다루어야 하는지도 고민해야 하고요. 대표적인 게 교과서 활자예요. 아마 요즘 어린 친구들은 교과서용 활자로 공부하지 않았을 거예요. 디지털 서체가 이용된 교과서나 참고서를 이용했을 테니까요. 옛날에는 교과서용 서체라고 해서 복잡한 고민을 더하고 덜어서 만든 서체가 있었어요. 단순히 읽기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쓰기를 위한 것, 앞서 말했던 정서와 미감까지 녹아들어가 있죠. 그런데 요즘은 그런 부분을 전부 다 거두어 내고서 ‘읽을 수 있으면 됐지’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 같아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쉽게 생각하겠죠. 시각문화의 중요성이 크게 와 닿지 않은 거죠.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들이 그런 시선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해요. 작은 부분을 무시하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사람의 마음이나 정서, 공감각의 필요성을 외면해온 거죠.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면 중요한 건 다들 알아요. 다만 각자의 현실로 돌아가서는 다시 아주 좁쌀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죠.
그렇다면 서체가 우리 삶에 어떤 문화적 영향을 끼치는 걸까요? 다시 말하면 서체가 다양하기 때문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요.
제가 되묻고 싶어요. 시인들이 왜 시를 쓸까요?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는 왜 그렇게 글을 쓸까요? 어차피 사람들이 다 못 읽을 텐데 말이에요. 작품 수가 많아지는 게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요? 평생 읽어도 다 못 읽을 텐데.
다양성이 우리 사회를 지지해주기 때문일까요? 개인적으로 현대인이 겪을 수많은 재앙 중 하나가 문화적 빈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창작이라는 지점에서 보면 시도 그렇고 서체도 그렇고 백 년 전의 창작물과 지금의 창작물에는 공통점도 차이점도 있어요. 인간으로서의 공통점, 인간 감정으로서의 공통점. 그리고 생활이나 주변 환경에 대한 차이점이 있겠죠. 시어 하나를 꺼내올 때 당대 사람이 느낄 수 있거나 쉽게 전달하는 지점들이 분명 있을 거예요. 글자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이 시대에는 이 시대의 활자가 필요할 뿐이거든요. 하지만 미래에는 미래의 활자가 필요하겠죠. 사람들의 사고, 기술환경, 매체 등이 전부 바뀔 테니까요. 그것의 해답은 과거에서 참고하고 바꾸어보고 시도해보면서 찾을 수 있고요. 우리가 문학가들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잖아요. 이미 명시는 많으니 굳이 우리가 시를 쓸 필요가 없지 않냐고.
가끔 서체를 쓰다 보면 특정 크기가 넘어가면 깨지는 경우가 있어요. 만드는 사람이 해당 서체의 어울리는 크기를 지정해두나요?
오래전에 만들어진 서체들 중에 특정 사이즈가 넘어가면 울퉁불퉁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죠. 빨리 만들어야 해서 혹은 안일하게 생각해서 그렇게 작업되었던 것 같아요. 아주 작은 글자니까요. 요즘에는 디지털로 만들기 때문에 그런 문제는 거의 없어요. 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가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잖아요. 글자를 디자인하는 데에 상당한 이로움과 혜택을 받고 있죠. 예전에는 하나하나 그렸어야 했는데 지금은 그려놓고 복사, 붙여넣기 해서 필요한 만큼 고치거든요. 작업 속도가 과거에 비해 확연히 빨라졌죠.
서체가 디지털화되기 전과 후에도 차이점이 있나요?
옛날에는 서체 하나를 그리면 일정 범위의 크기에서만 쓸 수 있었어요. 물리적인 제약이 존재했던 거죠. 다른 크기의 서체가 필요하면 또 찍어서 그리고, 또 찍어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각각의 크기마다 공간 배분, 비례, 곡선모양까지 적절한 작업을 해온 거예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서체가 되죠. 그런데 작업이 길어지고 복잡하다 보니 이용할 수 있는 서체 크기는 10에서 12포인트로 한정되어 있었어요. 물론 쓰는 사람들은 조금만 더 컸으면 하는 불편을 느낄 순 있어요. 하지만 그려둔 서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완성도가 높았다고 생각해요. 지금 보면 디지털 서체로 한번에 그리고 확대, 축소를 하니까 10포인트일 때는 공간이 갑자기 메워지고, 조금만 더 커지면 공간 배분이나 비율이 달라지는 문제도 있죠.
