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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ing
a Journey
into Isolation
<인투 더 와일드> <와일드>
아주 와일드한 고독
‘사람은 고독할 수 있지만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미국의 아들, 그리고 미국의 딸이 야생의 품으로 떠난다. 고독해지기 위해서. 그들은 고독을 통해 고립되려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으로 다시 나오려는 것일까.
아빠는 캠핑광이었다. 그 시절 캠핑은 지금의 캠핑과는 비할 수 없었다. 자가용 붐이 불기 전이라 배낭 가득 텐트, 버너, 코펠, 옷, 튜브, 낚싯대 같은 것을 잔뜩 짊어진 채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고 큰 배를 타고 또 통통배를 갈아탔다. 이름 없는 섬이니 계곡이니 해변이니 하는 곳에 도착하면, 볼품 없는 텐트를 치고 불을 피운 후 쪼그린 채 둘러앉아 밥을 해먹는 그런 캠핑. 어릴 적에 아빠와 그런 캠핑을 다니곤 했다.
침낭, 매트는 언감생심이던 시절이라 자갈밭 위에 그대로 텐트를 치고 얇은 돗자리 하나만 깔고 잔 적도 있었다. 그게 어떤 느낌이냐 하면, 찜질방의 보석방이나 소금방에 깔린 작은 돌들 위에서 8시간쯤 누워 있는 거라고 상상하면 된다. 한번은 한밤중에 어떤 섬에 도착해 대충 평평한 땅에 텐트를 치고는 잠을 잤는데 아침에 깨어보니 바로 뒤가 누군가의 무덤이었다. 그러니까 그 시절에 캠핑을 간다고 하면 엄마는 아예 자리를 깔고 등을 돌린 채 드러누워 끙끙 소리를 냈고 동네 사람들은 살아서 돌아오라며 마을 어귀까지 나와 손을 흔들며 석별의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모험의 세계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맹세했으며 아빠만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캠핑 장소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나면 아빠는 일단 판판한 돌을 하나 주워왔다. 그리고 작은 버너에 깨끗이 씻은 돌을 올려 뜨겁게 달궈서는 고기를 구웠다. 구운 고기를 연신 우리 접시에 올려주면서 자신은 밖에서 맛있는 걸 많이 먹는 사람이니 우리가 다 먹고 나서 남은 고기를 먹겠다고 말하곤 했다. 아빠가 혼자서만 맛있는 걸 먹고 다닌다는 데 분노한 우리는 고기가 채 익기도 전에 입속으로 쓸어 넣었다. 싸구려 돼지 불고기를 먹고 적당히 배가 찬 우리가 놀 것을 찾아가버리면 그제야 아빠는 비싼 삼겹살을 꺼내어 굽곤 했다.
캠핑장에서 아빠는 놀랍도록 유능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젓가락을 챙기는 걸 깜박했던 날, 아빠는 즉석에서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잘라 맥가이버 칼로 쓱쓱 다듬어 젓가락을 만들어 주었다. 낚시로 잡은 물고기로 끝내주는 매운탕을 끓여 주었고 자맥질을 해서 해삼이니 멍게 따위를 잡아 주기도 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통해 알았다. 아빠가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다는 것을. 그건 월급이 자동으로 이체되고 한밤중에 술에 취한 채 돌아와서 가장의 권위를 요구하는 낯선 남자를 보는 것과는 달랐다. 아빠의 사랑은 그런 식으로 아이들의 어깨에 눈처럼 내려 살갗을 적시고 피와 뼈에 스며든다. 그런데 영화 <인투 더 와일드Into the Wild>와 <와일드Wild>에서 자연을 향해 떠나는 주인공 남녀는 그저 가족과 함께 룰루랄라 캠핑을 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각기 다르지만 비슷한 강도의 결핍과 트라우마가 있다.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대자연의 품에 뛰어드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런 그들이 뛰어드는 자연은 네이처Nature가 아니다. 그들이 뛰어드는 것은 ‘1박 2일’의 야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짜 야생, 와일드Wild다. <인투 더 와일드>의 주인공 크리스는 하버드에 갈 수 있을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 갑자기 가족, 집, 차까지 모든 걸 버리고 배낭 하나 둘러멘 채 자연 속을 떠돌기 시작한다. 길 위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렉산더 슈퍼트램프(방랑자 알렉산더)’라고 지은 그가 내뱉는 말들을 20대에 들었더라면 내 가슴을 후려쳤을지도 모르겠다.
