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과 아이의 희미한 경계

동화책과 소설책 사이

어른과 아이의 희미한 경계

동화책과 소설책 사이

페이지를 커다랗게 차지한 그림, 화려한 색깔, 가끔 없기도 한 짤막한 대사, 비중이 높지 않은 글자 수. 어른의 세계를 구현하기에 장치가 부족해 보이는 탓일까, 대게 동화책이라고 하면 아이들을 위한 서적이라고만 여기곤 한다. 하지만 정작 동화책을 펼쳐 읽어보면, 어른의 세계를 똑 닮아있어 어딘가 모를 익숙함을 느낄 수 있다. 여느 고전소설이나 유명한 현대소설과 동화책의 경계는 정말 있는 걸까? 실은 다른 얼굴을 하고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을 보내는 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노희경 지음ㅣ북로그컴퍼니

엄마는 이따금 친구가 되고, 의사가 되며, 재단사가 되고, 대변자도 되어준다. 과연 ‘엄마’라는 자리만큼 사람들에게 일상적인 것이 있을까. 소설 속 엄마는 자궁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일상적인 것은 익숙해져 곧잘 소중함을 잊게 마련이고, 가족들은 혼란스러움에 갇힌다. 엄마가 없을 언젠가를 떠올려 상상하는 일은 아주 고통스럽기 때문에 아직 시간이 남아있는 지금이 가장 소중한 순간이면서, 당장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밀려오는 암흑기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은 언젠가 죽는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왜 이렇게 잘 까먹는 것일까. 인간이 아주 작은 세포였듯 다시 서로의 세계로 돌아가 눈을 감는다. 마지막을 인지할 것, 서로의 이별을 받아들일 것, 하지만 너무 슬퍼하지 말 것. 삶이 주어진 모든 이들이 지켜야 할 순리다. 

“분명히 말하지만, 가능성이 있는데 손을 놓는 게 아니야. 엄마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으로 포기하는 길을 택한 거야. 이제 우리가 엄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야.”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게 고작 엄마를 포기하는 일뿐이라니… 연수는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기라도 하는 것처럼 쓰라렸다. 집에 와선 손 하나 까딱 않고, 그것도 모자라 늘상 바깥일 힘들다고 짜증이나 내던 딸이, 마지막으로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엄마를 포기하는 일뿐이다.

할아버지의 섬
벤지 데이비스 지음ㅣ예림아이

할아버지를 무척 사랑하는 꼬마, 시드. 어느 날 할아버지 댁 다락방에 올라갔다가 작은 쪽문을 발견한다. 문을 열어보니 드넓은 바다와 커다란 배 한 척이 있었다. 뱃고동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와 작은 섬으로 떠난 시드는 신나게 나무집도 짓고, 물놀이를 하고, 신선한 과일을 따 먹으며 지냈다. 그때, 섬에 남겠다고 말하는 할아버지. 시드가 심심하지 않겠냐며 걱정 어린 말을 전하자 동물 친구들을 바라보며 괜찮다고 답한다. 홀로 큰 배를 몰아 바다의 풍랑과 씩씩하게 싸워 집으로 돌아온 시드. 할아버지 집에는 쪽문도 항구도 그리고 할아버지도 없었다. 다락방은 아주 조용했다. 그곳에 살았던 사람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의 머릿수만큼 이별의 방식이 있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시드는 차마 내비치지 못한 마지막을 어떻게 추스를 수 있었던 것일까.

“시드,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할아버지는 여기에 남아야 할 것 같구나.”
“네? 하지만 혼자서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요?” 시드가 물었어요.
“아니, 그럴 것 같진 않구나.” 할아버지가 섬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어요.

