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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샐러드 가족 — 정안에디·제타·가람·산·풀잎
평범하지 않은 가족을 만났다. 그 이름도 무지개샐러드 가족! “드레스코드는 알록달록입니다.”라는 요청에 충실히 화답한 다섯 식구가 카페 ‘나무라듸오’에 모였다. 전주 객사를 11년 동안 지키다, 올해 4월 풍남동에 다시 문을 연 바로 그곳이다. 카페를 중심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부부와 삼남매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나만의 삶을 살아간다. 전주와 논산, 서울과 덴마크를 무대 삼아 누가 뭐라든 꿋꿋하고 자유롭게.
대가족을 만났네요! 다섯 식구는 ‘무지개샐러드 가족’이라고 불려요. 무슨 뜻이에요?
가람 무지개는 알록달록하고, 샐러드는 다채로운 재료를 넣어서 만들어요. 각자의 색이 확실한 우리 가족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에요.
가족은 전주를 본점으로 둔 카페 브랜드 ‘나무라듸오’를 운영하고 있죠.
정안에디 지금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이곳은 풍남동 본점이지만, 원래 나무라듸오는 전주 객사 영화의 거리에 있었어요. 개업 날짜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2007년 12월 21일(웃음).
제타 그러다 2018년에 가게를 정리하고 논산 시골 마을로 이주했어요. 원래 전주의 산자락에서 살았는데, 주변이 도시화되면서 자연스럽게 귀촌을 꿈꾸게 된 거예요. 그러다 올해 막내 풀잎이가 열네 살이 되면서 도심에서 친구도 만나고 놀고 싶어 했죠. 논산 집에서 전주까지는 차로 근 한 시간이 걸리니, 풀잎이를 위해 다시 카페를 열까 고민이 되더라고요. 가람이랑 산이는 어릴 때 카페에서 노는 게 일상이었는데, 풀잎이는 일곱 살에 논산으로 떠났으니 카페에 관한 기억을 더 많이 갖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그때 지인이 이 건물을 소개해 줬고 마음에 들어 올해 풍남동에서 나무라듸오를 다시 시작했어요.
정안에디 역시 개업일을 정확히 기억해요. 2025년 4월 29일!
제타 (웃음) 전주국제영화제를 앞두고 속도를 내서 오픈했어요.
나무라듸오 본점이 잠시 쉬어갈 무렵, 분점들은 활발히 손님을 맞았다고요.
정안에디 전주 객사 시절부터 많은 사람들이 나무라듸오라는 브랜드명을 사용하고 싶어 했어요. 당시에는 우리가 아니면 나무라듸오의 철학과 느낌을 유지하기 힘들 거라 생각해서 제안을 모두 거절했죠. 세월이 지나면서 이제는 이 이름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게 해도 괜찮겠다는 이야기를 제타와 했는데, 은퇴를 앞둔 한 부부가 완주군 봉동읍에서 분점을 하고 싶다고 찾아왔어요. 그래서 최초의 분점 ‘나무라듸오 봉동점 다오’가 탄생했죠. 그분들이 원래 카페 이름으로 ‘다오’를 염두하고 있었거든요. 서울에서는 3년째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안에서 ‘나무라디오 한국외대점’을 운영 중이에요.
제타 올해 친조카들은 전주 태평동에 ‘나무라듸오 보라빛보따리’를 열었어요. 봉동점과 마찬가지로 커피 컨설팅, 교육을 꾸준히 해오고 있죠. 집이 있는 논산 연무읍에는 남편이 맡은 로스팅 공장이 있고요.
카페를 둘러싼 각자의 역할이 있나요?
산 한국외대점은 첫 오픈 때부터 제가 운영을 맡았다가 군 입대로 잠시 떠났어요. 얼마 전 전역했으니 곧 다시 매장으로 돌아가요. 이번 학기는 아버지가 많이 도와주실 예정이에요. 평일에 서울에서 지내시다가 다시 주말에 전주로 내려가시는 일정으로요.
제타 산이가 군대 가 있는 동안 가람이가 한국외대점을 맡아줬어요. 가람이는 평소엔 포스터나 라벨처럼 디자인이 필요한 영역을 담당해 주고 있고요. 저는 홈스쿨링하는 풀잎이랑 전주 본점에 같이 출근하고, 풀잎이는 요즘 케이팝 댄스 스튜디오를 다녀요. 남편은 원두를 이곳저곳에 공급하고 전반적인 나무라듸오 관리를 도맡고요. 아, 홍보도 제 담당이네요. 우리는 각자 자기 일을 열심히 하다가 카페를 중심으로 모이고 또 흩어져요.
