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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탁 — 타바코북스
일상의 풍경 한편에서 문득 그리움을 떠올린다. 홀로 마주하는 늘어진 수평선, 창밖으로 하릴없이 바라보는 해 질 녘, 운동장에서 흩어지는 교복을 입은 아이들과 잠들지 못해 기어이 마주하게 된 푸르스름한 새벽처럼. 출판사 ‘타바코북스Tabacobooks’를 이끄는 작가 기탁은 언제인지, 누군가의 기억인지 짚어낼 수 없는 장면에서 느끼는 그리움을 담백하게 그려낸다. 그가 잔잔한 모양새로 옮겨둔 그림에서는 혼자라도 그다지 외롭지 않은 것 같다. 피어오르는 한 줄기 연기를 따라 고요히 거닐면 되니까.
반가워요. 이야기를 하기 위해 테이블에 앉으니 질문지에 이것저것 적어둔 게 보이네요(웃음).
동대구역에 비가 많이 온다고 들었는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하셨어요. 제가 말을 잘 못하거든요. 어떤 이야기를 할지 단어만 ‘통통통’ 적어뒀어요. 근데 그대로 못할지도 몰라요. 최대한 편안하게 답해볼게요.
좋아요. 가장 먼저 소개를 들어볼까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웃음). 1인 출판사 타바코북스를 운영하면서 일러스트를 그리고 있는 기탁이라고 합니다. 《AROUND》는 제 아내이자 ‘사이에 포터리’를 이끄는 김민지 작가가 인터뷰를 한 적 있어서 알고 있었어요. 제안이 도착하자마자 기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두 분의 집이니 곳곳에 민지 씨의 세라믹 작품도 보여 반갑네요. 서울국제도서전에 이어 군산북페어까지 참여했는데, 어떤 일상들을 보내고 있어요?
상반기는 오프라인 행사와 외주 작업들로 무척 바빴어요. 평소에 외주를 잘 받는 편은 아닌데 올해는 유독 친구들과 함께하는 작업이 많았죠. 그래서 하반기부터는 타바코북스의 책을 새로 내기 위해 제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어요. 보통 작업은 콘셉트 하나를 정해서 거기에 맞는 소재를 모으고 그림을 연습하면서 보내는데요. 새 책의 출간 시기는 정하지 않았지만 올해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꼭 선보이는 게 목표예요. 사람은 마감이 정해져 있을 때 가장 힘을 내잖아요.
백 퍼센트 공감해요. 집에서 작업하다 보니 일과 휴식의 루틴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휴식 시간을 정해두진 않아요. 잘 그려지는 날엔 온종일 작업을 하고, 잘 안되는 날에도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올 때까지 온종일 앉아 있곤 하죠. 아내가 퇴근하면 그 이후는 함께 보내는데 탁구 치러 가거나 달리기를 해요. 장모님 댁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가서 장모님과 함께 운동하기도 하고요.
배송 업무는 작업과 병행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만 한다고 알고 있는데, 여전한가요?
맞아요. 1인 출판사니까 그림을 만드는 것도, 아내의 공방 한편에서 손수 포장해서 발송하는 것도 전부 제 몫이에요. 한때는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포장을 해보니 작업 흐름이 깨지더라고요. 작업에도 리듬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배송 업무를 위한 날을 분리하기로 결심했어요. 무언가 하나에 집중하고 있을 때 다른 걸 못하는 편이에요.
이외에도 작업이나 일상에서 정해둔 약속 같은 게 있다면요?
습관의 측면에서 보자면, 언제나 음악을 틀어놔요. 무얼 하든 음악을 틀면 시동 거는 느낌이 들어요. 그렇다고 플레이리스트를 미리 짜둘 만큼 계획성이 철저한 편은 아니라서 마음에 드는 노래를 찾으면 계속 듣죠.
요즘은 어떤 노래에 빠져 있어요?
작년부터 영화 〈안경〉(2007)의 OST를 듣고 있어요.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 노래들을 들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영화 속 풍경이 떠오르기도 해요.
저도 그 영화 좋아해요. 기탁 씨는 대구가 고향이에요? 항상 여기서만 머물렀는지 궁금해서요.
