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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ma & Book
8년째 사업을, 아니 장사를 하고 있다. 내가 장사라니 말도 안 돼! 하지만 먹고살 길이 없으니 이거라도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 근 10년에 가까워 오고 있다. 여기까지 버티고 있는 비결은 나도 모르겠고, 그냥 안 망한 게 기적일 뿐이다.
어느 저녁, 여느 때처럼 티브이 앞에 앉아 넷플릭스를 뒤지다가 내가 좋아하는 야쿠쇼 코지가 나오는 드라마 하나를 발견했다. 제목은 〈육왕〉. 아니 뭔 제목이 이렇게 육체적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틀었더니 버선 공장 이야기였다.
주인공 미야자와 코이치는 100년을 이어온 버선 회사 코하제야의 4대 사장이다. 말이 좋아 100년 기업이지 과거의 영화는 사라진 지 오래, 21세기의 버선 공장은 망하기 직전이다. 요즘 누가 버선을 신는가? 5대째여야 할 아들 역시 버선 공장 따위 망해버려라, 좋은 회사에 취직하려고 날마다 면접을 보지만 매번 탈락한다. 위기에 처한 미야자와에게 열정적인 은행 직원 사카모토가 제안한다. “버선 제조업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신규 사업을 고려해 보시죠. 100년을 버틴 코하제야만의 강점이 반드시 있을 겁니다.”
그리하여 버선 회사는 느닷없이 마라톤 슈즈, 그러니까 마라톤 버선을 개발하게 된다. 드라마의 야릇한 제목 ‘육왕’, 일본어로 ‘리쿠오’는 육상의 왕을 뜻하는 그들의 마라톤 버선 이름이다. 과연 돈 없고 백 없는 코하제야는 완벽한 마라톤 슈즈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인가, 인기 마라톤 선수 모기 히로토에게 리쿠오를 신길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리쿠오를 신은 모기는 부상을 딛고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할 것인가, 그의 우승으로 코하제야의 미래도 밝아질 것인가, 아들 다이치는 버선 공장으로 돌아올 것인가. 뻔하지만 뻔해서 더 흥미진진한 질문들을 품은 채 이 드라마는 가볍게, 그리고 뚝심 있게 달려 나간다.
일본 드라마의 각종 정형화된 설정과 연출, 연기의 단점들을 고스란히 탑재한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게 하는 데는 주연을 맡은 야쿠쇼 코지의 살아 있는 연기의 힘이 크다. 그리고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아, 어쩔 수 없이 이번 달에는 그 얘기를 해야겠군.
그 얘기, 그 얘기라 함은 바로 나의 일, 나의 사업 얘기다. 나는 사업을 한다. 아니 사업보다는 장사라고 하는 게 맞다. 나는 온라인으로 물건을 판다. 처음 시작할 때는 누구도 이 장사가 오래갈 것이라 믿지 않았지만, 어느 누구보다 내가 가장 믿지 못했지만, 어느덧 시작한 지 8년째가 되었다. 어영부영 버티다 보면 어찌저찌 10년이 될 것 같다. 놀라운 일이다. 레드오션 중의 레드오션, 온라인 상거래업에서 8년을 버티고 10년을 버틴다는 것, 남의 일이라면 대단하게 느껴질 것도 같지만 막상 내 처지에서는 그렇지도 않다. 그야말로 우당탕퉁탕 10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시작해 작은 실패와 작은 성공을 반복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렇다고 내가 운영하는 상점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번창하는가 하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뭐랄까, 지금껏 안 망한 게 기적이라고 해야 하나?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이야기할 자리가 있을 때마다 나는 늘 “생업은 따로 있고요, 글쓰기는 부업입니다. 일종의 빡센 취미생활이라고 할 수 있죠.”라고 말한다. 그 말이 맞다. 그런데 나는 내 생업인 장사와 글쓰기가 영 관계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장사가 있기에 글을 쓰며 지치지 않는다. 글쓰기가 있기에 장사에 감사할 수 있다. 장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장사 덕분에 저축도 하고 집도 살 수 있었고(비싼 집 아님) 커피도 사 마시고 옷도 사 입고 여행도 가고 빵에 버터도 두껍게 발라 먹게 되었다. 일하는 건 물론 싫지만(누가 일을 좋아해?) 장사는 싫어해 본 적이 없다.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마음이 두근거린다. 장사하며 살 거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살고 있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인간이 자기 한계를 미리 그어둘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한다.
