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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달 — 작가
“실례합니다.” 신발을 벗기에 앞서 강아지 빌보에게 인사부터 건넸다. 네 발이 갈색인, 꼭 양말을 신은 듯한 강아지다. 빌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구달의 방을 찬찬히 둘러본다. 다양한 책들이 질서를 갖춰 꽂혀 있고 그 중간중간 작고 귀여운 것들이 놓여 있다. 강인한 취향으로 빼곡한 그녀의 세상엔 유난히 묵직하고 굳건해 보이는 가구가 하나 있었다. 방에 비해 조금 커보이는 4단 수납장. 세 칸이 양말로 가득한 그 안에서 나는 난생처음 온전한 양말의 세계를 보았다. 다채로운 소재, 색상, 모양, 패턴으로 가득한 그곳은 미지의 세상만큼이나 흥미로웠다.
코로나블루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로 어수선한 요즘이에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외부 활동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강아지 빌보랑 산책하고 양말 가게에 나가는 거 말곤 집에서만 지내죠. 양말 가게는 《아무튼, 양말》을 출간했을 때 함께 일해보지않겠냐는 제안을 받아 출근하게 된 곳이에요. 양말 편집숍인데 워낙 양말에 관심이 많아서 일하는 게 즐거워요. 따로 외우거나 배울 게 많지 않아 판매하는 데 적응도 쉬웠고요. 매장에서 다루는 양말 브랜드만 스무 개가 넘지만 원래 단골이었기 때문에 이미 그 브랜드들을 다 알고 있었어요. 가격대나 소재, 특성 같은 걸 줄줄 꿸 정도로요(웃음). 불편한 걸 굳이 꼽자면 가게까지 가는 게 좀 복잡한 거? 청담동에 있어서 앞뒤로 1킬로씩 걷고 지하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면서 다녀야 하거든요.
판매하는 건 어때요?
사는 거랑은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파는 것도 재밌어요. 특히 양말을 구경하는 손님들을 보는 게 좋아요. 양말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게 얼굴에 드러나거든요. 대화하는 목소리 톤이나 언뜻 들리는 내용에서도 느껴지고요. 여러 브랜드의 양말이 시즌별로 출시되는데, 점원이기 때문에 사계절 양말을 미리 볼 수 있다는 게 특히 좋아요. 꼭 양말 업계 일원이 된 것 같기도 하고요(웃음).
구매 욕구가 엄청날 것 같아요.
견물생심이라고, 보니까 자꾸 사게 되는데 일하는 매장에서 양말을 사니까 월급을 양말로 받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최대한 자제하고는 있지만(웃음)….
구달이라는 필명으로 작가 활동도 하고 있죠. 인류학자이자 동물학자인 제인 구달Valerie Jane Goodall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들었어요.
처음부터 본명보단 필명으로 활동하고 싶었어요. 친언니한테 어떤 이름이 좋을지 물어보며 아무 단어나 막 던지던 중에 제가 읽던 책 표지가 눈에 띄었어요. 사파리복을 입은 제인 구달이 그려진 표지였는데, 마침 제가 입은 옷이 그 옷과 비슷하더라고요. 그래서 가볍게 “구달로 할까?” 하면서 쉽게 짓게 된 이름이에요.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이 잘 안 되는거 말고는 다 좋아요. 화장품 브랜드 중에 구달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이름이 같은 것도 인연이라면서 신제품을 보내주기도 했어요. 필명 덕분에 SNS에서 독자들에게 ‘구달이 구달을 쏜다!’는 이벤트도 진행할 수 있었죠(웃음).
대기업 직원에서 출판사 편집자, 독립출판물 제작자, 프리랜서 편집자, 작가까지 그간 해온 일에 대해 들어보고 싶어요.