그렇죠. 게다가 여기 달서구 용산동에선 스무 살 때부터 살았으니까 거의 20년이 다 되었네요. 예전에는 집 뒤쪽이 전부 논이라 산책하는 것도 좋아했어요. 이제는 주거촌으로 싹 바뀌어서 이전 기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죠. 대구에서는 재개발이 몇 년 사이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서 동네 풍경이 금세 달라져 버려요. 여기도 큰 차도나 고속도로가 생겨서 이전만큼 산책하기 어려워졌어요.
편리함의 뒤편으로 알던 모습이 사라지는 게 아쉬웠겠어요. 사람마다 자신과 잘 맞는 환경이 있을 텐데요. 대구와 기탁 씨는 어떤가요?
대구 안에서는 버스 하나 타면 대부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거든요. 바운더리가 넓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시너지가 제법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가끔 서울에 갈 때마다 너무 많은 정보와 쏟아지는 인파에 힘들 때가 있는데 대구는 무엇이든 중도에 있어서 저랑 잘 맞는 느낌이 들어요. 넘치지 않는 도시라고 할까요.
그럼 1인 창작자로서는 어때요? 흔히들 우스갯소리로 없는 것 빼곤 서울에 다 있다고 말하곤 하잖아요.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더 많은 기회가 서울에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팬데믹 이후로 온라인 소비가 늘었고 서울뿐 아니라 지방 곳곳에 있는 서점들이 입점처가 되어줘요. 창작자가 직접 머물지 않아도 어디서든 자신의 작업물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조금은 늘었어요. 아직 부족하지만요.
타바코북스 이전의 기탁 씨부터 차근차근 들어보고 싶은데요. 전공으로 산업디자인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어린 나이에 선생님에게 속았다고 장난삼아 말해요. 직업 전문 학교에서 산업디자인과를 다니던 고등학교 3학년 때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대학의 만화과가 곧 없어진다면서, 그러면 무지 난감할 거라며 만류하셨죠. 산업디자인과로 대학을 가고 보니 만화과는 여전히 잘 있더라고요(웃음). 공부를 하면서 디자인에 많은 흥미가 생겼고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전까지는 취향이 완벽하게 자리잡지 않았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게 명확하게 나뉘면서 이전까지 좋아하던 것들이 손바닥 뒤짚듯이 달라졌어요.
이후로 8년 가까이 회사 생활을 하셨죠. 그 시간을 거치며 자신에 대해 알게 된 점이 있을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대구에서 이런저런 회사들을 다녔지만 대부분 회사 운영이 어려워져서 그만두게 되었어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예감을 느끼다 보니 답답하고,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 기분이 들었죠. 그래서 마지막 회사에서 퇴사할 때쯤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내 것을 드러내고, 내 것을 남기고 싶다고요.
좀더 단단한 마음으로 다음을 준비할 수 있었겠어요. 그 즈음 대구 기반 동료들과 함께 프로젝트 활동 ‘세점들’을 시작했죠? 작업에 대한 소개를 듣고 싶어요.
새롬, 근하라는 친구들과 함께한 작업이에요. 각자 좋아하는 음악을 세 개씩 골라 듣고 아트워크로 표현한 건데요. 총 아홉 곡이니 그걸 모으는 자체로 작업물이 되고, 보는 이들에게 플레이리스트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서 CD 형태처럼 만들어 팔았어요. 세 사람의 작업 느낌이 달라서 아주 재밌었죠. 기억에 남는 곡은… 모임 별의 ‘태평양’이라는 곡인데 그 시절에 자주 듣고, 또 들었을 때 가슴이 뛰는 걸로 골라 그렸어요. 조금 간지러운 표현인가요(웃음)? 정말 오랜 시간 그림을 그렸지만 세점들 활동을 기점으로 사람들 주목을 받게 된 것 같아요. 그 경험 덕에 그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으니 감사하죠.