얼마 전 작고 귀여운 책 한 권이 도착했다. 이름은 《터틀넥프레스 사업일기》. 내 책 두 권을 함께 펴낸 터틀넥프레스의 대표 김보희, 아니 이렇게 말하면 좀 어색하고 나의 ‘보희 님’이 쓴 책이다. 오랜 시간 회사원으로 일하다가 출판사를 차려 책을 한 권씩, 두 권씩 만들어가며 그는 매일 일기를 썼는데, 그 일기를 책으로 펴낸 것이다. 보희 님의 목표는 매년 한 권씩 ‘사업일기’를 출간하는 것. 이 책을 통해 그는 1인 출판업의 노하우뿐 아니라 어쩌다 보니 사업하게 된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두려움과 설렘을, 행복과 불행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그는 사업의 성공과 실패가 문제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작은 출판사를 조금씩 일구어가는 매일매일이 나의 소중한 인생임을 밝힌다.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한마디 보태(에헴) 사업의 가장 즐거운 점이 무엇인가 하면, 이것이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인 동시에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가게는, 하나의 브랜드는, 하나의 회사는 하나의 세계다. 내가 만든 세계.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고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하며 내가 원하는 이상향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 이 점이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이 점이 가장 곤혹스럽다. 왜냐하면 우리의 꿈과 이상은 종종 이윤 추구라는 사업의 목표로 향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이런 부분을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하고 있다. 그러면서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이윤 추구가 최종적이고 유일한 목표가 아니라, 수많은 목표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면 사업은 다시 재미있어진다는 것이다. 나의 목표 중에는 이윤 추구도 분명히 있지만(가장 중요하긴 하다). 내가 재미를 느낄 것, 일하면서 즐거울 것, 성장하고 있고 배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 다른 이가 정해준 목표와 속도로 정신없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한 목표와 속도로 느긋하게 갈 것 등도 있다. 그런 목표의 달성이 조금 부족한 이윤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는다. 사업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사업이 내 인생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나에게서 시작한다. 내가 주도권을 잡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나 좋을 대로, 나 편한 대로만 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이 집의, 이 가게의 주인이다. 그래서 여기에 온 손님들이 좋은 시간을 보내다 갈 수 있도록, 모자람과 불편함이 없도록, 그들이 이곳에서 발견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찾을 수 있도록, 손님의 마음이 되어 하나하나 애써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마음은 글을 쓸 때의 마음과 꼭 같다. 내 글은 나의 이야기이고 그 모든 것은 나에게서 비롯되지만, 그것을 글로 쓸 때는 내 글을 읽게 될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물론 내 글이 완벽하지 못한 것처럼 나의 장사도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 8년을 해도 모르는 것과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런데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아직도 더 배울 것이 많고, 더 해볼 것이 많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생각하면 즐겁다. 즐겁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육왕〉을 계속해서 보다 보니 내가 중요한 걸 빼먹었다는 걸 알게 됐다. 사업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건 바로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육왕〉에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등장하는 무척 오글거리는 음악이 있다. 일본어 가사 중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알아듣는다. 히토리쟈 나이. 혼자가 아니야. 등장인물들은 매회 그 음악에 맞춰 눈물을 글썽인다. 오오, 역시 오글거린다.
그러게, 사업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보희 님 역시 노트 맨 뒷장에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은희(은혜 갚을 보희) 리스트’를 써두었다고 했다. 10년 가까운 세월을 버티기까지 나 혼자였다면 불가능했다. 정말로 그렇다. 나의 부족한 면을 동료들이 채워주었고, 그들의 부족한 면을 내가 채워준다. 힘든 일이 있어도, 벽 앞에 선 것처럼 막막할 때도 서로 용기를 북돋우며 버틴다. 셋이 함께라면 뭘 못 하겠느냐며 불안을 가라앉힌다. 희망이라는 소중한 것을 공유한다.
오늘도 안 망한 게 기적이다. 기적으로 가득 찬 이 세상, 나는 씩씩하게 집을 나서 나의 누추한 사무실로 들어가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컴퓨터를 켜고 자리에 앉아 어제의 매출을 확인한다. 오늘 하루 또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내가 할 일들을 하나씩 처리한다. 오늘도 밥상에 올릴 반찬거리를 사기 위하여, 맛있는 커피를 사 마시기 위하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하여 일을 한다. 모르는 것을 배우기 위하여, 낯선 세계를 탐험하기 위하여, 작은 성공과 작은 실패를 거듭하기 위하여,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하여 일을 한다. 남들에게는 대수롭지 않겠지만 나에게는 그저 놀라울 뿐인 이 기적을 이루기 위하여, 나는 오늘도 일을 한다.
글 한수희
일러스트 점선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