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쉼표

색깔을 더한 네 곳

색깔을 더한 네 곳

아주 특별한 쉼표

한 공간에 머무는 동안 그곳의 색깔이 잔향처럼 나를 따라올 때가 있다. 그곳이 어땠냐고 묻는 이들에게 색깔로 대답하고 싶은 네 곳을 소개한다.

나른한 오후의 베이지색
르브리에

A.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75-8
T. 010 9702 2115
O. 11:00~21:00, 월요일 휴무

어쩌다 주어진 오후를 생각한다. 텅 빈 시간만큼 길어진 하루를 채우는 것은 나의 숙제가 되었다. 알람 없이 햇볕만으로 눈을 뜬 늦은 오전을 위한 근사한 의식을 치러보는 건 어떨까. 삼청동에 위치한 ‘르브리에’는 따뜻하게 구워진 브리오슈 브런치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계절마다 변하는 나무들이 모인 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골목 안 하얀 건물이 사람들을 반긴다. 꽃으로 장식된 자전거가 보인다면 잘 찾아온 거다. 안으로 들어가면 흰 벽과 따뜻한 나무 테이블이 다정하고 안온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이곳의 브런치 비결은 빵에 있다. 동글동글 귀여운 나이테를 가진 브리오슈의 종류별로 추천하는 브런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수크레Sucré’는 달콤한 달걀 물로 만든 프렌치토스트로 아이스크림이나 생크림과 함께 먹기 좋고, ‘살레Salé’는 파마산 치즈를 넣은 달걀 물로 만든 프렌치토스트다. 햄이나 베이컨, 소시지 등이 곁들어져 든든한 식사로 먹기 좋다. ‘빛나다’는 르브리에의 의미처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해사하게 웃는다. 나른한 오후를 채우는, 브리오슈의 맛있는 색깔, 베이지색의 평온이 느껴진다.

식물의 푸름을 담은
슬로우 파마씨

A. 서울시 마포구 와우산로 15 1층
T. 02 336 9967
O. 11:00~20:00, 일요일 휴무

‘슬로우 파마씨Slow Pharmacy’는 식물의 느린 속도를 그대로 담은 식물 가게다. 책 구절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떤 문장이 나의 지침이 되듯, 이곳의 식물은 어느 날 만난 사람들을 치유하고 달래는 치료제가 된다. 그러니 이곳이 비밀스러운 조제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익숙한 식물부터 난생 처음 보는 식물까지 다양한 자태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나도 모르게 말을 건네게 된다. 

생각해보면 자연은 그대로의 시간을 흘려보내는 연습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 그 자체로 모든 것을 품고 세상을 견지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슬로우 파마씨의 시간은 바깥 세계의 시간보다 조금 더 느리게, 천천히, 그 자체로 흐르고 있는 것만 같다. 해의 순환을 받아들이며 식물을 이해하는 공간이 인간을 치유하지 못할 리가 없다. 언젠가 짧은 수필을 한 편 읽은 적이 있다. 두통이 심해서 약국을 찾았는데 그때 약사가 시원한 보리차 한 잔을 내어 주더라, 그 차 한 잔을 받아 창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두통을 잊게 되었더라는, 아주 평온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약이 아닌 것들로 계속해서 재생하고 덧대는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슬로우 파마씨의, 초록이 그렇다.

따뜻함을 말하는 갈색빛
올레무스

A.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로5길 58
H. instagram.com/olemus.kr
O. 13:00~20:00, 월~화 휴무(시간 변경 공지 확인)

찬 기운이 조금씩 올라오면서 겨울이 한층 선명해졌다. 그럴 땐 데워진 찻잔을 두 손 가득 들고 몸속 끝까지 따뜻하게 하고 싶어진다. 연희동에 위치한 ‘올레무스Olemus’는 오로지 차만 판매하는 곳이다. 초겨울 특유의 직선 모양을 띤 햇볕을 쬐면서 찬찬히 산책을 하다 들르기 좋다. 올레무스가 점심 이후에 문을 여는 만큼 여유 넘치는 오후를 맡기기에 안성맞춤이니, 좋아하는 책 한 권을 들고 찾는 것도 근사하겠다. 차를 마시는 시간은 온 거짓을 말끔하게 씻어내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 자신에게 건네던 크고 작은 거짓말을 떠올리면서 따뜻하고 맑은 한 모금으로 모든 것을 내보낸다. 올레무스를 찾는 이들은 모두 목소리를 죽이고 서로의 거리를 존중한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각자의 시간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보내는 것이다. 찻잎을 우리는 동안,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풍경을 느리게 바라보는 건 어떨까. 다홍색과 옅은 녹색, 갈색빛 등 다양한 찻잎의 색깔이 우리를 위로한다.

그때의 그 색깔
페넥

A. 서울시 성동구 연무장3길 8
T. 070 8897 2969
O. 11:00~19:30(Break time 12:00~13:00), 연중무휴

가죽으로 다양한 아이템을 만드는 ‘페넥Fennec’은 색의 경계를 감지하고 결의 차이를 표현하는 브랜드다. 다채로운 디자인의 가방과 지갑으로 저마다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한눈에 사로잡았다. 성수동에는 페넥의 컬러 스튜디오가 있다. 분기별로 하나의 컬러를 선정하여 스튜디오를 꾸려 나가는데, 취재 당시에는 지난여름의 열기를 시원하게 식혀줄 초록색이 경쾌하게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매 계절과 트렌드, 대중의 취향과 관심사 등을 분석하면서 대표적인 컬러로 오감을 자극하는 공간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페넥의 컬러 스튜디오는 누군가에게는 살구색이었다가, 또 누군가에게는 초록색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노란색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컬러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면 페넥의 제품들은 물론 조금은 엉뚱하고 재치 있는 아이템들을 눈여겨볼 수 있다. 선정된 컬러를 통해 영감을 주는 아이템들이 하나의 전시처럼 매대에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곳으로 호기심 가득한 표정들이 모여든다. 그때의 그 색깔을 기억하는 일이 좀처럼 많지 않은 시절을 위한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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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자연

포토그래퍼 박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