“소로우의 말을 인용해볼게요. 사랑보다 돈, 신념, 명성, 공평함 보다는 진실이 필요하다.”
“인생의 즐거움이 관계에서 온다는 건 틀린 생각이에요.”
“완전무결한 자유.”
이 말들에 감화받아 배낭을 둘러메고 자연을 향해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대학 4학년 때 지도교수와의 진로 상담 때 장래희망을 ‘유라시아 일주’라고 밝혔던 사람이다. 그런데 30대의 닳고 닳은 여자가 되고만 지금의 내 귀에는 크리스의 대사들이 낯간지럽기만 하다. 왜 그럴까? 내가 너무 늙어서 그런 걸까? 나도 꼴사납게 늙은 누군가처럼 ‘내가 다 해봐서 아는데….’ 타입의 꼰대가 된 걸까? 그런 걸지도 모른다.
20대 초반쯤에 나는 이 세상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과 함께 강원도로 놀러 가는 차 뒤에서 내내 오쇼 라즈니쉬의 책을 읽었다. <이지 라이더Easy Rider>를 보고 감동을 하였고 방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도어스의 ‘라디어스 온 더 스톰Riders on the Storm’을 들었다. 머리도 감지 않고 구멍 난 추리닝 차림으로 사람들을 비웃었다. 닭고기를 먹고도 만족할 수 있는데 소고기를 먹기 위해 자신을 착취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단언, 언제나 단언이 문제다. 단언하는 이유는 대개 자신이 없어서다.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단언하는 것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버리려고 한다. “인생의 즐거움이 관계에서 온다는 건 틀린 생각이에요.”라고 자신 있게 단언하는 알렉스, 아니 크리스처럼.
그래서 나도 ‘너희처럼 살지 않겠다.’는 기세로 인도로 떠나 대안을 찾아보려고 했다. 히피들이 사는 마을에도 가봤다. 그런데… 문제는 소고기에 있었다. 힌두교도들 때문에 소고기를 먹지 않고 회교도들 때문에 돼지고기도 잘 먹지 않는 인도에서는 닭고기가 어떤 종교의 율법에도 걸리지 않는, 그나마 안전한 고기였다. 맥도날드에서는 치킨버거만 팔았고 피자헛에서 파는 피자 토핑도 다 닭고기였다. 인도에 두 달쯤 있다가 오니 닭고기가 꼴도 보기 싫어졌다. 소고기는 역시 맛있었다. 여유가 되면 한 달에 한 번쯤은 소고기를 먹을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그렇게 간사한 인간이었다.
그런 나와 다르게 크리스는 자연 속에 홀로 있으므로 인해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끝까지 믿는다. 그는 그토록 그리던 알래스카에는 도착하지도 못하고 버려진 버스 안에 고립된 채로 굶어 죽고 만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보았던 것은 등 돌렸던 세상과 화해하는 자신의 모습이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행복은 나눌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왜 그것을 진즉에 알지 못했던 걸까. 사람은 언제나 모순 속에서 살아가며 그 모순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견딜 만한 것이 된다. 모순 없는 완벽하고 깨끗한 삶을 추구하려다 보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그래서 나는 크리스의 방황을 이해하면서도 지지할 수는 없다. 그가 버스에서 살아서 세상으로 나왔다면, 방황을 끝낼 기회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크리스의 짧은 인생이 무의미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크리스는 세상에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고 원칙을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남들의 자리에 들어가 타인의 원칙대로 살기를 택한다. 그게 훨씬 쉽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신발을 신으려다가 자신에게 이상한 질문을 던지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건 대체 누구의 인생이지?’