그 길로 대구의 창작자들과도 연이 쌓였겠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퇴사와 세점들 활동 즈음, 제 주변에 큰 변화가 생겼어요. 다양한 사람과 만나 창작자 그리고 동료로서 가까워지게 되었거든요. 그들 덕에 한걸음씩 나아갈 수 있게 도움을 받는 느낌이었어요. 블로그를 통해 독특한 화풍을 가진 새롬을 만나고, 그 친구의 소개로 김광석 거리에 있는 카페 겸 갤러리 ‘어텀’에서 저의 첫 전시를 하게 됐죠. 또 그 인연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의 장기 프로젝트인 포스터 전시회에 저를 추천해주었고, 그곳에서 만난 근하와도 가까워졌어요. 세점들 활동이 잠잠해질 무렵엔 독립 서점인 ‘더폴락’의 ‘아마도 생산적 활동’이라는 북페어에 참여하면서 대표님들과 인연을 맺었고, 부산북페어 참여를 적극적으로 추천해 주셨죠. 제가 특별하기에 가능했다기보다, 서로의 시도를 끌어주고 밀어주는 끈끈한 관계들 덕이라고 생각해요.
낯선 길을 외롭지 않게 만드는 게 동료라는 존재 같아요. 그럼 ‘타바코북스’라는 이름도 그때쯤 지은 건가요?
맞아요. 사실 부산북페어를 준비하는데만 정신이 팔려서 신청서 제출을 잊고 있다가, 더폴락의 대표 인혜, 최성 님이 마지막 날 확인 차 물어봐 주셔서 제때 신청할 수 있었어요. 그때 이름과 출품할 작업물에 대한 설명을 적어야 했고, 그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배에 빗대어 만들겠다고 적어본 게 타바코북스의 시작이었어요. 북페어에서 선보인 《여름을 태우는 빛》(시작 페이지에 기탁은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기 전에 끝이 나는 책”이란 소개를 써두었다.)도 담배를 태우는 무표정한 인물들의 그림을 모은 제 첫 책이에요.
그런데 혹시… 애연가이신가요?
아니요. 담배는 끊었습니다. 결혼하면서 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거든요. 간혹 이런 질문을 듣는데 대답하면 아주 슬퍼하시더라고요.
(웃음) 다행히 저는 슬프진 않지만 타바코북스를 볼 때마 다 궁금했어요.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할 매개체로 ‘담배’를 선택한 이유가 뭔가요?
음, 저부터도 마음을 바깥으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편인데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갑자기 인물마다 풍부한 표정이나 성격을 줄 순 없었어요. 작업을 하면서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을 그리고 싶지 않았고요. 그래서 첫 책을 만들 때 감정 표현에 서툰 사람들을 그려보자 생각했죠. 영화나 매체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올 때면 등장 인물의 복잡한 감정이 분위기로 드러나는 것 같았거든요. 그런 지점들을 모아보니 내 감정을 그림에서 표현하기 위해선 담배라는 소재를 쓰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담배를 문 무표정한 인물 외에도 청소년, 청년 즈음의 캐릭터들이 곧잘 등장해요.
노년은 겪지 못했지만 고등학생이나 20-30대는 이미 지나온 시간이잖아요. 그래서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열중하는 사람의 모습을 동경해요. 무언가를 처음 좋아하게 되고 그것에 빠지기 시작한 사람의 설레임같은 것들을요. 어떤 분야의 전문직도 마찬가지인데, 아직 공개하진 않았지만 나이가 지긋한 장인이나 운동선수의 모습도 그려보고 있어요. 유행에 휩쓸리지 않길 바라서 캐릭터들의 옷도 굉장히 일상적이죠.
작업물을 보다 보면 지난 어느 날을 상상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설령 그 시대를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도요. 관찰보다는 기억과 상상에서 비롯된 그림 같았는데, 어떤가요?
그럴 수 있겠네요. 그림의 시작은 언제나 특정 상황을 상상하는 거예요. 그 안에 들어갈 요소들을 넣기 위해 관찰하는 건 다음 단계이고요. 다만 1980-90년대의 가전과 디자인, 아트워크, 음악 등을 즐기면서 자랐으니까 따라 그리듯 관찰한 건 아니어도 그 시대의 분위기가 자연스레 작품 안에 스며들었을 것 같아요. 굳이 순서를 따져보면 1번은 상상, 2번은 관찰이네요(웃음).
고양이의 등장도 빼놓을 수 없잖아요. 2021년도에 출간한 《1990 Bookstore Cats》에서는 고양이와 함께하는 일상들을 그렸고요.
