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필름 뮤지엄

서머타임이 끝나기 전에 유럽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다 어느덧 9월이 되었다. 적당한 가격의 파리행 비행기 티켓을 발견했고 대뜸 다음날 떠나는 일정으로 발권해버렸다. ‘파리에는 다녀와봤으니 근처 새로운 도시에 가보고 싶은데’ 하고 고민할 때 암스테르담이 눈에 들어왔다.

‘네덜란드의 수도’라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 채 파리 샤를 드 골 공항에서 암스테르담행 버스를 예약했다. 그렇게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길, ‘암스테르담 시네마(Amsterdam Cinema)’를 검색하고 체크했다. 다시 한번 시작하는 이 여정에서 또 얼마나 놀라운 극장과 영화를 만나게 될까를 상상하니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시차 때문인지 일찍 눈을 떴고, 체크해둔 극장 중 오전부터 여는 곳에 가보기로 했다. ‘아이 필름 뮤지엄’은 ‘박물관’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위엄에, 서울의 영상자료원이나 부산의 영화의전당 같은 곳이 아닐까 막연하게 생각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곳은 앞서 언급한 기관들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데다 ‘아이(Eye)’, ‘필름(Film)’, ‘뮤지엄(Museum)’이라는 단어에 아주 충실한 공간이다. 암스테르담 북부의 항구에 위치해 페리를 타면 중앙역에서도 한 번에 도착할 수 있다.

바다를 끼고 있는 극장은 ‘눈’ 모양의 형태로 지어졌고 건물과 같은 모양의 심볼이 깃발이나 표지판, 티켓 등에도 새겨져 있다. 화이트를 중심으로 블랙과 우드 톤의 포인트가 섞인 공간은 깔끔하고 모던한 느낌이 강했다. 건물 안에는 통유리 너머로 바다가 한눈에 담기는 레스토랑 겸 카페가 있는데, 점심시간이 채 되지 않은 평일 오전이었는데도 이미 만석이었다. 레스토랑은 날이 맑으면 맑은 만큼의 기쁨을, 흐리면 흐린 대로의 운치를 느끼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영화에 큰 관심이 없어도 식사나 관광을 목적으로 이곳을 찾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아이 필름 뮤지엄에서는 개봉작뿐 아니라 다양한 독립예술 ‘영화’를 상영한다. 인상적인 부분은 작품 당 2회 이하의 상영을 고수하면서도, 오전부터 늦은 저녁까지 거의 스무 편에 가까운 영화로 꽉 채워진 시간표를 만들어낸다는 것. 네 개의 상영관을 가진 그렇게 크지 않은 극장임을 고려할 때, 프로그램의 다양성에 얼마나 공들이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내가 방문한 날은 클로드 샤브롤의 <의식>(1955년)과 같은 고전을 시작으로 도밍가 소토마요르 카스티요의 <죽기에는 어려>(2018년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완마 차이단의 <진파>(2018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상-각본상 수상작) 등 세계 유수영화제에서 호평을 얻은 작품들,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알레한드로 란데스의 <모노스> 등 당시에 네덜란드에서 개봉해 상영하고 있는 영화들이 적절하게 섞여 조화를 이뤘다. 화장실 앞에는 칸마다 다른 영화인의 사진이 붙은 물품 보관함도 있었는데, 이런 디테일까지 신경 쓰는 모습에 조금(많이) 놀랐다. 익숙한 얼굴과 낯선 얼굴을 둘러보며 소지품을 넣어둘 ‘영화함’을 찾는 건 영화 애호가들에게 색다른 즐거움 아니겠는가.


어렸을 때 TV에서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은 클로드 샤브롤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의식>을 이 근사한 공간에서 볼 수 있다니. 클로드 샤브롤은 프랑스의 누벨바그(‘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으로 1950년대 후반에 시작된 프랑스의 영화 운동을 말한다)의 초석을 닦은 감독 중 한 명이다. 2010년 타계하기 전까지 70여 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비교적 후반기 작품에 속하는 <의식>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기억된다. 영화는 부르주아 가족의 가정부로 고용된 상드린 보네르와 그를 돕던 우체국 직원 이자벨 위페르의 관계를 중심으로 당대 상류층의 위선과 모순을 그린다. 두 배우는 이 영화로 나란히 1995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두 사람의 연대가 절정에 이른 후반부, 모종의 계획을 실현하고, 진실이 드러나게 되는 마지막 시퀀스 전반이 압권이다. 직접적으로 계급을 나누지만, 의도적으로 선과 악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두며 서스펜스를 쌓아가는 영화의 구조를 목도하는 기쁨 역시 크다. 그리 많지 않은 관객이었지만, 모두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영화에 집중했던 밀도 높은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극장은 ‘박물관’의 역할 역시 다하고 있다. 아이 필름 뮤지엄은 영화의 포스터에서부터 프로젝션 장비에 이르는 다양한 물건을 확보하고 보존한다. 물론 매해 만들어지는 네덜란드의 영화 역시 수집 대상이다. 예컨대 필름 중에서도 189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사용된 네거티브 필름(질산 섬유소 필름)은 매우 민감하며, 가연성이 강하다. 따라서 제한된 환경의 특수 창고에서 보관이 필요하다. 필름을 종류별로 나누고 보존 업무를 전반적으로 진행할 전문 인력은 필수적이며, 적절한 온도와 습도 조절이 가능한 공간의 확보도 중요하다. 이렇듯 다양한 자료를 관리하기 위해 분야별로 전문성을 확보하고 있다. 매표소 건너편의 굿즈샵에는 유독 영화와 관련한 엽서, 사진, 포스터 등이 많았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극장은 또한 영화나 미디어아트와 관련한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고 진행한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러시아의 유명한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전시를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전시 티켓은 11유로이며, 뮤지엄 패스(Museum kaart), 암스테르담 시티카드(I Amsterdam) 소지자와 18세 이하는 무료 관람, 그 외 할인 대상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화 티켓의 가격도 전시와 동일한데, 할인 적용 범위나 금액에 있어 차이가 있으니 꼼꼼히 살펴보자. 아이 필름 뮤지엄을 포함해 네덜란드의 극장과 상점은 카드로만 결제할 수 있는 곳이 대다수니, 영화나 전시가 보고 싶다면 카드를 꼭 챙기도록 하자.

 

 

아이 필름 뮤지엄

 

A. IJpromenade 1, 1031 KT Amsterdam, Netherlands

H. eyefilm.nl

T. +31 20 589 1400

 

We Around Project

내가 사랑한 유럽의 극장

 

씨네21의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 칸국제영화제의 <미치광이 피에로> 포스터에 매료되어 무작정 프랑스로 떠난 것이 유럽 극장 여행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럽의 극장에 찾아가 머무르는 동안 보고 느낀 것을 글로 적어보려 합니다.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글·사진 이나경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