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Book 《산다는 건 잘 먹는 것》, 《사생활의 천재들》
Secret
of
private life
《산다는 건 잘 먹는 것》
《사생활의 천재들》
아주 특별한 사생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 훔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부유하고 매력적인 사람들의 이면에 펼쳐진 사막처럼 황량하고 황폐한 사생활에 놀랄 때가 있다. 아무리 잘나가는 사람인들 마음을 털어놓을 벗 하나 없이 밤마다 벽만 쳐다보며 우울해 해야 한다면, 몰아치는 일정에 쫓겨 숨 돌릴 틈도 곁을 줄 여유도 없이 살아가야 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물론 그런 이들이 있어 세상은 좀 더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다. 우리가 매일 짊어지고 나가야 할 것은 결국 거창한 신조나 원대한 포부가 아니라 평범한 사생활일 테니 말이다.
음식이나 먹는 일에 관해 쓴 책을 읽고 만족해본 적이 거의 없다. 나도 먹는 걸 남부럽지 않게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먹는 게 먹는 거지 뭐. 뭘 그렇게 호들갑이신지. 별것도 아닌 일을 대단한 것처럼 떠받들고 포장하는 게 영 불편하기만 했다. 그런데 에세이스트 히라마츠 요코의 먹고 사는 글을 모은 《산다는 건 잘 먹는 것》이라는 책은 좀 달랐다. 이 책은 읽으면 일단 기분이 좋아진다. 문체는 단정하고 시선은 다정하다. 얼핏 심심하지만 담백하고, 깊이가 있으면서도 부담스럽지 않다. 두부를 넣고 맑게 끓인 국, 유토후처럼.
금방 산 두부를 봉지에 넣고 손잡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달랑달랑 흔들며 집으로 간다. 손가락이 저녁놀의 찬바람에 놀림을 당해 찌릿찌릿 차갑다. 차가움을 떨쳐버리겠다는 듯 두부의 무게로 더 힘차게 봉지를 흔들흔들. 오늘 저녁밥은 유토후(일본식 두부 냄비 요리)다. 하지만 평상시와는 약간 다르다. 살짝 익힌 두부를 젓가락으로 조금씩 뭉개서 소금을 뿌린다. 간장에 담근다. 시치미를 뿌려 본다. 오늘 밤은 가족들이 모두 늦게 돌아오니까 혼자서 두부 한 모와 놀아볼 생각이다.
– 히라마츠 요코, 《산다는 건 잘 먹는 것》 중에서
가벼운 내용에서 느껴지는 적당한 무게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생각하다 보니 우리 엄마의 미역국과 시어머니의 미역국이 떠올랐다. 엄마가 끓여주신 미역국은 기름지고 비릿하기만 했다. 심지어 고기 비슷한 비곗덩어리는 몇 개 건지기도 힘들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시어머니가 끓여주신 미역국을 먹었는데 지금껏 사기당하고 산 기분이었다.(엄마, 미안해.)시어머니의 미역국은 진하고 구수하고 깊고 담백했다. 이런 미역국이라면 매일 밥 말아 먹고 살아도 밥투정 같은 건 안 할 것 같았다.
조리법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다. 큼직한 소고기 양지나 사태 한 덩어리와 다시마를 넣고 끓인 국물에 불린 미역을 넣고 푹 익힌다. 간은 천일염으로 한다. 똑같은 조리법으로 따라 해봐도 희한하게 내가 끓인 미역국에서는 시어머니의 것처럼 깊고 담백한 맛이 나질 않는다. 어쩌면 그 맛의 차이는 요리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엄마도, 나도 요리란 최저 비용, 최저 재료 투입으로 그럴듯한 맛과 모양을 내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다르다. 최고 비용, 최고 재료 투입이어야만 정직한 제맛이 난다고 생각하신다. 그런 면에서 시어머니는 가차 없는 분이다.
이렇듯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번지르르한 말이 아니라 사생활의 조각들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신념, 포부, 강점, 약점, 개성, 스타일 같은 것들은 유토후에도, 미역국에도, 히라마츠 요코의 담백한 글에도 배어 있다. 그러고 보니 정혜윤의 책 《사생활의 천재들》에서 비슷한 구절을 발견했던 기억이 난다.
저에겐 삶의 디테일이 중요합니다. 왜 디테일이냐고요? 그건 간단합니다. 우리는 결국 디테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정책 결정권자도 아니고, 우리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건 자기 삶의 디테일뿐입니다.