브랜드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되었어요?
제타 나무라듸오 이전에는 전북대 구정문에서 파스타 가게 ‘올리브가든’을 운영했어요. 그곳에서 오래 아르바이트하던 친구가 나무라듸오라는 이름을 선물해 준 거예요. 나무와 라디오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고, 또 카페 건물이 한옥이니까 나무에서 라디오가 흘러나오는 느낌이라고도 했죠.
정안에디 그때 카페 건물은 지은 지 60년이 넘은 한옥이었어요. 지금도 전주 객사에 그대로 남아 있고요. 이름에서도 예스러운 분위기를 살리고 싶어서 ‘디’에 획을 하나 더해 ‘듸’로 쓴 거예요.
오늘 무지개샐러드 가족을 꼭 만나고 싶던 이유는 삼남매 모두 홈스쿨링을 받으며 전주와 논산에서 성장했다고 접했기 때문이에요. 보기 드문 이 삶이 무척 궁금했는데, 어릴 땐 일과를 어떻게 보냈어요?
산 다른 친구들이 학교에서 공부할 때 저는 밖에서 뛰어놀고, 새총 만들어서 새 잡으러 다니고, 근처 할머니댁 놀러 가고, 공부하고 싶으면 학원도 가고 그랬죠. 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경험해 볼 기회가 많아서 넓은 세상을 일찍 배웠어요. 압박을 받고 자라지 않았으니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기회가 닿는 대로 시도해 보게 되었고요.
가람 저희가 매일 해야 할 것들이 있긴 했어요. 영어 CD 듣기, 바이올린 연습 같은 것들이었는데 강력한 의무는 아니라 잘 지키진 않았지만요(웃음). 그때 열심히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을 때도 있는데, 어쨌건 그때의 제가 원치 않았던 거니까요. 이제는 제가 꼭 필요하다고 느끼는 건 자발적으로 잘 지키고, 지속하게 돼요.
자유로운 삶의 방식이 준 또 다른 영향이 있나요?
산 카페에 자주 드나들다 보니 어린 나이부터 자연스럽게 어른들과 대화할 기회가 많았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어른 앞에서 어려워할 때도 저는 좀더 편안하게 대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가람 음… 이건 성향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저는 외향적인 산이와 달리 어른들 대하기가 어려웠거든요. 그래도 그 과정에서 확실히 느낀 건 친구는 나이 제한이 없다는 거예요. 당시 친구가 없어서 외롭지 않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사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친구일 수 있더라고요. 어느 날은 또래 친구가 너도 학교라는 작은 사회를 경험해 봐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는데요. 생각해 보니 저는 이미 학교 밖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정말 그렇네요? 자유로운 일상 덕에 또래에겐 낯선 일도 많이 경험해 봤을 것 같아요. 나 이것까지 해봤다, 있어요?
산 가깝게 지내는 대학 교수님이 축구를 좋아하세요. 교수님 안식년을 맞아 1년 동안 전국에서 열리는 축구 경기를 같이 보러 다녔어요. 열일곱에 일본에 사는 전 핸드볼 국가대표 삼촌 권유로 혼자 일본으로 떠나 3주 정도 살면서, 대학생 핸드볼 선수들과 운동도 하고 여행도 했죠.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잘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지내다 왔어요.
가람 저는 열여섯에 첫 머리 탈색을 해봤어요. 사촌 언니가 갑자기 탈색을 하고 나타나서 저도 해보고 싶었거든요. 화장도 원 없이 해봤고요. 그땐 인스타그램이 지금보다 순수하던 시대라 (웃음) ‘#패션’ 해시태그도 걸고 사진을 올렸는데요. 그때 해시태그 타고 들어온 친구랑 친해져서 아직도 연락해요. 인스타그램에서 친구 사귄다는 게 당시엔 흔치 않았는데, 저는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친구를 사귀어본 거예요.
우와! 전부 학교 밖이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네요.
제타 물론 이런 특별한 경험들도 있었지만, 저는 오히려 아이들의 사소한 일상이 더 멋지다고 생각해요. 눈이 많이 내린 새벽, 늦게 퇴근한 아빠와 눈싸움도 하고 이글루도 만들었어요. 예전에 살던 주택 뒷산 비탈에는 소방도로가 나 있었는데요. 우리는 이곳을 바람의 언덕이라고 부르면서 겨울이면 썰매를 타곤 했죠. 그 언덕이 중학교 근처라 창 너머로 학생들이 수업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기분이 왠지 묘하더라고요(웃음). 그리고 가끔 제가 카페 일로 잠시 외출하면, 가람이와 산이는 유모차에 풀잎이를 태워 전주천을 따라 나무라듸오까지 걸어와서 직접 만든 샌드위치를 깜짝선물로 건네주기도 했어요.
