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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선·편지지 — 아티스트
현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집 한 면을 차지한 식탁이 보인다. 희고 둥근 식탁은 범선과 지지라는 두 명의 인간과 왕손이라 불리는 한 명의 비인간동물이 둘러앉기에 적당한 크기이다. 저마다의 고단한 하루를 마친 후 세 식구는 매일 그 식탁에 모인다. 적당히 퍼낸 밥과 자연이 내어준 일용한 양식을 차려 놓고 자리에 앉을 때, 둥근 원은 완벽하게 맞물린다.
찻상을 앞에 두고 마주 앉게 되었네요.
지지 (차를 가리키며) 여행의 잔해예요. 이번 여행에서 퍼포머티브한 다도를 실컷 즐기고 와서 꽂혀버렸어요.
범선 아마 한 달도 안 갈 겁니다(웃음).
본격적인 여행 이야기를 듣기 전에 두 분 소개를 먼저 해볼까요?
범선 저는 글을 쓰고 노래하는 전범선이라고 합니다. ‘양반들’이라는 밴드에 소속되어 있고, ‘동물해방물결’이라는 단체에서 자문위원을 맡고 있어요.
지지 저는 미술 작업을 하며 글을 쓰는 편지지입니다.
지지 씨는 어딜 다녀온 거예요?
지지 발리랑 대만을 둘러보고 왔어요. 발리에선 한 달 정도 있었고, 대만에는 열흘 있다가 왔어요. 대만은 채식하기에도, 차 문화를 즐기기에도 좋아요. 서핑도 할 수 있고요. 저랑 제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관심사를 전부 누릴 수 있는 곳이어서 천국에 다녀온 것만 같았어요. 발리는 예전에 3년 정도 살던 곳이라, 이번에는 그냥 쉬다가 왔고요. 작년 여름쯤, 오랜만에 다시 발리를 가게 된 건데 개발이 너무 빨리 된 것이 실감이 나더라고요. 이번에도 그랬고요. 6개월 전에 들판이던 곳을 다시 가보니 건물들로 꽉 차 있는 거예요. 너무 놀라서 이번에는 마냥 즐기지 못한 것 같아요.
범선 씨도 발리 가보신 적 있어요? 지지 씨 글을 통해 만난 발리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아요.
범선 작년 여름에 지지랑 처음으로 같이 다녀왔어요. 발리는 인도네시아의 섬이잖아요. 인도네시아는 주로 이슬람 국가인데, 발리만 힌두 문화권이라 좀 특별해요. 그러다보니 동양의 영성적인 기운도 느껴지고, 여러모로 낯선 풍경이 펼쳐져서 신기했어요. 소들이 오만 군데를 누비고 있는 거예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어서 다소 충격을 받았어요. 동물해방물결은 온갖 고생을 다 해가며 소 다섯 명 구출해서 보금자리를 만들었는데, 발리에선 그냥 이게 일상적인 모습인 거죠. 아, 저희는 비인간동물만 ‘마리’라고 수식하는 것은 종차별적이라고 생각해서 ‘명’이라고 칭하고 있어요. 발리는 집집마다 사원이 있어요. 그리고 집 문 앞에다가 작은 제사상을 차려 놓거든요. 일종의 제물이나 마찬가지죠. 그걸 개들이 자유롭게 먹기도 하고요. 발리는 개들도 목줄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녀요. 한국에선 동네를 떠돌아다니는 개들은 주인이 없겠거니 하고 잡아서 먹잖아요. 다른 문화권에서 인간과 비인간동물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보는 것이 새로웠어요.
새로운 풍경을 보며 자연스레 영감을 얻는 편인가 봐요.
범선 네. 최근에 양반들이랑 캘리포니아에 한 달 동안 머물며 음반을 만들고 왔는데요.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에 3주 정도 들어가 있었어요. 거긴 사막인데, 사막에서는 하늘이 절대적이에요. 하늘이 땅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죠. 그러니 해님이 그곳을 지배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해요.
태양이요?
범선 한국에는 산이 많잖아요. 그래서 산마다 산신령들이 있다고 믿는데, 사막에는 오직 해님과 달님이 전부예요. 생명체가 없다보니 오로지 해만 보게 되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전 세계에 있는 중요한 유일신 종교들은 다 사막에서 나왔잖아요. 3주 동안 양반들이랑 하늘 보면서 “얘들아 해님 나왔다! 들어가신다! 달님 나온다!” 하면서 노래를 만들었죠. 저희는 자연과 연결되고 노래하는 것이 풍류라고 생각해요. 캘리포니아의 풍류를 제대로 느끼고 왔죠.
태양의 기를 잔뜩 받고 오셨네요. 두 분 모두 비거니즘에 관해 목소리를 내고 계세요. 범선 씨는 지지 씨가 상의 탈의한 채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반대 시위를 하는 걸 보곤 처음 알게 되었죠.
범선 (그림 하나를 가리키며) 저 그림이 그 그림이에요.
지지 친구인 노예주 작가가 시위할 때 찍힌 기사 사진을 보고 그려준 거예요.