– 정혜윤, 《사생활의 천재들》 중에서
삶의 디테일에 신경을 쓰고 그것을 가꾸기 시작하면 사는 게 즐거워진다. 사실 사는 건 멀리서 보면 별 게 아니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은 내가 진흙탕 속에서 버둥거리고 있을 때는 야속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결코 괜히 나온 말은 아닌 것이다. 잔뜩 인상을 쓴 채로 누군가의 험담을 하는 부유한 아주머니보다는,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적은 비용으로 생활을 꾸려 나가면서도 골목에 한 뼘 땅이라도 있으면 꽃을 키우는 동네 할머니의 생활이 훨씬 즐거운 건지도 모르는 거니까 말이다.
일상생활은 정말 별거 아니라서 손가락 사이를 삭삭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다. ‘잘 먹는다’는 것은 흘러가는 날들에 쐐기를 박는 일일지도 모른다.
– 히라마츠 요코, 《산다는 건 잘 먹는 것》 중에서
히라마츠 요코는 먹는다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또 반대로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어차피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기왕 살 거라면 제대로 살고 싶으니까. 좋은 음식을 먹고, 음식을 먹는다는 일을 한껏 즐기고, 그 일에 자신만 아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러니까 흘러가는 날들에 쐐기를 박으면 말이다.
그래서 《산다는 건 잘 먹는 것》이라는 책을 읽으면 히라마츠 요코의 생활법을 반드시 따라 해보고 싶어진다. 대충 차려서 배를 채우는 것이 목표였던 매일 매일의 식생활도 히라마츠 요코의 눈으로 보면 특별하고 소중한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간장을 뿌리는 일 하나도. 레몬을 넣고 젓가락을 놓는 일 하나도.
우리에게는 인생의 가이드가 필요하다. 인생은 예측 불가능하고 복잡하고 어렵고 낯선 여정이라서, 가이드가 있다면 그 길을 걷는 것이 훨씬 견딜 만해지기 때문이다. 평범한 영화도 <출발 비디오 여행>의 김경식의 해설이라면 갑자기 특별해지는 것과 같다.
내가 즐겨 듣는 음악 취향이 갑자기 확 세련되어진 것은 20대 중반쯤 잠깐 만났던 남자애 덕분이었다. 일하는 자세에 대해 보여주고 알지 못했던 작가들을 알게 해주고 어떻게 나이가 들어야 할지 보여준 사람은 내가 마지막으로 다닌 직장의 상사였다. 빌 브라이슨의 책들 덕분에 일상의 짜증스러운 상황들을 유머러스하게 바라보는 법을 배웠고, 제이미 올리버나 이이지마 나미는 소박하고 소탈하면서도 멋스러운 요리법을 알려주었다.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하는 걸 몸소 보여주는 평범하고도 용감한 내 주변의 이웃들 덕분에 사는 일이 좀 더 가볍게 느껴졌다. 그들 모두가 나의 가이드들이었다.
사생활이란 카프카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인생, 일상들을 말한다. 이들은 그런 사생활에서 천재다. 사생활을 보여주는 데서 천재들이 아니라 사생활을 살아내는 데서 천재들이다. 그들은 진부하고 시시하지 않게 살려고 애쓰는 데서 천재다. 그들은 자기 삶에 던져진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자기 삶의 문제를 직면하는 데, 그것을 푸는 데, 그것에서 보편성을 보는 데 천재적이다. 즉 그들은 삶의 태도에서 천재다.
– 정혜윤, 《사생활의 천재들》중에서
야생 호랑이를 쫓아 한 평짜리 지하 비트에서 소금 뿌린 주먹밥과 얼어붙은 사과를 먹으면서 5,000시간이 넘는 시간을 보낸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 박수용. 무거웠던 삶을 덜어내기 위해 많은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고 고백하는 영화감독 변영주. 콤플렉스와 오랜 무명의 시간을 잘해보겠다는 마음, 존재감을 느끼고 싶다는 마음으로 간신히 뚫고 나온 만화가 윤태호. 전문가가 되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긴팔원숭이를 쫓아 인도네시아의 정글 속을 한없이 달리던 야생 영장류학자 김산하.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구조가 잘못되어 아픈 것이라 지적하는 청년유니온의 전 정책기획팀장 조성주. 경험이 전수의 문제라면 체험은 소비의 문제라 설파하는 사회학자 엄기호. 불안을 극복하려면 돈 없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는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홍기빈. 그저 별이 좋아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별을 보는 사람이 된 횡성 천문인 마을의 천문대장 정병호. 이들이 바로 정혜윤이 《사생활의 천재들》에서 만난 진짜 천재들이다. 우리의 인생에 가이드가 되어주기에 충분한 천재들.