대구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친구들과 그들의 사랑스러운 고양이를 90년대 분위기로 각색한 일러스트를 모아 책으로 만든 거예요. 친구들의 소중한 존재가 그림 속에서도 남길 바라면서요. ‘낫온리북스’의 혜진, ‘차방책방’의 재은과 재진, ‘고스트북스’의 은지와 인철, ‘심플책방’의 연일 님이 한편에 함께해 주었어요. 사실 캐릭터는 각 인물의 느낌만 따와서 그렸다면, 고양이는 정말로 온전히 담고 싶었어요. 인스타그램에서 사소한 일상과 추억 기록들을 둘러보는가 하면, 집에 놀러갈 수 있을 때는 털뭉치들과 함께 짧은 시간이라도 보내면서 사진으로 기록 했죠. 많은 분이 좋아해 주셨고, 제 작업 방향이 또렷해졌다고 느낀 책이라 아직까지도 애정이 가요.
작업할 때 즐겨 쓰는 도구가 있나요?
연습장에 연필이나 볼펜으로 스케치하고 컴퓨터로 옮겨서 포토숍으로 마무리해요. 작년부터는 수채화도 즐겨 쓰고, 최근엔 매직펜, 색연필 등 기본적인 도구에 간간히 마카를 사용해 보고 있어요. 디지털로 마무리하지만 최대한 아날로그 느낌을 주기 위해 질감을 살리고요. 성향이 이런 지라 컴퓨터로 그린 완벽한 직선은 선호하지 않는 편이에요. 눈에 바로 드러나지 않아도 수평선에 미세한 파도의 굴곡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불완전함의 요소들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요.
또 중요하게 여기는 게 있다면요?
콘셉트를 정하고 소스들을 찾는 데 충분한 시간을 쏟고, 그게 마무리되면 콘티에 내가 원하는 요소들을 전부 넣어봐요. 그리고 하나씩 빼죠. 인위적이지 않은 것, 편안한 느낌의 모습을 찾기까지 제 판단을 계속 검증하는 과정이 이어져요. 저는 항상 감정이 넘치는 것을 경계하고 최대한 절제해서 담아내고 싶어요. 그리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더라도 무언가를 빼지 않고 더했을 때 나중에 보면 꼭 후회가 되곤 하거든요. 내가 그린 한 장의 작업물이 세상에 남는다면 오랫동안 뭉근한 마음으로 보게 되길 바라요. 그러기 위해선 넘치면 안 돼요.
덜어내면서 완성되는 미학이네요. 작품에는 한글보다 일본어, 영어, 숫자가 많은 편인데요. 선호하는 기호의 특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음,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고민해 봤는데요. 언어를 음악에 비유하면 쉽게 설명이 되겠더라고요. 언어마다 고유의 악기라고 한다면 저마다 톤을 갖고 있을 테니, 내가 생각하는 곡을 완성할 때 필요한 악기들을 가져다 쓰는 거예요. 그래서 분위기에 맞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주제나 메시지가 곧바로 드러나기 보다 다른 언어나 기호로 한 단계를 거친 후에 보는 이에게 닿았으면 좋겠어요.
그림을 볼 때마다 편안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리는 사람은 여러 고민과 원칙도 껴안고 있었네요.
제약을 많이 둔다는 게 창작자로서 바라보는 제 그림의 특징 같아요. 옛날 디자인의 아날로그적 특징과 한 번 더 연결되는 이야기인데요. 요즘에는 터치 한 번에 기술적으로 색과 요소가 들어가는 디자인이 많은데, 아날로그적 방식에는 각각의 요소들을 풀어두어도 복잡해 보이지 않는 법을 찾아나가는 매력이 있어요. 조형의 균형을 찾는 과정이죠. 그렇다고 해서 표현의 제약에 강박처럼 갇혀 있진 않아요. 얼핏 딱딱해 보이는 그림 안에서도 불규칙적이고 거친 면모를 넣어두기도 하고요.
작품들을 우선 책으로 묶은 이후에 개별로 옮겨낸다고 알고 있어요. 작품을 각각의 단상이 아닌 하나의 주제로 모아 내는 이유가 있나요?
아마 대부분 저를 일러스트레이터라고 말하시겠지만, 스스로는 출판사이자 하나의 브랜드라고 정의해요. 타바코북스라는 이름도 1인 출판사명이고 제가 활동하는 곳도 독립서점이니까요. 당연히 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은 단상을 선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어요.
