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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치 사카모토
어느 백발 남자의 조각들
류이치 사카모토 Ryuichi Sakamoto
피아노와 전자음악. 배우이자 영화음악 감독. 백발의 일본인. 가장 순수한 상태의 음音. 지구의 소리를 좇는 사람.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조각을 찾아서.
첫 번째 조각
떠내려온 피아노
함께 들을 음악: Merry Christmas Mr. Lawrence
2011년 3월 11일, 일본 북동쪽 해안에서 진도 9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10미터가 넘는 해일이 몰려왔다. 새들은 하늘을, 바다는 땅을 덮었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었고, 물건들은 주인을 잃었다. 많은 것들이 그곳에 묻혔다.그로부터 1년 뒤, 왜소한 체형의 백발노인이 낡은 피아노 앞에 서 있다. “잘도 버텨냈군.” 쓰나미에서 살아남은 피아노라고 했다. 남자는 뭍으로 떠밀려온 새끼고래를 어루만지듯, 조심스러운 손으로 건반을 누른다. 망가진 피아노 앞에 앉아 한때 누군가의 위안이었을 소리의 기억을 가늠해본다.
위안,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게 음악이 해줄 수 있는 일을 생각하는 것. 불 꺼진 대피소, 이재민들 앞에서 세계적인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는 조금 송구한 표정을 짓는다. “부디 편하게 들어주십시오.”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그는 가만히 앉아 연주를 시작한다. 곡은 1983년 작품 <전장의 크리스마스>의 OST ‘Merry Christmas Mr. Lawrence’. 숲의 소리, 커다란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툭툭, 무심하게 시작한 연주. 피아노의 청량함과 첼로의 중후함, 바이올린의 처연함이 서로에게 몸을 기대며 하나로 어우러진다. 사람들은 열광도 환희도 없이 거장의 연주를 지켜본다. 말이 사라진 2012년 일본의 어느 중학교 강당에서 음악은 그저 공기처럼 자연히 놓일 뿐이다.
두 번째 조각
천재의 젊은 시절
함께 들을 음악: Rain
젊은 시절의 류이치 사카모토는 재능 많은 아이돌이자 배우였다. 도쿄예술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한 그는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Yellow Magic Orchestra’라는 3인조 일렉트로닉팝 밴드로 데뷔한다. 그를 점잖은 피아니스트로만 알았던 사람이라면 의외의 과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YMO는 일본 대중음악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슈퍼밴드로 회자되고 있다. 그들의 음악은 한때 유행하던 ‘시부야케이’ 음악의 시초로 평가되는데, 다이시댄스Daishi Dance나 프리템포Free TEMPO 역시 그들의 유산을 물려받은 뮤지션으로 손꼽힌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전장의 크리스마스>에 이어 <마지막 황제>에서도 연기와 음악을 병행한다. 창춘에서 뉴욕, 다시 런던을 오가며 일주일간 45개의 곡을 쓰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펼친다. 특히 <마지막 황제>를 통해 동양인 최초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게 되는데, 수록곡 ‘Rain’은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와 후궁의 이별 장면에서 등장하며 인물의 복합적인 심리를 극대화했다는 평을 받는다.
세 번째 조각
암에 걸린 남자
함께 들을 음악: Fullmoon
‘암은 편도선 안쪽, 3기 판정. 림프절까지 전이될 수 있다. 현재 3개 있음.’
남자는 암을 선고받고 무기력하게 앉아 있다. 20대에 처음 대중 앞에 나선 뒤 처음 있는 휴식의 시간이다. 잘만 치료하면 과반수는 나을 수 있고, 피아노를 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거라는 말에 그는 안도한다. 하지만 몸무게가 10킬로그램 이상 빠지고, 면역력이 떨어져 치아 조직은 죽어버렸다. 죽음에 가까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지나온 삶을 반추하거나 다가올 미래를 갈망할까.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단골집에서 즐겨 먹던 가쓰카레뿐이다. 그는 휴대폰에 오므라이스와 낫토 사진을 저장해놓고 투병을 견딘다.
암을 경험한 후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적 방향은 조금 더 집요해진다. 그는 미래의 불확실한 약속 대신 지금 자신이 가장 듣고 싶은 ‘소리’를 찾기로 한다. [async]에 수록된 ‘Fullmoon’은 자신이 작업한 <마지막 사랑>의 일부를 재해석한 곡으로, 소설가 폴 볼스Paul Bowles의 낭독과 함께 영원성에 대한 메시지를 던진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삶이 무한하다 여긴다. 모든 건 정해진 수만큼 일어난다. 극히 소수에 불과하지만. 어린 시절의 오후를 얼마나 더 기억하게 될까? 어떤 오후는 당신의 인생에서 절대 잊지 못할 날일 것이다. 네다섯 번은 더 될지도 모른다. 그보다 적을 수도 있겠지. 꽉 찬 보름달을 얼마나 더 보게 될까? 어쩌면 스무 번. 모든 게 무한한 듯 보일지라도.”