이렇게 자유로운 방식의 홈스쿨링을 시작한 이유가 궁금해요.
제타 아이들의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었어요. 돈이 없어도 당당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매일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길 바라서요. 그런데 학교에서는 이런 저의 바람이 실현되는 걸 기대하긴 어렵더라고요. 가람이가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는 동안 많이 아팠어요. 긴장을 많이 하다 보니 배가 자주 아프고 힘들어했죠. 어느 날은 혹시 꾀병이 아닐까 싶어서 조심스레 의사 선생님께 여쭤봤는데, 단호하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아이가 아프면 정말 아픈 거라고. 그때 너무 부끄러웠어요.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아이들을 의심하지 않았어요. 가람이를 지키려면 학교를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는 결정을 내린 뒤로는 먼 미래까지 미리 걱정하지 않아요. 지금 행복하게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기분 좋게 살아가면, 아이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의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라 믿어요.
가람 씨는 학교 다닐 때를 기억하나요?
가람 친구들과의 관계가 조심스럽고 힘들었던 기억이 많아요. 그런 거 있잖아요, 분명 어제까진 친했는데 다음 날 갑자기 나를 째려본다거나(웃음). 결국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른 채로 끝나버리곤 했죠. 어릴 땐 사람의 마음을 혼자 파악하려 하고, 내가 뭘 잘못했는지 살피는 성향이어서 관계가 더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홈스쿨링을 하면서는 긴장이 많이 풀리고, 스스로를 들여다볼 시간이 많아졌어요.
여덟 살 가람이의 어려움에 공감해요. 이제 막 관계를 배우는 아이에게 학교가 참 어려운 공간이 될 때도 있잖아요. 그런데 삼남매의 삶의 방식은 전주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데, 주변의 우려는 없었어요?
제타 어떤 분들은 아이들한테 “너희가 정말 원하는 삶은 엄마의 지향점과 다른 게 아니냐?”라고 묻기도 했고, 오랫동안 지켜본 분들조차 미래 계획을 계속 캐묻곤 했어요. 그럴 땐 속상하고 화도 났죠. 그런데 어느 날 가람이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저는 행복하게 살 거예요. 그리고 저한테는 엄마가 있어요.” 그 말에 정말 큰 감동을 받았어요.
가람 사실 지난 20년 동안은 우리의 홈스쿨링이나 제 삶이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어요. 그런데 요즘엔 엄마의 교육 방식을 궁금해하는 분들이 늘었어요. 제가 나에 대한 확신이 생기면서 하고 싶은 일을 자신감 있게 해나가고 있으니까요. 물론 이 길을 선택하게 된 건 엄마 영향이 크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저런 삶도 있구나.’ 하고 조금씩 인정해 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같은 인터뷰 자리가 더 뜻깊고 신기해요. 열심히 나의 길을 개척하다 보니 이런 기회도 찾아오는구나 싶어요.
가람 씨가 지금의 모습으로 도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고요.
가람 네, 열아홉 살에 덴마크 인생학교 ‘호이스콜레(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평생교육 기관으로, 삶에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배우고 공유하기를 목표로 한다.)’에 다녀왔어요. 호이스콜레는 삶을 배우는 곳이에요. 쉼을 누리기도 하고, 예술이나 스포츠 같은 다양한 활동을 경험할 수도 있죠. 정말 행복했어요. 세상은 넓고, 내가 살아갈 곳도 많으니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가면 된다는 걸 깨달으면서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리고 덴마크에서는 누군가 말하지 않는 사실을 굳이 캐묻지 않고, 상대가 나와 다른 삶을 살아왔다면 그냥 그랬구나 하고 받아들여요. 거기서 큰 위로를 받았어요.
제타 호이스콜레는 아이들의 배움을 위해서 세계 곳곳의 기관들을 알아보다 찾은 곳이에요. 가람이 입학 전 가족 모두 가봤는데 저도 다니고 싶더라고요. 18.5세 이상 누구나 입학이 가능하고, 사람을 그 자체로 바라봐 준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저도 제가 가고 싶은 호이스콜레를 정해두었어요. 60이 되면 가보려고 해서 그때가 기다려져요.