맞아요. 책 만들 때 좀더 엄격해져요. 저는 책의 모든 페이지가 아름다워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심지어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여백이라도, 여백으로 채우는 부분까지 계산하곤 해요. 책날개가 어떻게 접히는지, 페이지 하단 쪽 번호나 표지의 제호 디자인, 재단 등 끊임없이 고민해서 저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싶죠. 인쇄가 되는 모든 부분을 신경 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에 들어간 그림 한 장이 마음에 안 든다면 완성된 책을 볼 때마다 너무 괴로워요. 그래서 훨씬 더 어렵고 엄격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만큼 애착하고 집착하면서 쏟아낸다면 작업이 끝날 때마다 기운이 쏙 빠지겠어요.
이것도 음악에 비유하고 싶은데, 똑같은 노래를 백 번 천 번 듣는 건 힘들잖아요. 그렇게 작품 하나를 오랫동안 끌어안고 지내다 보면 그림 그리는 게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올해로 작업한 지 7주년이 되었는데 연차가 쌓일수록 후유증이 크게 오더라고요. ‘한 권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내년에 또 내가 책을 만들 수 있을까? 마음에 드는 그림 하나를 싣기 위해 오랜 시간 고생하고 쥐어짜냈는데 아, 더 이상은 못하겠다.’ 이러면서요. 소진된 만큼 애정이 차오르고 원동력이 생길 때까지 시간이 필요해요. 사람은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앓던 마음을 까먹어 버리니까요.
괴로움도 결국 회복될 거라는 게 자신을 위한 응원 같아요. 그러고 보니 대화 속에서 ‘음악’이라는 키워드가 자주 들리는데요. 사운드 클라우드에 올린 음악 작업물들을 살펴봤어요. 연주나 가창도 하시더라고요.
(잠시 소리 없이 웃는다.) 네…. 음악을 굉장히 좋아해요. 옛날부터 제이팝이나 제이락, ‘램프Lamp’, ‘키린지Kirinji’ 같은 밴드 음악을 즐겨 들었어요. 독학으로 배워서 녹음하고 음악 작업을 해보는 것도 즐거워서 요즘도 틈틈히 아이폰 음성 메모를 켜서 곡 스케치를 하고 있어요. 몇 년 전에는 좋은 기회로 클럽 공연도 몇 번 해봤지만 결론적으로는 혼자서 뚱땅거리는 게 더 좋더라고요. 그런데… 인스타그램에 음악 관련된 콘텐츠를 올리면 언팔로우가 느는 것 같아요.
작품들을 우선 책으로 묶은 이후에 개별로 옮겨낸다고 알고 있어요. 작품을 각각의 단상이 아닌 하나의 주제로 모아 내는 이유가 있나요?
아마 대부분 저를 일러스트레이터라고 말하시겠지만, 스스로는 출판사이자 하나의 브랜드라고 정의해요. 타바코북스라는 이름도 1인 출판사명이고 제가 활동하는 곳도 독립서점이니까요. 당연히 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은 단상을 선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어요.
맞아요. 책 만들 때 좀더 엄격해져요. 저는 책의 모든 페이지가 아름다워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심지어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여백이라도, 여백으로 채우는 부분까지 계산하곤 해요. 책날개가 어떻게 접히는지, 페이지 하단 쪽 번호나 표지의 제호 디자인, 재단 등 끊임없이 고민해서 저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싶죠. 인쇄가 되는 모든 부분을 신경 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에 들어간 그림 한 장이 마음에 안 든다면 완성된 책을 볼 때마다 너무 괴로워요. 그래서 훨씬 더 어렵고 엄격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만큼 애착하고 집착하면서 쏟아낸다면 작업이 끝날 때마다 기운이 쏙 빠지겠어요.
이것도 음악에 비유하고 싶은데, 똑같은 노래를 백 번 천 번 듣는 건 힘들잖아요. 그렇게 작품 하나를 오랫동안 끌어안고 지내다 보면 그림 그리는 게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올해로 작업한 지 7주년이 되었는데 연차가 쌓일수록 후유증이 크게 오더라고요. ‘한 권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내년에 또 내가 책을 만들 수 있을까? 마음에 드는 그림 하나를 싣기 위해 오랜 시간 고생하고 쥐어짜냈는데 아, 더 이상은 못하겠다.’ 이러면서요. 소진된 만큼 애정이 차오르고 원동력이 생길 때까지 시간이 필요해요. 사람은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앓던 마음을 까먹어 버리니까요.