간결함과 편안함
그 중간 지점
서체 중에서 헬베티카Helvetica가 간결하기로 유명한데, 외국에 헬베티카가 있다면 한국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어떤 측면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은데, 유사함으로 보면 윤고딕체가 있겠죠. 헬베티카가 대중적인 데 비해 활자 디자이너에게 환영받지는 않아요. 1957년에 만들어졌으니 굉장히 오래되었죠. 시대적으로 본다면 당대에 정말 잘 만들어진 서체임에는 분명해요. 헬베티카 그 자체를 시대정신이라고 부를 정도니까요. 그런데 모든 것에는 유효함이 있잖아요. 2000년대를 넘어서까지 이어오는 맹목적 추종이 있는데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아무런 고민 없이 쓰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과 함께요. 헬베티카는 커다란 제목에 쓰기 좋아요. 만들어진 배경도 그랬고요. 그러다 보니 글자와 글자 사이에 공간이 좁아요. 반대로 말하자면 제목에 쓰면 아주 효과적이라는 말이죠. 그런데도 대중이 워낙 좋아하다 보니 10포인트에도 쓰고 아주 조그만 글자에도 쓰게 된 거예요. 목적성과 전혀 다른 방향인 거죠. 그러려다 보니 글자 사이를 일부러 조금씩 벌리기 시작했어요. 오리지널리티를 점점 잃어가는 게 아쉬움을 샀죠.
말이 글이 되는 과정은 대부분 내용만 생각해요. 눈에 보이고 이미지적인 부분으로 접근해 보자니 서체야말로 글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자체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직접적이고 간결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아요.
서체에도 여러 유형이 있죠. 아주 극단적인 간결성이 드러나는 것부터 기능적인 부분을 거려한 것까지. 저는 모던하고 간결한 서체를 아주 좋아해요. 미니멀리즘이야말로 모더니즘 초기의 패러다임에서 파생된 하나의 현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미니멀리즘이 나온 계기는 본질에 대한 자각이에요. 단순히 눈에만 보이는 형태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궁극의 본질, 궁극의 모습 그 자체만이 남아 있을 때가 중요한 거죠. 저 같은 경우도 뭐든지 진지하게 접근하고 파고들어야 직성이 풀려요. 본질적인 부분을 난도질을 해놔야 안심이 된달까요. 다 열거해놓고 보아야 정확히 그 알맹이를 파악할 수 있어요.
바람체가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가장 뿌듯했던 쓰임이 있었나요?
여기저기에서 충분하게 잘 써주셨어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과분한 사랑을 받았거든요. 간판이나 포스터나 앨범, 도서 등 다양한 곳에서 쓰이고 있어요. 잘 활용되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아주 좋죠.
가수 아이유의 ‘꽃-갈피’ 앨범의 글씨체가 바람체더라고요.
그거 보고 연락해 온 사람이 정말 많았어요. 혹시 디자인 네가 한 거 아니냐면서요(웃음).
모두를 위한
디자인
제가 어렸을 적에는 학교에서 서예를 배웠어요. 서체에 따라서 획을 시작하는 법, 붓을 잡는 법도 모두 다르게 가르침을 받았죠. 한글 디자이너로서 반가운 이야길 수 있겠어요.
거기서부터 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서양이나 동양이나 단절되지 않고 잘 지속되어온 문화에는 대부분 역사적인 맥락이 있어요. 아주 오랫동안 그 시대상에서 아름답다고 평가받은 글씨체가 있잖아요. 요즘에는 손글씨를 많이들 좋아하고요. 최고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이유가 많겠지만 글자가 안정적인 조화와 높은 품질을 갖추었겠죠. 그걸 기반으로 지금의 활자를 그린다면 또 다른 높은 품질의 서체가 나올 거예요. 일본, 중국은 그런 기록과 보관이 잘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에게 기껏해야 궁서체만이 남았었죠. 궁서체를 발견하고 그것을 복원하는 데만 급급했지 어떻게 변형하고 현대화 해야 할지 고민하지 못했던 점이 아쉬워요.
빅터 파파넥의 《인간을 위한 디자인》을 보면 디자이너의 책임을 물어요. 인간의 내면 깊이를 파악하지 않은 상품을 쏟아내면서 쓸데없는 소비가 이루어지는데 디자이너들의 책임이 크다고 말이죠. 한글 디자이너에게도 이런 책임이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전적으로 동의해요, 전적으로. 대학생 때 가장 잘했다고 생각한 일은 빅터 파파넥의 책들을 읽은 거였어요. 책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가 떠올리면 단연 그 책을 꼽아요. 디자이너들은 그런 점에 관해 책임을 져야 하죠. 그리고 글자 디자이너라면 더더욱 책임을 져야 하고요. 왜냐하면 이들은 공공재를 만드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에요. 공공公共은 사람들과 함께 공동으로 이용하는 거잖아요. 더욱 무거운 책임을 질 줄 알아야죠. 이 책은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더 좋은 삶을 살고 싶은 이들을 위한 지침서 같아요. 그런데 제목에 있는 인간이라는 단어에 과하게 방점이 찍힌다면 상황은 달라지죠. 인간만을 위한 디자인이 돼버리니까요.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란 인간만을 위한 디자인이 절대 아니거든요. 최근에 초고속 기차가 나온다는 뉴스를 보았어요. 초고속이라는 건 구간이 직선이어야 한다는 거거든요. 지구라는 지형이 직선을 갖고 있을 리가 없어요. 또 얼마나 산을 깎고 땅을 파고 묻고 했겠어요. 이런 것이 바로 인간만을 위한 디자인인 거죠.