범선 저는 그 사진을 본 거죠. 아는 단체랑 동지들이 하는 시위였으니까 우연히 보게 된 건데, 처음 보는 사람이 주동자처럼 서있더라고요. 최전방에 서서 스모크를 들고 있는 걸 보며 새로운 리더를 뽑은 줄 알았어요.
화면 너머로 기운이 느껴진 건가요?
범선 맞아요. ‘화’가 많은 사람이다, 싶었죠. 심지어 스모크까지 들고 있으니 엄청난 불의 기운이 느껴졌어요. 지지 손에 연막탄 불똥이 튀어서 화상을 입기도 했어요.
그때 상의탈의를 하고 가슴에 피를 연상 시키는 물감을 칠했다고 들었어요. 광장에서 상의 탈의를 하는 일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은데요.
지지 유럽권 쪽에 페맨이라는 여성주의 활동 단체가 있어요. 그쪽 친구들은 화관을 쓰고 상의 탈의를 한 뒤 문구를 몸에 적고선 시위를 하거든요. 암스테르담에서 동지들과 함께 참여한 동물권 행진에서 상의 탈의를 하고선 비건 페미니즘을 외쳤어요. 처음 참여하고 엄청난 용기를 얻었죠. 그 뒤로 한국에서도 액션이 이어질 예정이라고 해서 함께 나가게 되었어요.
결연한 마음이었네요. 지지 씨도 동물권 행진에서 북치는 범선 씨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면서요. 서로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 후 범선 씨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을 해서 사석에서 만나게 되었고요. 그 뒤로 계속 함께해 오고 있는데, 인연임을 느낀 것은 언제였나요?
범선 처음 만난 날 밤새도록 수다를 떨고 한 달 만에 같이 살게 되었어요.
지지 이 사람이 좀 많이 구애를 하더라고요. 계속 만나자고(웃음).
범선 처음 만난 한 달 동안 지지가 우리 집에 오거나 제가 잠실에 가거나 하니 왔다갔다 하는 시간이 너무 많이 드는 거예요. 제가 실무 추진력이 빠른 편이라서, 그냥 이럴 바에는 같이 살아야겠다 싶었죠.
지지 저도 마침 집을 구하던 참이라 타이밍이 좋았죠.
각각의 성향이나 성격이 뚜렷한 이들이 한 지붕 아래 모였다 보니 함께 발 맞춰 살아가기 위해 이런저런 과정을 겪었을 듯 한데요. 《비혼이고요 비건입니다》 내용 중 생활 속 자잘한 패턴이 달라 겪게 된 고초들이 적혀있더라고요. 책 나온지 1년이 다 됐는데 요즘은 어떤 것을 맞춰나가고 있나요?
범선 지금은 많이 안정이 되었는데, 첫 1년은 진짜 많이 싸웠어요.
지지 저희는 항상 청소와 강아지 ‘왕손이’ 돌봄 문제가 화두예요. 왕손이가 지금 열네 살인데요, 같이 산 지는 1년 3개월 됐어요. 무지했던 범선이가 예전에 데려와서 방치해 둔 자식이나 다름 없는데 범선이네 어머님께서 오랫동안 돌봐주고 계시다가 다시 데려가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저희랑 같이 지내고 있어요. 애 딸린 남자가 자기 자식 데려와서 제가 키워주고 있는 셈이에요(웃음). 웃긴 건 왕손이는 저희가 조금이라도 언성이 높아지거나 싸우는 기미가 보이면 ‘하지 말라’며 짖어요. 예전에 둘이 살 때는 많이 티격태격했는데, 이젠 화가 나더라도 왕손이의 얼굴을 보면 사르르 녹아요. 범선 저는 화법과 관계에서의 존중을 부탁을 하는 편이죠. 서로의 단점을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우리 안엔 사랑이 존재하니까 서로 이해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저 사람이 평생을 저렇게 살아왔는데, 어쩌겠어요. 그럼에도 조금씩 바꿔나가는 모습이 보여서 그걸 마주할 때 좋아요.
왕손이는 지지 씨와 범선 씨 따라 비건의 길을 걷고있는 비견이기도 해요.
범선 맞아요. 그런데 비건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폐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해요. 왕손이가 스스로 선택한 게 아니라 강요당하고 있는 거기도 하니까요.
지지 그래도 강아지들 중에 야채를 잘 안 먹는 친구들이 있는데, 왕손이는 가리지 않고 잘 먹어서 기특해요. 건강하게 먹으니 확실히 피부병 같은게 좀 줄었죠.
《비혼이고요 비건입니다》는 비건으로서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죠. 지지 씨는 건강상의 이유로 비건을 시작하게 되셨다고요.