저는 계획적인 성격은 아니어서 좋아하는 걸 즉흥적으로 따라가며 살았어요. 대학을 졸업하곤 일반 사기업에 취직했는데 지낼수록 제가 조직 생활에 잘 안 맞는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왕이면 관심 있는 분야에서 일해보자 싶어서 출판사에 들어갔죠. 출판사에서 지내다 보니 이번엔 제 콘텐츠를 만들고 싶단 생각이 들어서 독립출판을 시작했어요. 그걸 계기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거고요. 그러다 출판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 편집자를 병행하던 시기도 있었는데요. 지금은 양말 매장에서 근무하면서 글을 쓰며 지내요. 처음부터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닌데, 막상 하고 보니 어릴 때부터 늘 책과 가까운 것에 끌린 것 같아요. 학생 때는 도서관에 갈 때마다 ‘여기 내가 쓴 책 하나만 꽂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꿈을 이룬 거네요. 작가로 지내면서 변한 부분도 있나요?
경험을 쌓으면서 글쓰는 방식이 조금 변했어요. 이전에는 많이 써서 저를 알리는 게 더 많은 글을 불러온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청탁이 들어오면 어려운 주제여도 일단 수락부터했죠. 이를테면 ‘사랑’ 같은 거요. 다른 필진들이 만남, 연애, 결혼에 관해 이야기할 때 저는 옷과 이별한 이야기를 적었어요(웃음). 그런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니까 기회만 잡으려고 하다가는 제가 잘 쓸 수 있는 글과 멀어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에게 맞지 않는 장르의 글이 제 이름으로 나갔을 때 역효과가 날 수도 있겠다 싶었고요. 그래서 요즘은 쓸 수 있고, 써보고 싶고, 잘하고 싶은 주제 위주로 쓰고 있어요.
《아무튼, 양말》은 잘 쓸 수 있겠다 싶은 소재였군요. 출판사에 직접 제안한 글이었다고요.
아무래도 양말은 거의 평생을 좋아해 온 소재니까요. ‘아무튼 시리즈’를 즐겨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나만의 ‘아무튼’을 생각해 볼 것 같아요. 저는 곧장 양말이 떠올랐고, 그간의 경험을 모으면 책 한 권은 쓸 수 있겠다 싶었어요. 중학생 때부터 좋아한 캐릭터 양말부터 하나씩 떠올려보면서 출간 기획서를 만들었어요.
느닷없이 묻고 싶네요. 구달에게 양말이란?
‘패션의 완성’이요. 포인트로 삼아 나를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아이템 같아요. 동시에 제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하고 확실한 방법 같고요. 옷이나 머리 스타일에 개성을 담는 덴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양말은 ‘요만큼’ 보이는 거니까 조용하게 개성을 드러낼 수 있어서 비교적 부담이 덜하죠. 빨간 양말을 신든, 시스루 양말을 신든 옷으로 걸쳤을 때랑은 무게감이 다르니까요.
오늘은 어떤 양말을 신었어요?
마더그라운드Mother Ground라는 신발 브랜드에서 나온 제품이에요. 실내에서 만날 테니 앞코가 귀여운 양말이면 좋을 것 같았어요. 저는 양말에 숨겨진 작은 디테일을 좋아하는데, 이 양말은 뒤꿈치 부분이 다른 양말들보다 좀더 올라온 형태로 색이 들어가 있어요. 제법 두툼해서 빌보랑 산책하거나 활동량이 많은 날 자주 신는 양말이에요.
양말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해요?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사소하고 별거 아닌 아이템이잖아요.근데 이렇게까지 공들여서 근사하고 귀엽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좋아요. 양말은 아주 작은 요소로도 기뻐진다는 게 매력적인데 학창 시절엔 그런 작은 기쁨도 규제하는게 영 못마땅했어요. 이건 《아무튼, 양말》에도 쓴 에피소드인데요. 한번은 신발을 신으면 흰 양말처럼 보이는, 발등에 캐릭터가 그려진 양말을 신은 적이 있거든요. 아주 자세히 봐야만 양말목이 일반 양말보다 살짝 짧다는 게 보이는 정도였는데 선도부 선생님은 한눈에 알아보시더라고요. 분한 마음에 냅다 교실로 뛰어왔지만 결국엔 양말을 빼앗기고 말았어요. 그땐 정말 화가 나고 억울했어요.
(4단 수납장을 가리키며) 양말은 여기 보관돼 있나요?
