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 제주

그 해 여름, 월정리

어떤 날 제주

그 해 여름,
월정리

지금 나는 바닷가 마을 작은 집에서 시원한 음료를 팔고 있다. 믹서기 두 대에 작은 에스프레소 머신 하나, 그리고 중고 냉장고만으로도 이미 비좁은 어설픈 주방에서 얼음과 과일을 간다. 애플민트 잎을 찧고, 레몬을 짜고, 커피를 내린다. 에어컨은 없지만 쉴 새 없이 불어오는 제주도의 바닷바람이 부지런히 창과 창 사이를 오가니 땀 흘릴 새도 없다.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또 시원한 여름이다.

월정리는
변했어

“작고 예쁜 바닷가에 조그만 카페가 하나 있어. 여름에는 가게 한 켠에서 청년들이 파스타를 파는데, 메뉴는 딱 두 개뿐이야. 그들은 손님이 없으면 바다에서 서핑을 하더라. 파스타 한 그릇 주문해서 해변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먹었어.” 제주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꿈꾸듯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지 일 년쯤 지났을까. 제주도를 여행하며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어느 바다에 이르러 차를 세웠다. “여기다.” 어딘지 정확히 들은 적은 없었지만, 당연히 알아볼 수밖에 없는 작고 예쁜 바다. 하지만 그 사이 카페들이 많아졌고, 청년들은 더 이상 파스타를 팔지 않았다.

그 후로도 월정 바다는 계속 달라졌다. 카페는 하나씩 늘어났고, 차도 사람도 그와 비례해 많아졌다. 고즈넉한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커다랗고 낯선 건물들에 압도당해 바다로 눈길을 돌릴 새도 없었다. “월정리는 변했어. 망가졌어” 월정리가 화두에 오르면 모두 혀를 끌끌 찼다. 제주를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한숨은 깊었다. 그렇게 월정리를 탓했다.

555번지
슈퍼 앞집

제주로 이사 와서 알게 된 지인과 오랜만에 만나 마주 앉아서 밥을 먹었다. 월정리 근처 해녀촌 식당이었고, 우럭 정식을 시켰던 것 같다. 그녀는 지금 살고 있는 월정리에 어쩌다가 작은 공간을 하나 얻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뭘 할지 정하지 못해 몇 달째 비워놓고 있다고 했다. “언니 거기서 여름에 에이드나 팔아요.” “그럴까? 그럼 같이 하자.” “좋아요.” “그냥 작업실 얻었다고 생각하자. 넌 글 쓰고 난 만들고. 그러다 손님 오면 팔고. 하루 만 원씩만 집으로 가져가는 게 목표!” 아주 가벼운 시작이었다.바닷가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북적하지만 해변에서 한 걸음만 뒤로 돌아오면 만날 수 있는 월정리 마을은 밖에서 무슨 일이 있냐는 듯이 조용하다

그 마을 어귀에 자리 잡은 아주 작은 집. 바로 전엔 사료 창고로 쓰였다고 하고, 그전엔 이발소가 있던 자리였다고 했다. 맞은 편엔 주로 담배와 막걸리를 파는 오래된 슈퍼가 있다. 외벽에 빨간 우체통이 있어서 우편물을 거두기 위해 하루에 한 번씩 우체부 아저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들른다. 

이 자리에서 거의 오십 년 가까이 슈퍼를 운영하셨다는 할머니는 여든이 훌쩍 넘으셨는데 낮에는 바퀴 세 개짜리 오토바이를 타고 밭에 가시거나 아니면 해녀복과 테왁(해녀가 수면에서 몸을 의지할 때 사용하는 부유 도구)을 챙겨 들고 바다에 물질을 하러 가신다. 그럴 때면 간혹 가게를 부탁하고 가시기도 한다. “담배차 오면 받아두라.” 동네 고양이조차도 느릿느릿 걷는 월정리 마을. 나는 마을 입구 모퉁이에 있는 이 집이 첫눈에 마음에 쏙 들었다.

페인트가 묻은 손이
재미있어서

우선 동네 ‘맥가이버 아저씨’를 불러 전기와 수도를 설치하고 낡은 벽을 하얗게 칠했다. 그리고 목수 일을 하는 지인에게 가구를 주문했다. 가구에 색을 칠하고, 메뉴를 정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했다. 모두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페인트를 칠하기 전에 젯소를 칠해야 하는지도, 바닥에 장판을 까는 일을 직접 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처음 하는 일이 대체로 그렇듯이 우리는 내내 즐겁기만 했다. 작업을 하다 보면 옷과 손에 페인트가 범벅이었지만, 이제야 제대로 제주에서 사는 것 같다며 깔깔 웃었다. 물로 박박 씻으면 금세 없어지는 페인트를 일부러 며칠 그냥 두기도 했다.

