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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희—아티스트
어떤 하루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하루. 평범한 사람의 일상이 다 그렇지, 뭐 특별할 게 있겠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녀는 조금 달랐다. 주어진 시간을 얼마나 나답게 쓸지 고민하고,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삶. 그녀가 가방에서 꺼내든 작은 노트와 그 안을 빼곡히 채운 그림들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무엇이 그녀의 하루를 그토록 특별하게 만드는지.
언제부터 그림을 시작했나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오랫동안 화실에 다녔어요. 화실에서는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 법’을 배웠어요.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한 그림들이요. 그러다 집안 사정으로 화실마저 그만두고 혼자 그리게 됐는데, 그때가 고3이었어요. 아무런 정보도 없고 조금은 막막했죠. 그런 저를 지켜보시던 부모님께서 입시학원에 보내주셨어요. 학원에서 첫날은 ‘그냥 그려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그냥 그렸죠(웃음). 다들 제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들었어요.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가 있냐면서. 알고 보니 학원에서 가르치는 방법과 정반대로 그린 거예요. 어두운 부분을 만들고 시작하는 게 원칙이라면 저는 밝은색부터 입힌 거죠. 하지만 그게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었나요?
틀에 갇히지 않은 그림이요. 그래서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사물보다 사람이나 동물을 그리는 게 더 재미있는 것 같아요. 전시를 할 때도 갤러리보다 카페를 선호해요. 갤러리는 미술 감상이라는 뚜렷한 틀이 있잖아요. 그림이 걸린 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차가운 느낌도 들고. 하지만 카페는 휴식의 공간이고 누구나 쉽게 오고 갈 수 있는 곳이라 좋아요. 편안한 분위기와 여유로운 사람들, 그 속에 제 그림이 있었으면 해요.
그림을 보면 사용한 재료나 기법이 다양해요.
일상에서 소재를 찾는 편인데 어느 날부터인가 매일 버려지는 것들이 보였어요. 틈틈이 모아두었다가 작업에 활용하기 시작했죠.
커피로 그린 그림들이 인상적이었어요.
스페인에 있을 때 자주 가던 카페가 있었어요. 카페 콘 레체Cafe con Leche(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시키면 조금 심심한 커피가 한잔 나오는데, 항상 설탕을 같이 줘요. 그럼 다방커피와 비슷한 맛이 나거든요. 설탕 봉지에는 명언이 적힌 것들도 있었어요. 그중에 ‘삶은 신기하다. 비울수록 무게가 나간다’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네요. 카페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어요. 그리고 혼자이든, 둘이든 저마다 커피잔을 앞에 두고 웅크리고 앉아 있었죠. 마치 새장 속의 새처럼요. 저는 사람들을 관찰했어요. 매일 발행되는 영수증이 그 순간의 증거라고 생각해서 잔으로 만들었고요.
어떤 방법으로 그리는지 궁금해요. 커피를 물감 대신 쓰는 거죠?
네, 우선 모카포트MokaPot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해요. 붓에 커피를 묻혀서 종이 위에 칠하면 돼요. 발색이 연해서 명암이 들어간 곳은 몇 번을 덧칠했어요. 한번 칠하고 종이가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에요.
스페인에 가신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언제부턴가 비슷한 주제의 그림만 그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바쁘고 지친 사람들, 각자의 속도를 인정해주지 않고 무조건 빠르게 달리기를 종용하는 사회에서 다들 여유를 잃어갔어요. 저 역시 그랬고요. 그래서 완전히 반대인 곳으로 가보자고 마음먹었죠. 일상이 변하면 그림에도 분명 변화가 있을 테니까요. 그때 낮잠 시간이 따로 있다는 스페인이 눈에 들어왔어요. 가기 전에 대학원도 지원했는데 합격 여부조차 모르는 상태로 떠났어요. 결과는 크게 중요하 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현지에 머무른 지 5개월쯤 되었을 때 합격 통보를 받았어요. 얼떨떨한 기분으로 학교가 있는 그라나다Granada로 옮겨갔죠. 그곳에서 학교를 마치고 얼마 전에 다시 한국에 왔어요.
그라나다를 배경으로 그린 그림도 봤어요. 멋지던데요?
네, 정말 멋진 곳이에요. 스페인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알함브라Alhambra 궁전이 있어서 더 유명하고요. 늘 관광객들로 넘쳐났어요. 사람들은 궁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저는 그 모습이 재미있었어요. 커피 한잔을 놓고 보니 600년도 더 된 역사적인 궁전이 한낱 배경이 되어버렸거든요. 과거는 과거일 뿐,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업에 영향을 주는 작가가 있나요?
현실적인 순간을 포착해서 위트 있게 풀어내는 작가들이요. 우리 사회의 복잡한 이슈를 간결하게 그려내는 댄 퍼잡스키Dan Perjovschi, 도시인들의 감정선을 표현하는 로버트 롱고Robert Longo, 동물들을 그리는 질 아이요Gilles Aillaud. 물감을 찍어 바르는 독특한 방식을 가진 후안 헤노베스Juan Genoves. 아, 거리에서 그림 그리는 뱅크시Banksy의 자유로움도 좋아요.
<딩동Ding Dong> 시리즈는 폐지를 활용해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네, 길가에 쌓여있는 박스와 날짜가 지난 신문으로 만들었어요. 스페인은 개개인의 여유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환경에는 인색한 나라였어요. 부엌과 화장실, 거실을 공유하고 방은 따로 쓰는 거주 형태가 일반적인데, 한번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전날 마신 와인이며 음식, 플라스틱 용기를 한꺼번에 버리는 걸 목격했어요. 불과 3분 거리에 분리수거 시설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곳을 이용하지 않았죠. 대부분 “굳이 그런 수고를 해야 해?” 하는 식이었어요. 길거리 곳곳에 쓰레기가 쌓여있어서 작업에 필요한 재료는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씁쓸했어요.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그림이네요. 어떤 내용인가요?