괴로움도 결국 회복될 거라는 게 자신을 위한 응원 같아요. 그러고 보니 대화 속에서 ‘음악’이라는 키워드가 자주 들리는데요. 사운드 클라우드에 올린 음악 작업물들을 살펴봤어요. 연주나 가창도 하시더라고요.
(잠시 소리 없이 웃는다.) 네…. 음악을 굉장히 좋아해요. 옛날부터 제이팝이나 제이락, ‘램프Lamp’, ‘키린지Kirinji’ 같은 밴드 음악을 즐겨 들었어요. 독학으로 배워서 녹음하고 음악 작업을 해보는 것도 즐거워서 요즘도 틈틈히 아이폰 음성 메모를 켜서 곡 스케치를 하고 있어요. 몇 년 전에는 좋은 기회로 클럽 공연도 몇 번 해봤지만 결론적으로는 혼자서 뚱땅거리는 게 더 좋더라고요. 그런데… 인스타그램에 음악 관련된 콘텐츠를 올리면 언팔로우가 느는 것 같아요.
(웃음) 언젠가는 타바코북스가 아니라 음악하는 기탁 씨로 만날지도 모르겠어요.
아이고, 노래가 주인공이 아니라 그림 작업과 곁 해서 보여드릴 수는 있을 텐데요. 공연은… 아니에요. 제 음악은 집 밖을 벗어나지 않을 거예요(웃음).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실컷 나눴는데요. 기탁 씨 일상의 큰 즐거움은 아내분인 민지 씨 아닐까 싶네요.
맞아요. 저의 좁은 폭을 여러 방면으로 넓혀주는 사람이에요. 비유하자면 저희 두 사람의 취향과 성향이 동서양의 느낌처럼 다르거든요. 아내는 노래도 팝송 좋아하고, 좋고 싫은 걸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이지만 저는 표현도 서툴고 에둘러서 말하는 편인데, 점점 아내의 특성을 흡수하고 있어요. 이전에는 아름다운지 몰랐던 것도 아내 덕에 시야가 넓어져서 그림에 영향을 주기도 했죠. 아내는 세라믹을, 저는 그림을 다루다 보니 자신의 작업물을 서로 보여주고 코멘트를 듣고 싶어 하는데 백 퍼센트 반영되진 않아요. 서로 조언을 구하는 것도 실은 자기 생각에 대한 동의를 얻고 싶은 마음 때문 같달까요.
최근에는 탐조 활동을 시작한 민지 씨 덕분에 자연스레 새를 관찰하셨다고요.
아내가 자연을 무척 좋아해요. 함께 있으면서 저도 이전보다 더욱 자연을 좋아하게 돼서, 일과를 마치면 같이 근처에 있는 달성습지에 가곤 하죠. 달성습지는 사람이 아닌 자연의 터전이라는 게 느껴지는 곳인데요. 요즘엔 어디서든 저 멀리 아파트 꽁무니가 보이는 경우가 많고 도시에서 눈앞에 거대한 자연이 펼쳐진 걸 보기 힘든데, 그곳에서는 가능해요. 아내가 대구에 있는 동료 창작자 친구들과 탐조 활동을 나갈 때 따라가면 새들을 열심히 관찰해요. ‘지익’ 하면서 우는 직박구리도 있어요. 평소에는 새소리가 좋다고만 생각했다면 좀더 친근하게, 그 새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죠. 얼마 전에는 직박구리를 그려보기도 했는데 더 잘 그리고 싶어요.
이제 여름을 지나 가을을 맞이했는데, 올여름은 어떻게 보냈어요?
너무 더웠어요. 그런데 가끔 서울에 가면 공간이나 사람의 밀도가 달라서인지 대구보다 더 덥게 느껴질 때도 있더라고요. 무더운 여름 내내 집에서 작업만 한 것 같아요. 그 와중에도 아내와 맛있는 걸 먹으면서 여름만의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했죠. 자주 먹는 간식이나 제철 음식이라는 게 있잖아요.
지금 떠오르는 걸 하나 소개해 주실래요?