네. 이 중 세 칸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데, 네 칸을 모두 양말로 가득 채우는 게 목표예요. 첫째 칸에는 좋아하는 양말을 넣었고, 둘째 칸엔 색깔별로 분류해서 넣었어요. 얇은 소재 양말은 상하기 쉬워서 상자에 넣어 따로 공간을 만들어주기도 했죠. 셋째 칸엔 도톰하고 무게감 있는 가을·겨울 양말을 수납했어요.
이렇게 잘 정리된 양말장은 처음 봐요. 가장 좋아하는 양말은 어떤 거예요?
그때그때 바뀌는 편인데 오늘은 모네의 ‘수련’ 양말을 고르고 싶어요. 오래전부터 꾸준히 제 글을 읽어주신 독자가 선물해 준 양말인데요.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갔다가 제 생각이 나서 구매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색도 예쁘고 모네를 좋아하기도 해서 마음에 쏙 들어요. 재밌는 건 메인드인코리아 제품이라는 거예요(웃음). 그래서 더 특별하고 뜻깊어요. 한국이 양말을 잘 만드나 봐요.
(발가락 양말을 가리키며) 이것도 양말인가요? 패턴이 화려해서 꼭 장갑 같아요.
아! 이거 귀엽죠. 캐나다에 연수 갔던 친구가 돌아오면서 사온 크리스마스 양말이에요. 양발의 색이 다르고 패턴도 달라서 기분이 좋아지는 양말이죠. 크리스마스마다 이벤트 삼아 신고 있어요. 이 옆에 있는 양말은 해리포터 양말이에요. 해리포터 마니아인 형부가 해리포터 굿즈를 정기적으로 배송해 주는 서비스를 받았었는데 그 박스에서 양말만 골라 선물로 줬어요. 이거 신으면 호그와트에 입학할 수 있을 것 같죠(웃음)?
양도 어마어마하네요. 모두 몇 켤레나 돼요?
오늘 정리하면서 세봤는데 빨래통에 넣은 거 말곤 202켤레가 있더라고요. 책을 쓸 때만 해도 88켤레였는데(웃음). 양말가게에서 일하다 보니까 저희 브랜드에서 만든 양말을 받는 일도 많고, 《아무튼, 양말》 덕분에 선물도 전보다 많이 받거든요. 세기도 힘들어서 오늘도 세다 말고 ‘그만 셀까….’ 싶기도 했어요(웃음).
오래 좋아한 만큼 양말 취향도 달라졌을 것 같아요.
처음엔 패턴 있는 양말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요새는 소재가 독특하거나 구성이 재미있는 양말들이 좋아요. 예를 들어 레이어가 두 겹씩 있는 양말 같은 거요. 디테일이 독특한 것 들에 좀더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푸른색 양말을 꺼내며) 이 양말도 재미있어요. 회화적인 양말을 만드는 브랜드 제품인데, 하늘 위에서 땅을 내려다본 것 같은 풍경이 담겨 있어요. 하늘 저 위에서 본 구름, 땅, 산, 들판, 비행기…. 독특하고 예쁘죠?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디테일이 다 달라서 양말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즐거워요.
양말을 살 때 나만의 원칙이 있나요?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불편하면 사지 않아요. 만져보면 대충 느낌이 오는데 신축성이 없어서 쪼일 것 같은 양말은 사지않죠. 또, 신줏단지 모시듯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하는 양말도 제 취향은 아니에요. 너무 섬세해서 편히 신을 수 없는 시스루 소재거나, 지나치게 하얘서 때 타면 눈물이 날 것 같은 양말도요. 저에게 양말은 신을 수 있어야 해요. 수집하려고 사는 건 아니거든요.
양말에 대한 애정이 어디까지일까 궁금해지는데, 다른 사람의 양말에서 매력을 느낀 적도 있나요?
있죠. 일부러 보는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양말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거든요. 얼마 전에는 지하철역에서 계단을 오르다 제 앞에 가는 중년 여성의 양말을 보게 됐어요. 뒤축이 없는 신발을 신고 계셨는데 뒤꿈치 부분에 커다란 곰이 그려져 있더라고요(웃음). 너무 귀여워서 온종일 기분이 좋았어요. 연예인 중에서도 유독 양말이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는데 가수 현아 씨가 그래요. 옷도 잘 입지만 옷과 어울리는 양말을 참 예쁘게 신더라고요.