그는 아직도 별은 취미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에게 취미란 게 대체 뭐냐고 다시 물어봤지요. 그는 내가 했을 때 즐거운 것, 그걸로 굳이 뭘 이루려고 하지 않는 것, 그 세계에 들어가 끝없이 헤집고 다니고 싶게 하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대답은 특별해서 놀라운 게 아니라 그가 대답대로 살고 있어서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 정혜윤, 《사생활의 천재들》 중에서
얼마 전에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의 유고 작품집인 《안자이 미즈마루》라는 책의 표지에서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 이라는 부제를 발견하고는 피식 웃었다. 너무나 정확한 표현이라서다. 마음을 다하면서도 대충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마음을 다하면서도 대충 글을 쓸 수 있다면, 마음을 다하면서도 대충 요리를 할 수 있다면, 마음을 다하면서도 대충 옷을 입을 수 있다면, 마음을 다하면서도 대충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럴 수 있기를 언제나 바라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혜윤의 책에 등장하는 평범하고도 특별한 사람들 역시 그렇게 살아왔으리라. 마음을 다하면서도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으리라. 마음을 다하면서도 어깨에 힘을 주지 않았으리라. 마음을 다했기에 그것으로 충분했으리라. 마음을 다했기에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그들은 더 큰 성공보다 더 좋은 삶을 추구할 수 있었으리라.
훗날 다큐멘터리 피디가 되어서 숲을 헤맬 때 나는 죽은 사슴의 뼈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사슴 뼈를 보면서 숲과 사슴의 역사를 가슴으로 느꼈습니다. 살아생전 지녔을 사슴의 감성과 살아있을 동안의 투쟁과 생애 마지막 순간의 고뇌를 느꼈습니다. 그 뼈를 보면서, 숲 속에 자신의 역사를 외로운 유적처럼 뼈로 남겨놓은 한 생명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룬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인생 전체가 중요하다는 것, 매일매일 불행하다가 어느 한 순간 찬란하게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 나는 뼈 한 조각을 보면서 보람이란 것을 어떤 핵심적인 것, 본질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정혜윤, 《사생활의 천재들》 중에서
겨울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는 것은?
철 주전자를 가스레인지에 올려 지난밤에 끓여 놓은 물을 다시 한 번 끓인다. 그리고 냉장고 위로 두 손을 뻗어서 영차 하고 중국식 냄비를 내린다. 위에 올려놓았던 나무 찜통도 같이 내린다. 그리고 냄비에 물을 가득 담고 센 불로 끓인다.가스레인지 위에 나란히 올라앉은 철 주전자와 나무 찜통에서 사이좋게 하얀 수증기가 솟아오른다. 우리 집 겨울 아침의 풍경이다.
– 히라마츠 요코, 《산다는 건 잘 먹는 것》 중에서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 박수용이 사슴 뼈를 보며 생각한 것과 히라마츠 요코가 겨울 아침의 풍경을 묘사한 것은 묘하게 겹친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룬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인생 전체가 중요하다는 것, 매일매일 불행하다가 어느 한순간 찬란하게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 ‘보람이란 것을 어떤 핵심적인 것, 본질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나는 이 말들을 셔츠 가슴 쪽 주머니에 넣어 고이 간직해 두기로 했다.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을 싫어하는데, 히라마츠 요코의 글을 읽고 나니 어서 빨리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아무도 깨지 않은 고요하고 어둑한 아침에 손을 호호 불면서 주방으로 나가 철 주전자를 가스레인지에 올려 물을 끓이고 싶다. 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만히 서 있고 싶다. 해가 떠서 차갑게 식은 공기를 데워주기를 기다리면서, 부석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족들이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면서, 다시 또 하루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그러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카프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인생,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야. 우린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사랑을 나누고 슬픔을 달래고 용기를 내고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하고 갈등을 풀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할 줄 알아야 하고 어느 선에선가 타협을 하고 돈을 벌고 일을 하러 가야 하고 가족들을 먹여야 해.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거지. 단 희망을 이 사이에 깨문 현실주의자.
– 정혜윤, 《사생활의 천재들》 중에서
산다는 건 잘 먹는 것
히라마츠 요코 지음 | 글담 | 330쪽 | 148x210mm
먹는다는 것은 허기를 채우는 행위다. 생각해보면 필요에 의한 단순한 일일 수도 있지만 시간을 들여 음식을 준비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음식을 맛보는 일은 밋밋한 일상의 여백을 채우기도 한다. 음식은 물론 식기와 조리도구에 대한 이야기까지 정갈하게 담겨있다.
사생활의 천재들
정혜윤 지음 | 봄아필 | 337쪽 | 140x210mm
피디 정혜윤이 사생활을 가꾸는 친구들과의 대화를 저자의 생각과 함께 실었다. 책을 읽다 보면 광활한 우주에서 미미한 기분을 느끼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혼자 있는 시간이나 퇴근 후의 저녁을 소중히 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에디터 이현아
글 한수희 사진 안선근, 이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