지구 온난화 때문에 빙하가 녹고 있어요. 북극곰 한 마리가 점점 작아지는 빙하를 타고 우리가 사는 대륙까지 오는 장면을 상상했어요. 배경은 밤이에요. 낮에 오면 사람들에게 들켜서 동물원에 보내지거나 원래 있던 곳으로 추방당할 테니까요. 그러다 혼자 놀고 있는 꼬마의 집에 도착해요. “딩동~” 꼬마가 밖을 보니 북극곰 한 마리가 서 있어요. 둘은 금방 친구가 돼요. 꼬마의 순수함에 곰은 마음을 놓고 문득 배고픔을 느껴요. 꼬마는 새로 생긴 친구에게 주려고 제일 아끼는 과자를 꺼내요. 보통 찬장이나 냉장고 위에 맛있는 걸 숨겨놓곤 하잖아요(웃음). 북극에 살던 곰이 덥지 않도록 욕조에 찬물을 받아 씻겨주기도 하고요. 그런데 엄마가 올 시간이 된 거예요. 둘은 몰래 숨어서 그녀를 지켜봐요. 부엌에서 각종 음식물과 쓰레기를 한꺼번에 버리고, 밤늦도록 전등과 노트북을 켜놓은 모습들이요. 이야기의 결말이 있지만 굳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작품으로 전시도 하셨잖아요. 반응이 어땠나요?
원래 아동용 서적을 만드는 게 과제였어요. 다른 학생들은 컴퓨터 작업을 이용해 아이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요소를 넣어 책을 만들어왔어요. 완벽하게 인쇄까지 해서요. 저는 판지 위에 그린 그림이라 그대로 엮어서 제출했어요. 다들 저의 주제나 작업 방식에 대해 흥미로워했어요. 담당 교수는 글을 넣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각자의 언어로 해석하고 나름대로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에 넣지 않기로 했어요. 작품은 보는 사람들의 생각이 더해져야 완성된다는 말에 공감하거든요. 나중에 다 같이 전시회를 열었는데 제 그림을 본 신문기자가 기사를 냈어요. ‘한국에서 온 작가가 우리의 의식을 바꿀만한 작업을 했다’는 내용으로요. 그림 안에 담긴 메시지를 알아봐 줘서 고마웠어요.
실제로 북극곰을 만난 적이 있나요?
네, 벌써 4년이 지났네요. 집은 부산인데 전시 때문에 잠시 서울에 올라왔을 때였어요. 어린이대공원에 북극곰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달음에 갔죠. 작은 울타리 안에 곰 두 마리가 있었어요. 한 녀석은 듬직한 아저씨 같고, 다른 하나는 천상 여자 같은 모습이었어요. 너무 반가웠지만 제가 할 수 있던 건 그저 지켜보는 일뿐이었어요. 그렇게 한참을 보다가 돌아왔죠. 그러다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문득 그들이 보고 싶어졌어요. 뜨거운 여름이었는데 이 날씨를 어떻게 견디고 있을지 걱정도 되었고요. 동물원 입장시간을 알아보려고 검색을 했는데 ‘사망’이라는 단어가 보였어요. 얼마 전, 늠름한 자태를 뽐내던 한 녀석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죠. 무작정 동물원에 전화를 걸어 지금 가면 북극곰을 볼 수 있냐고 물었던 것 같아요. 아파서 면회가 안 된다고, 불쌍한 녀석들이라는 대답이 돌아왔고요. 나중에 인터넷을 통해 남은 한 녀석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보았어요. 동물원이 아닌 북극에서 지냈다면 아프지 않았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괴로웠어요.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카페에도 야생 거북이가 살아요.
정말요? 사실 그때 펭귄과 북극곰, 거북이가 모여 쉬고 있는 그림을 그렸었어요. <‘우리도 여유 한 번 느껴보자 좀!’>이라는 제목으로요. 펭귄은 남극, 북극곰은 북극, 거북이는 태평양을 상징하는 동물들이잖아요. 생존 위기에 놓인 그들의 일상이 어쩌면 우리보다 더 치열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거북이는 어디 있나요?
테라스에서 쉬고 있어요. 앞으로 어떻게 지내고 싶으신가요?
하고 싶은 게 많아요. 스페인에 있을 때 같이 살던 친구의 초대로 이탈리아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의 기억이 강렬해서 요즘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있어요. 스페인어와 비슷하더라고요. 아, 그리고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 해외봉사단에 참여하고 싶어서 알아보는 중이에요. 한국전쟁 때 도움을 준 나라들이 많잖아요. 지금은 우리가 그들보다 경제적으로 성장해있고요. 그래서 받은 걸 돌려주자는 취지로 현지에 가서 사람들을 돕는 거예요. 마침 스페인어를 쓰는 페루 쪽에 미술 분야가 있더라고요. 아이들에게 그림 그리기를 가르치고, 마을에 벽화도 그리면 좋을 것 같아요.

박지희 작가의 그림을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전시명은 ‘ㅇㅈㅁㅇㅇ’으로, 그녀가 생각하는 단어의 초성에서 따왔다. 보는 사람에 따라 초성을 보고 떠올릴 수 있는 타이틀은 무궁무진한 셈, 북극곰을 소재로 한 그녀의 그림들을 카페에서 만나보자.
장소 아트카페 쿠나KOON
일시 9월 23일부터 10월 12일까지
에디터 오혜진
포토그래퍼 임주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