좋아하는 아이템으로 기억된다는 건 특별한 일 같아요. 양말 애호가로 인정받을 때 어때요?
일단 기분이 좋아요. 뭔가를 보고 저를 떠올려준다는 건 다정한 일이잖아요. 제 앞에서 “구달은 양말 애호가야!”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보다 저를 만날 때 가장 아끼는 양말을 신고 온다든지, 제가 선물한 양말을 일부러 골라 신고 나온다든지 하는 걸 보면 내심 기뻐요. 그런 걸 알아차리는 것도 좋고요.
양말을 진짜 좋아한다는 게 느껴져요(웃음). 근데 ‘진짜 좋아한다’는 건 뭘까요?
직접 다 쓰는 거요. 양말로 이야기하자면 양말장에 넣어두지 않고 신고 즐기고 누리는 거고, 책으로 이야기하자면 직접 읽고 이해하면서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저한테 진짜 좋아한다는 건 사용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열심히 신어서 올이 풀리고 뭐가 많이 묻은 양말이나 자주 읽어서 낡은 책에 더 큰 애정이 생겨요.
좋아하는 게 있다는 건 살아가는 데 큰 활력이 되는 것 같아요.
맞아요. 하지만 뭔가를 좋아할 때 나만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즐거움을 누리고 싶진 않아요. 작은 실천이지만, 예전에는 날이 추워지면 울이나 캐시미어 소재 양말을 많이 샀어요. 보드랍고 따듯하니까요. 그때 산 양말들을 지금도 신기는 하지만 앞으로 동물성소재의 양말은 새로 사지는 않으려 해요. 최근 들어 제 선택으로 다른 존재가 고통스러워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거든요. 빌보랑 같이 살면서부터 동물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는데, 제 개성을 지키면서 동물권도 존중하는데 고민이 많아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지만 천천히 더 좋은 쪽으로 변해가고 싶어요.
가치관이 충돌하거나 균형이 잘 맞았던 경험이 있나요?
연결되는 지점을 맞닥뜨린 적은 있어요. 2019년에 황금돼지해를 기념하고 싶어서 돼지가 잔뜩 그려진 양말을 신었거든요. 한 마리만 황금돼지인 게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양말 사진을 찍고 그날 저녁으로 돈가스를 먹었는데요. 문득 양말로 동물의 귀여움을 소비하면서 정작 동물을 고통스럽게 죽여 만든 돈가스를 먹는다는 게 모순적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내면과 외면의 가치가 충돌하는 느낌이었죠. 귀여운 양말을 계속해서 신고 싶다면 하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것들은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육식을 하지 않고 있어요.
세심한 고민인 것 같아요. 삶의 태도가 보이는 것도 같고요.
주변 관계들에 영향을 받으면서 조금씩 바뀌어가는 것 같아요. 저만 아름답게 사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있는 모든 요소와 제가 잘 어우러지면 좋겠고, 그러면서도 제 삶엔 저만의 개성이 있으면 좋겠어요. 누군가 깎이고, 어딘가 덜어내지 않아도 조화롭게 어울리는 삶. 그게 진짜 아름다운 삶 같아요.
아름다운 삶을 위해 특별히 노력하는 바가 있나요?
내가 아닌 다른 존재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해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의 시각도 고려하려고 하죠. 제 시각은 제 경험에만 의존하니까 좁고 편협할 수밖에 없는데, 그걸 알면서도 익숙하니까 자꾸 제 시선에만 갇혀 있게 돼요. 제가 책을읽는 것도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더 다양한 시각을 경험하기 위해서예요.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모든 사람이 다면적인 존재라는 걸 잊지 않고 싶어요. 저는 누군가 저를 납작하게 보는 게 싫은데, 남들도 분명히 그럴 테니까요. 납작하게 생각하는 건 간편하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애쓸 거예요. 애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니까요.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이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