‘답게’라는 말에 얽매지 않기

작은 아씨들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ㅣ동서문화사

《작은 아씨들》은 평화로운 시골 마을 네 자매의 성장과 가족생활을 한 폭의 그림처럼 담아내고 있다.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첫째 메그, 글 쓰는 일을 사랑하는 말괄량이 조, 쑥스러움을 잘 타는 베스, 명랑소녀 에이미까지. 각자의 성격이 모두 달라 이들이 한데 모여있으면 금세 왁자지껄해진다. 좋은 사람을 만나 평온한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당시, 둘째 조는 결혼은커녕 모험이나 말을 타는 일, 운동을 하고 글을 쓰는 일에 더 관심을 보였다. 가족들은 조를 보며 왈가닥 계집애라고 꾸짖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눈과 마음을 두었고 그로부터 행복을 얻었으니 말이다. 조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자다움’에 발맞추려 하지 않았으며, 매사에 자신의 행복을 중심에 두고 자유롭게 판단해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 충고는 사양하겠어. 얌전한 고양이처럼 하루 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건 내 체질에 안 맞아. 게다가 난로 옆에서 꾸벅꾸벅 조는 건 딱 질색이야. 난 모험이 좋아. 나가서 재미있는 일을 찾아볼 거야.”

종이 봉지 공주
로버트 먼치 지음ㅣ비룡소

엘리자베스는 부드럽고 값비싼 비단으로 만든 호화로운 옷을 좋아하는 공주다. 그녀가 사는 성에도 역시 그녀가 좋아하는 옷들로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서운 용 한 마리가 나타나서 공주의 성과 옷, 소지품을 불로 태워버리고 이미 약혼한 왕자를 납치해버렸다. 왕자를 구하러 가기 전 입을 게 없던 공주는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종이 봉지를 주워 입었고, 끝내 임기응변으로 용을 물리치게 되었다. 숱한 장애를 이겨내고 만난 왕자는 엘리자베스를 보자마자 말했다. “너 꼴이 엉망이구나? 아이고 탄내야. 진짜 공주처럼 챙겨 입고 다시 와!” 그를 보고 엘리자베스는 아주 단호하게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 ‘00다움’이 가득한 사회에서 과감하게 종이 봉지를 입고 왕자를 구하러 떠난 엘리자베스. 그녀가 벗어 던진 것은 이미 타 버린 드레스였을까 아니면 그녀를 구속하던 무언가였을까.

“그래 로널드, 넌 옷도 멋지고 머리도 단정해. 진짜 왕자 같아. 하지만 넌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야!”

후두둑, 비 내리는 어느 날

소나기
황순원 지음ㅣ맑은소리

문학작품에서 비는 다양한 의미와 장치를 갖고 있다. 우울한 분위기로 사건의 전개를 고조시키거나, 비에 흠뻑 젖고 말갛게 씻겨진 모습을 통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암시하면서 말이다. 《소나기》에 등장하는 소녀는 자신이 죽을 때 소년의 등에 업혔을 적 물이 든 스웨터를 함께 묻어달라고 했고, 소년은 소녀에게 차마 전해주지 못한 호두 두 알을 주머니 속에 늘 넣고 만지작거렸다. 서로의 마음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차마 알아차리지 못한 순간에 서로에게 흠뻑 빠져버린 것이다. 수많은 비 중에서 하필 ‘소나기’가 내린 것은 아마도 그 어떤 빗줄기보다 세차고 강렬하게 내려서일 것이다. 소녀에게 개울가로 한 번 더 나와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던 소년이 되뇌던 말이 떠오른다. “바보 같은 것, 바보 같은 것.”

“그러다가 소녀가 물 속에서 무엇을 하나 집어 낸다. 하얀 조약돌이었다. 그러고는 훌 일어나 팔짝팔짝 징검다리를 뛰어 건너간다. 다 건너가더니 홱 이리로 돌아서며 “이 바보.” 조약돌이 날아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일어섰다.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소녀가 막 달린다. 갈밭 사잇길로 들어섰다. 뒤에는 청량한 가을 햇살 아래 빛나는 갈꽃뿐.”