크리스와는 반대로 <와일드>의 셰릴이 떠나는 목적은 분명하다. 돌아오기 위해서다. 다시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어서. 자연을 찬양하고 사람들의 위선을 경멸하면서도 모범생으로 살아왔고 10대 소녀와는 섹스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등 체제 순응적이었던 크리스에 비해, 셰릴은 평생 희생했던 엄마가 죽자 그 공허함을 이기지 못해 체제에 반항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막 사는 것이다
엄마를 잃은 슬픔을 마약과 무분별한 섹스로 잊으려던 셰릴은 끝까지 그녀를 지키려던 남편과 헤어진다. 그리고 그녀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이라는 죽음의 코스를 종주하기로 결심한다.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미국 서부를 종단하는 극한의 도보여행. 무려 3개월 동안 셰릴은 트레일 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는다. 매일 맛없는 죽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37도가 넘는 사막의 땡볕을 가로지르고, 숲 속에서는 의심스러운 사냥꾼들을 피해 달아나고, 눈 덮인 산을 가로지르고, 절벽을 기어오르다 발톱이 빠지고 등산화마저 떨어뜨려 샌들을 신고 절뚝거리며 걷는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소리를 지르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엄마의 죽음 이후 셰릴이 자해를 해야 했던 이유는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결국 크리스와 셰릴이 자연으로 떠난 이유도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굳이 따뜻하고 편한 집을 뒤로 한 채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캠핑을 떠나는 이유도 같다. 그곳에서는 대부분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해내야만 한다. 어쩌면 우리는 패배하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몸에 와 닿는 패배의 감각이 필요하다
자연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그 안에서는 몸을 뉘일 한 평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조차 힘들다는 사실. 누군가가 지어주고 만들어준 것을 돈을 지급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 힘으로 지어 올리고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겸손해지고 또 편안해진다. 매 순간 우리를 둘러싼 것들과 싸워서 이겨야만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자신이 태어난 곳, 낳아준 사람, 키워준 사람, 발 딛고 살아가고 있는 곳과 화해하지 못하면 영원히 뿌리 없는 부초처럼 불안정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 생각엔 그렇다. 확고한 뿌리가 있으면 그럭저럭 잘해낼 수 있다. 자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둘러싼 모든 것들, 그러니까 태양과 바람과 비와 바다와 산과 땅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뿌리가 생긴다. 그 뿌리가 우리를 휘청거리지 않게 도와준다. 날아가 버리지 않게 한다. 이렇게 사람 구실 하면서 살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낳아주고 길러준 사람들의 사랑이 몸 안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인 것처럼. 크리스와 셰릴에게도 그런 뿌리가 필요했던 것이리라.
바다를 접한 소도시에서 나고 자라, 산과 들과 바다와 계곡을 제집처럼 뛰어다녔고 지금도 흙냄새와 나무냄새를 맡아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나지만, 이 두 편의 와일드한 영화는 솔직히 별로 거칠지 않았다.
자연 속에서의 삶만큼이나 매달 집세를 내고 식료품을 사고 아이들을 키우고 가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떠받쳐야 하는 삶도 와일드하다. 상처를 받고 의미 없고 뭣 같아서 도시를 등지는 삶보다는, 상처받고서도 의미 없고 뭣 같은 삶을 꿋꿋이 감내하는 사람들이 내게는 더 용기 있고 멋져 보인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야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크리스의 삶은 안타깝고, 9년 후 재혼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며 ‘아무렇게나 보낸 시간은 얼마나 와일드했던가’라는 셰릴의 고백은 희망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투 더 와일드 Into the Wild
숀 펜 감독 | 모험 | 미국 | 148분
모범생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전 재산인 2만4천 불을 모두 국제 빈민구호단체에 기부하고, 여행을 떠난다. 그는 자신을 방랑자라 칭하며 산과 계곡, 바다를 모험한다. 최종 목적지는 알래스카지만 그곳으로 가는 여정은 녹록지 않다. 그는 알래스카에 도착할 수 있을까.
와일드 Wild
장 마크 발레 감독 | 드라마 | 미국 | 119분
주인공 셰릴은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엄마와 함께 행복한 인생을 맞이하려는 찰나, 갑자기 엄마가 세상을 떠난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셰릴은 자신의 삶을 파괴해가고, 어느 날 갑자기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극한의 길을 걷기로 한다. 엄마의 자랑이었던 딸로 돌아가기 위해.
에디터 박선아
글 한수희 일러스트 윤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