제주도 한량 둘이서 뭔가를 준비한다고 했더니, 동네 친구들의 온정이 쏟아졌다. 평대리 ‘아일랜드 조르바’에서는 새 싱크대를 내주었고 하도리 ‘카페하도’에서는 여름 동안 쓰라며 냉장고를 빌려주었다. 한동리 ‘알이즈웰’에서는 뒷마당의 애플민트를 마음껏 가져가라고 한다. 또 가시리 ‘그냥’에서는 먼 길을 달려와 페인트칠을 도왔다. 염치없지만 덥석 받았다. 계산하지 않고 일단 나누고 보는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났더니 마음이 자꾸 따뜻해졌다.

최고 단골손님은
고양이 ‘포도’

바다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데다가 간판도 제대로 달지 않은 마을 어귀 작은 카페의 하루 풍경은 이렇다. 오전엔 산책 나온 동네 할머니들이 가게 앞에 털썩 앉는다. 파는 음료수를 드리면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셔서 우리가 마시는 석류 효소를 시원한 물에 타서 한잔 건넨다. “석류가 여자한테 그렇게 좋대요.” 너스레를 떨면 ‘깔깔깔’ 할머니들 웃음소리가 골목을 울린다. 

오후엔 고양이 ‘포도’가 놀러 온다. 동네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작은 고양이가 어느 날은 가게 문 앞에 웅크리고 앉더니 졸기 시작했다. 눈이 청포도색이라 ‘포도’라고 이름을 짓고서 사료를 조금씩 나눠주었더니 오후 즈음이면 항상 가게로 와 사료를 먹고 조금 놀다 간다. 월정리 길고양이들은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피하지 않는데 ‘포도’ 역시 손님들이 앉아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볼일을 본다. 

그러는 동안 간혹 손님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마을에 살면서 작업하는 만화가는 가끔 자전거를 타고 가게로 내려와 레몬 커피를 마시며 문 앞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우고 간다. 근처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짓고 있는 아저씨 두 분은 점심을 먹고 들러 모히토를 한 잔씩 주문하고는 일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가끔 마당에 자라고 있는 민트 잎을 모히토 만드는 데 쓰라며 가져다주시기도 한다.

마을 어르신들이나 아이들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 음료를 사 마실 때 가격을 낮춰 받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올레길 20코스 중간에 있는 덕에 가끔은 올레꾼들이 걷다가 들어와 시원한 물을 한 잔 청하는 일도 종종 있다. 여행객들이 음료를 사 마시러 일부러 오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묻는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손님을 맞는 시간보다 손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서 대부분의 시간에 우리는 책을 읽거나 수다를 떤다. 그러다 나는 글을 쓰고, 동업자는 가방이라던가 양초 같은 것들을 만든다. 천천히 해변으로 걸어나가 바닷물에 발을 잠깐 담그고 오기도 한다. “장사 좀 돼요?” 단골손님들은 올 때마다 걱정의 말을 건넨다. 정작 주인들은 태평한데 손님들은 걱정하는 가게.

 “정말 올해만 할 거예요? 내년에 오면 없어요?” 손님들의 질문에 “음 내년에도 열까?” 그제야 고민을 해보다가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 하고 마는 우리. 이런 카페가 이 아름답고 소박한 월정리 바닷가에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비록 큰돈은 벌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정리는 예쁘다

오래된 슈퍼가 있는 왼쪽과 낡은 빈집이 있는 오른쪽, 그 사이 길 끝에 있는 바다. 이 평화로운 골목을 바라보는 일을 좋아한다. 동네 할머니들이 천천히 걸어 다니고, 슈퍼에 담배 사러 온 아저씨들은 우리 가게를 기웃기웃하고, 그 길 사이를 길고양이들이 사뿐사뿐 건너다니는 풍경은 하루 종일 내다봐도 지루하지 않다. 그리고 그 익숙한 골목을 따라 반짝이는 라임색 바다까지 천천히 걸어나가는 일을 좋아한다.

여름 한 철 월정리에 머물다가 알았다. 해변가에 지어진 화려한 건물들 때문에 ‘월정리는 망가졌다’며 외면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 돌려 바라본 바다는 여전히 소박하고 예쁘다. 바다 뒤쪽 월정리 마을 역시 여전히 조용하고 다정하다. 밭과 밭을 나누는 돌담은 아기자기하고, 햇살은 맑고, 새는 지저귀고, 아이들은 뛰어논다. 그런 것들은 잘 변하지 않는다. 특히나 이곳, 제주에서는.

‘A’DE 월정

청포도에이드, 하귤에이드, 아이스레몬커피, 모히또, 헨드릭스진토닉, 다섯 가지 음료를 팔고 있다. 올해 여름 동안에만 문을 열 예정이었는데, 여름이 지나면 간판을 바꿔 달고 다른 걸 팔게 될지도 모르겠다.

A.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555번지 슈퍼 앞집 T. twitter.com/ade_jeju
11:00~19:00 (수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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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전진우

글·사진 정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