저도 가끔 나의 편안함과 뒤바꾼 객체는 무엇인가 생각을 하곤 해요. 특히 여행 갈 때 그런 고민을 많이 하는데 그러면 그 순간부터 여행이 즐겁지 않죠. 근데 제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개인적으로 보이콧을 정말 잘하는데 이게 과연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떠올리면 금세 좌절감이 들거든요.
할 수 있는 일 없죠. 맞아요, 없어요. 괴롭죠. 최소한으로 쓰거나 구매를 거부하는 게 그나마 적극적인 방법이긴 하죠. 제가 자주 하는 말인데, 포스터에 “나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라고 썼던 적이 있어요. 그리고 뒤집어서 그 밑에 “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라고 적었죠. 한 명의 디자이너로서 사회의 불합리한 일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어요. 가끔 내가 무언가를 만드는 게 결국엔 쓰레기를 생산해내는 일 같기도 하고요. ‘이미 내가 만들지 않아도 충분해, 혹은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만들어 낼 거야’ 하는 식의 생각이 밀려오는 거예요. 그럴수록 이게 이 세상에 정말 필요한지를 계속해서 판단하고 되새겨요. 내 손으로 무언가를 생산해서 쓰레기로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요. 사람들이 ‘네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세상은 바뀌지 않아’라는 말을 하죠. 맞아요. 저는 세상 전체를 바꿀 수는 없어요. 그러나 내가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에 내가 바뀐 거면 세상도 바뀐 거예요. 그러니 나는 세상을 바꿀 수는 있다는 거죠. 아주 어렸던 스무 살 초반에 형이 묻더라고요. “네가 세상의 오염을 다 껴안고 갈 수 있는 대신 넌 죽어. 어떡할래?” 그래서 그럼 죽겠다고 대답했더니 형이 말하더라고요. “네가 그렇게 대단해?”
그렇다면 디자이너들의 더 나은 책임 의식을 위해서 활자 디자인에 반드시 담겨야 할 것이 있나요?
아까 글자는 공공재라고 했잖아요. 디자이너로서 활동을 하면서 파파넥의 말을 들었을 때, 세종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임금이 무슨 부족함이 있겠어요, 심지어 그 시절에. 조선시대에 임금은 아버지고 백성은 자식이라지만, 모든 임금이 백성을 다 자식같이 생각했던 것 같진 않아요. 그러니 그건 단순히 관계를 드러내는 말일 뿐인 거죠. 그런데 세종은 진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문자를 몰라서 사람들이 겪은 어려움의 기록이 있잖아요. 그는 정말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이 들었겠죠. 그렇기 때문에 간결하고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를 만들었겠죠. 백성의 편에서 서서 돌아본 게 아니었다면 무조건적으로 자기가 만든 것을 널리 퍼뜨리고, 무작정 배우라고만 했을 거예요. 정교하고 섬세하지만 배우기 어려웠을 수도 있잖아요. 가장 밑바탕에는 결국 그 사람의 마음이 그대로 녹아 있고, 그게 없으면 발현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좋은 결과물을 디자인하려면, 마음이, 인정人情이 있지 않으면 어려우니까요. 소위 말하는 측은지심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앞으로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가요?
사실 딱히 그런 건 없어요. 오랫동안 품은 있는 생각, 마음 변치 않고 계속해서 활동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돌이켜 보면 10년 전의 제가 갖고 있던 그때만의 고민과 생각이 있어요. 그리고 그때로부터 5년이 지나서는 그 전과 다른 고민과 생각이 있고요. 분명 그 둘이 달라요. 작업 결과물도 다르고요. 2009년즈음에 남긴 기록물을 보니 거기서 변화된 저를 보았어요. 그땐 고민도 못했던 것을 지금은 고민하고 있고, 풀어가려고 하고 있기도 하죠. 알지 못했고 눈치채지 못했던 부분들이 이제는 눈에 보여요. 방법론적인 것부터 기능적인 것들까지 지금은 그때보다 떠오르는 게 있는 거죠.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5년 뒤에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생각까지 할 수 있을까, 그때 나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눈에 무엇이 보일까 궁금해요. 설레고요. 계속 성장하고 싶어요. 저의 안목이든 지식이든 경험이든. 기대되는 거죠. 몇 년 전의 저와 지금의 저를 비교하면 그래요.
에디터 이자연
포토그래퍼 오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