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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LACKMARKET
어느 날, 암시장
THE BLACK
MARKET
자그만 불빛도 스며들 수 없는 새벽녘. 작은 골목에 포장마차 수레 한 대가 들어선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삐죽이 튀어나온 눈으로 사람들을 말없이 바라보는 주인장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거래를 시작한다. 그는 주름이 깊게 파인 굵은 마디의 손으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받고, 또 전달한다. 모든 사람이 찾고 싶지만, 어느 누구도 알아서도 안 되는 곳. 암시장이다.
수레의 삐거덕 소리로 공기를 메우는 어느 골목. 허름한 행색의 사내는 어둠에 갇혀 알아보기가 영 힘들다. 그는 사람이 드문 길 위를 배회하며 눈빛으로 고민을 쏘아대는 이들에게 다가간다. 그는 장사꾼이다. 손에 잡히는 것을 거래하고, 손으로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것들을 거래하기도 한다. 암시장에서 거래를 하는 데엔 세 가지의 규칙이 있다. 물건은 물건으로만, 가치는 가치로만 거래가 가능하다는 것. 한번 제 손을 떠나거나 들어온 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거래하는 물건에 깃든 이야기를 솔직하게 전해야 한다는 것.
그때였다. 작은 손가방을 들고 걸어가던 한 여성이 다가왔다. 이름은 장인영, 올해 28세. 대형 출판사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어언 4년 차. 그녀가 사내에게 물었다. “여기서 무얼 하는 거예요?”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작은 입간판을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 거기엔 ‘암시장’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수레에는 부딪힐 때마다 찰랑찰랑 소리를 요란하게 내는, 앞 코가 누렇게 닳은 ‘주전자’ 하나와 새하얀 종이봉투에 ‘혼자력’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혼자력’이라 하면, 모든 일을 혼자 할 수 있는 힘인데, 으레 ‘용기’의 새로운 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봉투를 집어 들었다.
“주변에 누가 없어도 외롭지 않게 잘 살고 싶어요. 죽을 때까지 든든하게 이걸 고를래요. 사실 아직까지 밥도 혼자 못 먹을 정도로 누군가와 함께하는 일상에 매우 익숙하거든요. 하지만 언젠가는 오로지 저 혼자인 날이 오겠죠. 무엇이든지 혼자 할 수 있는 힘이라니. 왠지 값비싼 보험에 든 기분도 들어요.”
“그냥 가져갈 수는 없어. 무언가와 함께 바꾸어야만 해.”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저는 회사에서 버틴 지 4년 차예요. 상사에게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용기가 아주 두둑해요. 이걸 드릴게요. ‘상사’라는 존재만으로도 힘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모두 왼쪽 가슴에 사직서가 하나쯤은 있으니까요.”
“좋아.”
그녀의 손에선 상사에게 어떤 날카로운 말을 들어도 모두 튕겨내는 작은 고무풍선이 건네지고 사내는 하얀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기차표 하나가 들어있었다.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줄 기차표가 들어있어. 혼자 떠나는 거야. 당장 그런 상황이 닥치지 않으면 결코 이뤄낼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있지. 혼자 있는 것도 연습해 버릇해야 한다고.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떠나. 그곳에서 ‘혼자’를 감지해봐.”
밤은 깊어갔다. 그는 수레를 낑낑거리며 옮겨 다른 곳으로 향했다. 조금 더 높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서 그는 윗동네로 갔다. 슬그머니 달이 차오르고 있었다. 암시장 가판대 위로 달빛이 설핏 드리워지고 있을 즈음, 저 멀리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아저씨, 이게 뭐예요?”
이름은 이자연, 홀로 자취를 하는 잡지사 에디터다. 늘 질문이 많은 그녀는 손가락으로 주전가를 가리켰다. 수레 안에는 구석구석 닳고 닳은 누런 주전자와 풍선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낡은 수건으로 수레 안을 박박 닦으며 말했다.
“어느 할머니가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생전에 항상 함께 녹차를 마셨던 주전자야.”
이야기를 들은 여자는 차마 주전자를 만지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간혹 호오, 이얏 등 괴상한 감탄사를 내뱉기도 하면서.
“거래하는 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사고파는 일의 문제가 아니야. 이곳에 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이되는 경험이기도 하지. 시장은 그런 곳이야. 암시장이라면 더욱이 어떻겠어? 드러내기 싫은 것들을 팔아 버리고, 남몰래 음흉하게 좋아한 것들을 사려고 애걸복걸하지. 결국 여기는 타인에게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모이는 곳이라고 할 수 있지.”
“할머니는 그럼 왜 이 주전자를 판 건데요?”
“원래 너무 행복한 기억은 오히려 독처럼 고통스럽게 번져나가기도 하는 법이니까.”