아내랑 성주에 곧잘 놀러 가는데 가는 길에 꽈배기집이 있어요. ‘청춘당 꽈배기’라고 우연히 먹었다가 맛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거기가 시골이라 전화로 확인하지 않고 가면 닫혀 있을 때가 있어요. 항상 열었는지 연락해 보고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나서요. 커피 마시러 가창에도 가고, 옹심이 칼국수 먹으러 차로 20-30분 달려보기도 하고….
이 도시에서 두 분답게, 오붓하게 계절을 보내셨네요.
맞아요. 이곳에서 남은 계절들도 비슷한 모습으로 보낼거예요.
에디터와 인터뷰이가 마음속에 담고 있는 작업물을 두 개씩 꼽았다. 그림 너머 어떤 이야기가 폴폴 피어오를지, 가만한 걸음으로 따라간다.
1. 명주의 첫번째, 북마크 시리즈 ‘쯔즈쿠つづく’
일본 드라마나 애니메이션 속 회차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つづく(계속)’라는 이름으로 매년 선보이는 북마크. ‘다음 화에 계속’이라는 의미처럼 책을 잠시 덮어두지만, 그 행위가 다시 이어질 것임을 전하고 싶어 정한 이름이다. 시리즈 1편과 2편은 크기가 서로 다른 사각형 지류들을 모아 매력적인 이미지를 선물했다면, 3편의 경우, 어떻게 하면 종이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했단다. 책갈피 자체가 작은 책이 되어 책장에 꽂혀 있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며, ‘Boy Meets Girl’이라는 서브 타이틀과 간략한 스토리도 그려두었다.
2. 명주의 두 번째, 타바코북스 7주년 기념 엽서
엽서 속 등장한 고양이는 ‘에드’. 서점 낫온리북스의 운영자이자 사진작가인 친구 혜진의 고양이다. 가끔 통화를 할 때면 옆에서 야옹야옹하며 기탁과 친구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단다. 타바코북스의 시작일은 8월 8일이다. 이날은 세계 고양이의 날이기도 한데, 올해는 에드의 모습을 엽서에 넣고 싶어 물어보니 아주 우렁차게 야옹야옹했다는 후문. 기념일을 미리 준비할 새도 없이 바쁘게 시간이 흘러가지만, 해마다 고양이가 등장하는 엽서를 만들어 볼까 고민 중이라고. 내년에는 또 어떤 고양이 친구가 타바코북스의 생일에 축하를 보낼까?
3. 기탁의 첫 번째, ‘Crazy Summer’
기탁은 새롬, 근하와 함께 ‘세점들’이라는 이름으로 2015년부터 CD를 콘셉트로 삼은 일러스트를 선보였다. 다음 해에는 바이닐을 콘셉트로 한 포스터를 만들며 이어졌는데, 그중에서도 ‘Crazy Summer’는 단순한 포스터 이상으로 완전판의 의미를 갖는 작업이다. 실제 음반처럼 느끼도록 겉 커버와 북클릿까지 꼼꼼하고 세심하게 매만졌다. 작업을 직접 본다면 바이닐에 쓰이는 비닐을 똑같이 씌워둔 점, 가상으로 트랙 제목들을 써둔 점도 특별하게 보일 것. 그림 속 모든 요소가 아름답게 보이도록 노력했기에 오랫동안 애정이 가는 작품으로 꼽는다고.
4. 기탁의 두번째, 《1990 Bookstore Cats》
책방을 운영하면서 고양이와 함께 지내는 친구들의 공간을 타바코북스만의 분위기로 각색해서 만든 책으로, 많은 사랑까지 받아 인상 깊은 작업으로 《1990 Bookstore Cats》를 빼놓을 수 없다. 모든 과정에 기탁의 애정이 담겼는데, 특히 ‘털뭉치 친구들’을 온 마음을 다해 그리고자 했다고. 마치 90년대를 엿본 듯한 장면들은 적절한 소품 등장을 위해 자료 조사에 공들인 덕에 완성되었다. 그동안 책을 만들어 오면서 체득한 표현들이 다듬어져서, 마침내 타바코북스만의 그림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책이라 생각한다고. 2022년에 절판되었지만 올해 초겨울쯤 다시 만나볼 수 있다고 하니 다가오는 계절이 기다려진다.
에디터 이명주
포토그래퍼 윤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