네 번째 조각
지구의 소리를 모으는 일
함께 들을 음악: Solari
남자는 숲으로 간다. 마른 낙엽을 밟고, 버려진 플라스틱 통을 때린다. 드럼통의 울림, 바람의 스침, 자벌레의 움직임. 모든 게 그의 주머니에 담긴다. 남자는 북극으로 간다. 화이트아웃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하염없이 걷고, 빙하 사이에서 가장 순수한 물의 소리를 찾은 뒤에는 아이처럼 웃는다. 비가 내리면 남자는 파란색 플라스틱 통을 머리에 쓰고 뒷마당으로 나간다. 비와 물통의 공명을 듣기 위해서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후쿠시마, 피아노가 떠내려온 그곳에서 남자는 오염된 모래를 밟는다. 망가진 피아노를 생각한다.
“쓰나미가 순식간에 밀려와서 소리를 자연으로 되돌려 놓은 겁니다. 그래서 나는 자연이 조율해준 그 쓰나미 피아노 소리가 굉장히 좋게 느껴져요. 억지로 조율한 피아노 소리는 인간에겐 자연스러운 소리겠지만 자연의 관점에서는 아주 부자연스러운 거죠. 그런 억지스러움에 대한 혐오감이 내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소리의 영원성, 그리고 자연스러운 소리에 대한 집착으로 그는 [async]라는 결과물을 낸다. 다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자신이 가장 듣고 싶은 음(악)을 만들었다는 남자. 지구의 소리를 모아 만든 이 앨범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아침, 일어나서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음을 아날로그 신시사이저로 표현할 것’, ‘수집한 소리들을 저마다의 고유한 템포를 가진 음악으로 만들 것’, ‘바흐의 합창곡을 은은하게 깔아놓은 듯한 음색에, 마치 아무런 규칙 없는 안개의 움직임 속에서 엄밀한 논리가 모습을 드러내듯 할 것’ 그렇게 류이치 사카모토는 ‘Solari’라는 곡을 통해 끊임없이 동경하던, 바흐의 ‘코랄 전주곡’을 자신만의 색깔로 재해석한다.
“‘async’ 같은 음악에 정답은 없으니, 내가 낸 답은 100퍼센트 자의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아직 올라본 적이 없는 산에 지도도 없이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 산 하나를 넘으면 다른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섯 번째 조각
음악 그 이상을 위한 전시
함께 감상할 전시: <Ryuichi Sakamoto: LIFE, LIFE>
피크닉은 <ECM, 침묵 다음으로 아름다운 소리>를 기획한 전시기획사 글린트가 운영하는 복합전시공간이다. 올해로 데뷔 40주년을 맞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예술 세계를 돌아보고자 <Ryuichi Sakamoto: LIFE, LIFE> 전을 기획했다. 귀에서 몸으로, 소리에서 본질로 이어지는 한 예술가의 작품 여정을 설치예술의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01 | 세 개의 흐름이 교차하는 곳
류이치 사카모토가 작업한 영화의 한 장면을 중심으로, 음악가 자신의 공연 실황과 그 둘을 재해석한 유성준 작가의 영상을 나란히 두었다. 세 개의 스크린은 서로를 보완하고 변주하며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재탄생한다.
02 | Water State 1
물의 순환에 매료된 류이치 사카모토는 야마구치정보예술센터 엔지니어들과 함께 네모난 물 상자를 만든다. 324개의 노즐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파동을 보고 있자면, 우주의 한 지점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03 | Insen with Alva Noto
노이즈 사운드의 거장 알바 노토Alva Noto와의 협업으로 이뤄진 이번 프로젝트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피아노 연주를 원자 단위로 분해해 영상과 노이즈로 재송출하는 작업이다. 사카모토가 끊임없이 찾고자 했던 소리의 근원과 맞닿아있다.
04 | Async-Volume
8년만의 새 앨범 [async]를 네 개의 공간에 나눠 전시했다. 특히 분할되어 영상이 나오는 액자에 귀를 기울이면 저마다의 소리가 들려온다. 모든 멈춘 풍경에도 저마다의 음악이 있다고 말하는 듯한 기획이다.
05 | LIFE-fluid, invisible, inaudible…
공중에 매달린 세 개의 수조를 올려다보는 형태로 구성된다. 내부에 설치된 진동자에 따라 수조의 물은 안개로 변하고, 시시각각 형상을 바꾸며 영상과 사운드를 ‘흐르게’ 한다. 수조 아래 누워 몸에 번지는 얼룩을 보고 있으면, 소리는 우리 몸에 어떤 형태로 새겨지는가, 질문하게 된다.
06 | For Peace, For Life
전쟁과 원전, 온난화 등 지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사회운동가로서의 류이치 사카모토를 조명한다. ‘예술이 선동의 수단이 되는 것을 지극히 경계하면서도,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모순을 결코 외면하지 않은 태도’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늘 조심스러운 태도로 주위를 둘러본다.
Ryuichi Sakamoto: LIFE, LIFE
A. 서울시 중구 퇴계로6가길 30
H. piknic.kr
T. 02 6245 6372
O. 2018년 05월 26일~10월 14일
에디터 김건태
자료 제공 GLINT, SKMTDO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