“그럼 저는 이 주전자를 사고 싶어요.”
“사는 곳이 아니야 여긴. 교환하는 곳이지. 너도 너의 무언가를 내어놓아야 해.”
여자는 꼼지락거리며 가방에서 일자로 기다란 전기장판을 꺼냈다. 무겁고 늘어지며 꽤나 탄탄해 보이는 전기장판이었다. 한여름에 전기장판을 파는 여자.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 자취방 외풍이 심해서 사준 거예요. 제가 그에게 받은 마지막 선물인 셈이죠.” 그는 말없이 장판을 둘러 보고 툭툭 건드리며 냄새도 맡아 보았다.
“아빠는 제가 자취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제가 필요하다고 하면 뭐든 들어주었죠. 저렴한 거로 사달라고 했는데 전기장판은 잘못하면 불이 난다고 꽤나 비싸고 좋은 전기장판으로 사주었어요. 그런데 볼 때마다 마음이 좀 시려서…….”
“아주 잊고 싶은 건가?”
“아뇨, 그런 건 아녜요. 할머니도 할아버지를 잊고 싶어서 주전자를 판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좋아. 주전자를 가져가도 좋아.”
그녀가 손에 주전자를 쥐었다. 주전자는 노란빛을 띠더니 밝게 빛난다. 밤하늘 위의 달빛이 주전자에 그대로 담겼다.
그는 다시 수레를 이끌고 수풀로 갔다. 숲 속에는 도시에서 찾아보기 힘든 고요함이 있기 마련이다. 땅에 뿌리를 깊이 박은 돌덩어리에 바퀴가 자꾸 걸려 앞으로 나아가기가 영 힘들었지만, 그의 굵은 손가락은 익숙하다는 듯 수레를 이리저리 운전해 나갔다. 전등이나 달빛마저 가리어진 곳에서 그는 깊이 숨을 들여 마셨다. 사내는 ‘산’에서 나오는 내음이 마음에 들었다.
“이 전기장판 파는 건가요?”
단발을 한 여자였다. 이름은 정민지, 집에서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백수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전기장판을 찾아냈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수레 안에는 둥둥 떠다니는 풍선과 두꺼운 전기장판이 놓여 있었다.
“팔지 않아. 오로지 교환만 할 수 있어. 일면식 없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기억이 깃든 건 돈 주고 살 수 없는 거거든.”
사내의 말이 싱겁게 들려 못 미더우면서도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작은 MP3를 꺼냈다.
“아무거나 교환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매몰찬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일단 들어보세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꼭 이 MP3로만 노래를 들었어요.
수리비가 새로운 MP3를 장만할 수 있을 만큼 나와도 이것만 고집했다고요.특정한 시기를 떠올릴 수 있는 노래 목록도 있었죠. 그 시절에 내가 어디에 있었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는 노래들 말이에요. 이건 그냥 MP3가 아니라, 노래의 형태를 띤 저의 기억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 거라고요.”
“본래 음악은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지. 머릿속 해마들이 노래 안에 기억을 가두고 있는지도 몰라. 좋아, 그걸로 교환하지.”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흔쾌히 MP3를 건네받았다. 중간중간 손때를 탄 흔적을 보면서 그녀가 얼마나 애지중지한 물건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눈을 흘겨 살짝 보니 이병우의 ‘한강찬가’, 슈프림팀의 ‘말 좀 해줘’와 같은 노래가 보관된 것 같았다. 도저히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취향을 갖고 있는 여성이었다.
“한여름에 전기장판은 왜?” 그가 물었다.
“숲 속은 여름에도 추우니까요.”
“그래, 그 전기장판 무척이나 따뜻할 거야.”
그녀에게 건네진 전기장판 사이로 온기가 스며들었다. 굳이 전기선을 이어 꼽지 않아도 마치 조금 무거운 이불처럼 충분히 따뜻해져 있었다.
시간이 지나 해가 산 너머로 동그마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오고 가는 그의 수레 위에는 이제는 작은 MP3 하나와, 미움을 투박하게 튕겨낼 수 있는 풍선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의 시간은 이제 끝이 났다. 암시장은 이제 문을 닫는다. 여전히 낡은 수레 끝으로 잘 여며지지 않은 나사 하나 때문에 삐거덕 소리가 귀를 긁어냈다. 이제 어두운 어느 곳에서 외로운 눈빛을 머금고 있는 당신에게 사내가 보일 것이다.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사내가 수레를 끌고 있다면 그에게 다가가 거래를 시작하면 된다. 이곳은 암시장, 당신은 성실한 거래자가 될 것이다. 당신의 이야기가 깃든, 무언가를 내어놓으면서.
에디터 이자연
일러스트 오시영 등장인물 장인영, 이자연, 정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