야호, 비 온다
피터 스피어 지음ㅣ비룡소

비가 내리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재잘재잘 행복하게 떠들고 있던 소녀들 등 뒤로 먹구름이 몰려오고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쏟아진다. 비바람에 빨래는 나부끼고 강아지는 폴짝폴짝 뛴다. 빗줄기는 세상을 엉망으로 만드는 듯 보이지만, 이러한 난동이 딱히 싫지는 않은 듯 아이들은 시종일관 웃고 있다. 우산을 이리저리 젖혀봐도 거센 바람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바닥은 금세 물웅덩이로 가득 찬다. 첨벙첨벙, 차박차박. 그림 속에서 소리가 난다. 물이 불어난 연못에는 개구리와 오리, 백조들이 모여들고 목말랐던 꽃송이들은 얼굴을 빼죽 내민다. 비에 쫄딱 젖은 아이들은 뜨거운 물에 거품 목욕을 하고 머리가 아직 축축한 채로 따뜻한 차를 마신다. 볕에 쐬어서 폭신한 이불에 몸을 감은 순간에, 그윽한 달빛 아래로 비가 멈추었다. 비가 내리는 자리의 풍경이 이토록 다양하다. 《야호, 비 온다》에는 어떤 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빗줄기와 아이들, 비를 맞이한 모든 생명의 모습이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책을 읽고 있으면 어디선가 어느 비 내리는 날의 소리가 생생히 들려온다.

이웃과 함께 살아가기

새의 선물
은희경 지음ㅣ문학동네

여섯 살에 어머니는 전쟁 중 목매달아 자살했고 아버지는 행방불명됐다. 외할머니 밑에서 친척살이를 하는 열두 살 ‘진희’. 그녀는 늘 ‘세상이 내게 별반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열두 살에 성장을 멈췄다. 나는 알 것을 다 알았고 내가 생각하기로는 더 이상 성숙할 것이 없었다’고 굳건히 믿었다. 소녀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철없고 순수한 이모, 남편과 사별 후 외아들을 떠받들고 사는 장군이 엄마, 신분상승에 꿈을 두고 여러 남자를 꾀는 미스리 등은 우리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웃들이다. 하나같이 약하고 구구절절한 사연을 품고 있는 보통 사람들. 서로의 이름에 무던히 익숙해진 이들은 한 데 모여 어울렁 더울렁 그렇게 살아갔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거리낄 것 없던 그때, 서로의 문턱이 가장 낮았는지도 모르겠다.

아줌마들은 자기의 삶을 너무 빨리 결론짓는다. 자갈투성이 밭에 들어와서도 발길을 돌려 나갈 줄을 모른다. 바로 옆에 기름진 땅이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한 번 발을 들여놨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뼈 빠지게 그 밭만을 개간한다.

거리에 핀 꽃
시드니 스미스 지음ㅣ국민서관

높은 건물, 팔짱을 낀 어른들, 빠른 발걸음, 시끄러운 차도. 이곳은 도시다. 버스 정류장 사이로 침묵이 맴돌고 한시 바쁜 이들은 옆 사람의 눈조차 바라보지 않는다. 모자가 달린 빨간색 웃옷을 입은 한 소녀는 사람들 사이로 꽃을 발견한다. 자전거가 묶인 전봇대 옆에서, 우스꽝스러운 조각상 앞에서, 아스팔트 거리 위에서, 낡은 담장 사이에서 아이는 꽃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꽃을 우리 주변의 누군가에게 나누어준다. 죽은 새, 벤치 위에 잠이 든 노인, 목줄이 긴 강아지,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자신에게까지도. 뿌리내리는 것조차 힘겨운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누군가의 시선조차 닿지 못했던 꽃들은 이웃들에게 서서히 다가간다. 아니다. 다가간 것은 다름없이 소녀였다. 어떤 대화도 등장하지 않지만, 꽃을 나누는 순간이 그 빈틈을 꽉 메운다.