가람 씨는 호이스콜레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가람 퍼커션 수업에서 연주를 어려워하는 제게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처음부터 모든 걸 잘할 순 없고, 성장하려면 실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요. 스키를 타다 넘어져도 그냥 누워 있으면 눈이 쌓여 고립되니 일어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만큼 넘어짐도 꼭 필요하다고 말씀해 주셨죠. 크로키 시간에도 저는 자꾸 페이지 안에만 그림을 그리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좀 더 크게 표현해도 돼, 페이지가 넘쳐도 괜찮아.”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에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어요(웃음). 한국 사회는 실수가 없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 저도 모르게 완벽을 추구하게 됐거든요. 그런데 호이스콜레에서는 오히려 완벽하면 바보가 되는 것 같았어요. 세상에 완벽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큰 위로를 받았고, 저는 더 단단해졌어요.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한결 편안해졌고요.
덴마크는 위로를 안겨준 고마운 곳이네요. 그럼 가람 씨에게 전주는 어떤 의미예요?
가람 소소한 대답이지만, 정말 집 같은 곳이에요. 나무라듸오 한국외대점을 돌보면서 서울에서 1 년 6개월간 살다 보니까 전주로 내려가는 길이 너무 좋았어요. 내가 돌아갈 곳, 편안하게 느끼는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됐죠.
제타 씨도 같은 질문에 답해볼까요?
제타 어떤 지역이든 우리의 무대가 될 수 있는데, 저한테 전주는 데뷔 무대 같은 곳이에요. 언제든 다시 와서 또 공연해도 되는 무대.
무지개샐러드 가족처럼, 여러 도시를 무대로 나만의 삶을 살아가고 싶은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제타 음, 사실 많은 분들이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생각보다 한국인들은 모험심과 용기가 많거든요. 재능도 정말 많죠. “원한다면, 절실히 원한다면 이루어진다.” 저는 이 말을 믿어요. 그냥 해보세요. 궁금하다면 앞서 그 길을 걸어본 이들에게 주저하지 말고 물어보세요. 혹시 거절을 당하더라도 다시 다른 이를 찾아보세요.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자신만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거예요.
가람 저는 엄마와 달리 확신이 없으면 쉽게 망설이고, 영화 〈인사이드 아웃2〉(2024)의 ‘불안이’ 캐릭터처럼 머릿속에 수많은 계획을 떠올리는 편이에요. 세심한 고민은 장점이 될 수 있지만, 끝없는 걱정은 결국 시간 낭비일 뿐이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우리가 집중해야 할 건 ‘잘했다, 못했다’가 아니라 ‘내가 했다’는 사실이에요. 첫발을 내딛는 건 언제나 두렵지만, 그 작은 걸음들이 모여 삶을 완성한다고 믿어요. 행복해할 미래의 나를 그리며, 오늘도 천천히 한 걸음 내디뎌보세요.
엄마 제타 · 아빠 정안에디의 소장품
제타 | 추억의 사진
나무라듸오 이전에 운영했던 파스타 가게 올리브가든 내부를 찍은 사진이에요. 아빠 정안에디의 젊은 시절 모습이 담긴 사진도 보여드릴게요. 둘 다 나무라듸오 본점 선반에 두었어요
정안에디 | 오크통
남편이 처음 커피를 시작했을 때부터 사용해 20년 정도 된 물건이네요. 핸드드립 커피를 내릴 때 원두를 갈아 담는 통인데, 많이 닳았지만 여전히 쓰고 있어요.
제타 | 《야누슈 코르차크의 아이들》
삼남매를 키우면서 많이 참고했던 책이에요. 깊게 마음에 닿은 책 속 한 구절은 제가 쓴 《수선의 기쁨》에도 실렸어요.
정안에디 | CD
오래전부터 나무라듸오에서는 진공관 앰프를 통해 커다란 스피커로 음악을 틀었어요. 추억의 CD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앨범을 소개할게요. 〈냉정과 열정 사이〉(2001) OST와 에디 히긴스Eddie Higgins 피아노 연주 앨범이에요.
큰딸 가람 · 둘째 산 · 막내 풀잎의 소장품
가람 | 디지털카메라
가족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하던 카메라예요. 렌즈를 360도 회전해서 셀프 카메라로도 쓸 수 있어요.
산 | 축구복
전국 축구 여행을 함께 떠났던 교수님이 선물해 주신 축구복이에요. 선수들 사인도 그려져 있고, 추억이 많이 묻어 있답니다.
가람 | 맥북
열일곱 살 때 처음으로 선물 받은 맥북이에요. 이 맥북이 생기고 일러스트도 처음 다뤄봤어요.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해준 고마운 물건이에요.
풀잎 | 애착 인형
어릴 때 어디서나 꼭 들고 다닌 백호 인형이에요. 손때 묻고 낡았지만 언제나 사랑스러워 보여요.
에디터 차의진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