바람을 타고 온 어느 소문

소문
고이케 마리코 지음ㅣ대교북스캔

단순한 호기심과 장난기 어린 마음으로 누군가의 치부를 들춰내는 악의적인 행동을 쉽게 웃어넘길 수 있을까? 소문과 장난은 본래 그 무게가 가벼워 쉽게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가는 속성이 있다. 파다하게 퍼진 소문이 기정사실로 변하는 과정을 통해 소문 주인공인 한 여인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 수 있다. 부잣집 노인들을 돌보는 전문 간병인인 다마요는 무뚝뚝하지만 일을 야무지게 해내는 전문 간병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돌보던 할머니가 실수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살인자라는 소문에 휩싸이고 만다. 게다가 돌아가신 할머니와 같은 동네에 사는 바람에 더욱 소문은 빠르고, 날카로우며, 아리다. 소문이 그녀에겐 어떤 형태로 다가갔을까? 그녀의 삶에 어떤 변화를 초래했을까? 그녀는 온전히 피해자일까?

“방은 따뜻하고 청결하고 화기애애했다. 갑자기 그는 이건 내 집이야 하고 생각했다. 구석구석 샅샅이 알고 있는, 방마다의 냄새까지 눈을 감고도 구분할 수 있는 내 집. 그런데 어째서…. “왜 그래요?” 아키코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하면서 다가와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며 그는 웃어 보였다. 어째서 내 집 소파 위에… 내가 항상 식후에 신문을 펼쳐 들고 편안히 앉아 쉬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아무리 불안한 걱정거리를 산더미처럼 안고 들어와도 앉아 있는 것만으로 안심할 수 있는 이 소파 위에 이 따위 개가 앉아 있어야 하는 거지.”

감기 걸린 물고기
박정섭 지음ㅣ사계절

바닷속에 사는 포식자 물고기는 한데 모여 사는 물고기들 사이에 소문을 퍼뜨린다. 특정 물고기들이 감기에 걸렸다는 말이었다. 빨간 물고기는 열이 펄펄 끓어서 감기에 걸렸고, 노란 물고기는 노란 콧물 때문에 노래진 것이고, 파란 물고기는 몸이 으슬으슬 추워서 파래진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물고기들은 서로를 의심했고, 소문의 대상자들을 무리에서 추방하기 시작했다. “물고기가 감기에 걸릴 수가 있나?”, “아니야, 우리는 원래 빨간색이었단 말이야.”와 같은 의심과 해명은 뒤로하고 근거 없는 소문만을 의지했다. 흩어져 우왕좌왕하는 새, 포식자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들을 먹어 치웠다. 물고기들의 반응은 사람들이 실제로 소문에 어떻게 반응하고 인지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실체 없는 소문에 살을 붙이는 것은 어쩌면 그를 그대로 믿어버리는 사람들의 잘못된 믿음일지 모르겠다.

“소문은 누가 내는 거지? 믿어도 되는 거야? 이상하지 않아? 진짜 감기에 걸린 걸까? 감기 걸린 물고기 본 적 있어?”
“뭐? 지금 감기 걸린 물고기 편드는 거야? 너희들 의심스러워. 우리 목숨이 달렸는데 그런 소리가 나와?”

동화책과 소설책. 책방에서도 두 가지 카테고리는 멀찍이 떨어져 있다. 그렇다 보니 동화 속 환상적인 세계가 소설 속 현실적인 세계와 괜히 더욱 유리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른과 아이의 경계가 뚜렷이 존재하고 있음을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듯이 말이다. 너구리와 노루가 나와서 함께 춤을 추고 어른들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이 이야기를 하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들은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동화책도 분명 소설책이 보편적으로 표현하고 보여주는 메시지를 충분히 담고 있다. 자연과 공존하는 삶, 내 이웃을 사랑하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정의감, 자기 자신을 그 누구보다 먼저 사랑하고 사회적인 잣대에 주눅 들지 않는 용기, 소비의 소중함을 인지하고 선순환적인 행동을 실천하는 것. 

동화책은 단순히 아이들이 이야기를 소화하기 쉽게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쌀쌀하고 냉철한 사회에서 같은 문제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금 흐트러져 보이고 빈틈이 있고 허무맹랑해 보이지만 이해가 있고 위로가 있으며 말미엔 성장이 있는 현실이다. 궁극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하는 두 얼굴 위에는 어떠한 경계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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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자연

포토그래퍼 안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