지지 예전에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는데요. 당시에 약을 많이 먹다보니 식욕이 떨어져서 밥을 잘 안 먹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 건강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면서 온갖 병을 다 앓았어요. 특히 한포진이 진짜 괴로웠거든요. 병원부터 한의원까지 다 다녀봤는데, 모두 고기를 줄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힘들었지만 절박한 마음으로 고기를 끊어봤는데 눈에 띄게 좋아지더라고요. 단계를 밟으면서 서서히 채식을 하기로 마음먹고선 관련 서적들을 많이 읽었어요. 그때 ‘동물권’이란 개념을 처음 알게 되었죠. 그런 과정을 겪으며 비건으로 거듭났어요.
벼랑 끝에서 나를 살리기 위해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한 거네요. 건강해진 이야기가 책 속에 간증글처럼 나와있는데요. 그 대목을 읽으면서 ‘진짜 이게 된다고?’하면서 놀랐어요.
지지 전 특히 장 건강에 많은 효과를 봤거든요. 채식 이전에는 변비와 장염의 무한 굴레에 갇혀서 살았어요. 정상적인 배변 활동을 한 게 손에 꼽을 정도인데요, 채식을 시작하고선 바로! (엄지를 치켜든다.)
범선 원래 장이 면역력이며 피로랑도 다 연관되어 있잖아요.
좀 솔깃해지는데요. 반면에 범선 씨는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동물 해방》을 읽고 분한 기분을 느끼셨다고 들었어요.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오류를 찾아보려 했지만,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고요.
범선 20대 초·중반엔 철학사 공부하면서 제 나름의 세계관이랑 신념을 찾아 나가는 시기였어요. 그런 마음으로 영국 철학 전통을 공부하고자 피터 싱어의 저서를 탐독했는데, 기분 나쁜 이야기들을 막 하더라고요. 전 그때까지만 해도 아침에도 삼겹살을 먹고, 횡성 한우를 사랑했고, 춘천 닭갈비를 소울 푸드로 섬기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피터 싱어는 “인간의 고통만 고려하고, 비인간동물의 고통을 고려하지 않으면 종차별주의자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거죠. 그게 너무 짜증 나는 거예요. 당시 미국에 살면서 인종 차별을 경험했거든요. 한국에서는 제가 주류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는데, 미국에서 처음 소수자의 기분을 느꼈어요. 그런데다 백인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니 은근히 불쾌했어요.
그럼 이를 받아들이게 된 건 언제쯤이에요?
범선 사실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건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의 저자 멜라니 조이Melanie Joy가 한 강연을 듣고 나서 였어요. ‘육식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인데 제가 심적으로 갈등을 겪고 있던 시기에 학교로 와서 강의를 진행했어요. 저는 한국에선 개도 먹고, 돼지도 먹고, 소도 먹는다라고 이야기하려고 갔죠. 왜냐하면 생전 저희 아버지께서 개고기를 드셨거든요. 그런데 그 강연에서 공장식 축산 영상을 보자마자 바로 할 말이 없어지더라고요. 모든 것이 다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억지로 끊었어요.
비건으로 정착하기까지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었겠어요.
범선 당시에는 통각 신경의 유무를 고려하며 먹었거든요. 그때까지만 해도 갑각류와 조개류가 고통을 느끼는 지에 대해 과학자들이 여러 의견을 내고 있을 즈음이었어요. 저는 생선까진 안 먹고 무척추동물과 치즈, 우유, 달걀은 섭취했어요. 그때만 해도 먹는 낙이 없었어요. 처음에는 금연하듯이 소고기를 끊자마자 돼지고기를 미친듯이 먹고, 돼지고기를 끊고 나선 닭고기를 엄청나게 먹었어요. 동물권 시선으로 보면 조삼모사나 다름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할 것 같았어요. 1년 거쳐서 고기들을 겨우겨우 끊은 후엔 달걀이랑 우유, 치즈를 엄청 많이 먹었거든요. 그땐 건강상의 이득을 별로 못 얻었는데, 비건이 되니 체질이 바뀌더라고요. 몸이 깨끗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비건이신 분들은 어느날 갑자기 거짓말처럼 고기를 끊었을 거 같은 환상이 있긴 해요.
범선 담배 끊는 거랑 똑같아요. 그런데 조금 더 유혹이 많죠. 무엇보다 담배는 주변 사람들이 권하진 않잖아요. 동물성 음식은 모든 인간관계와 결부가 되거든요.
지지 맞아요. 식사 한 번 하기가 힘들죠. 예전에는 친구들 만나도 외식을 못하니까 힘들었어요. 대부분 식탁에서 대화가 이루어지니까요.
범선 미국에선 각자 시켜서 알아서 먹으니까 괜찮았는데, 한국은 다같이 먹는 문화가 있잖아요.
지지 저는 먹는 게 힘들어서 휴학했을 정도였어요.
지금은 비건 식당이 엄청 많아졌어요. 물론 동네마다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요.
범선 저희가 이 동네에 사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에요. 주변에 비건 식당이 많거든요. 저희가 제일 자주 가는 식당이 3분 거리에 있어요. 모든 음식에 두부가 들어가는데 진짜 맛있어요. 채식을 하면 두부, 버섯, 가지로 모든 걸 다 해먹을 수 있거든요.
책 읽다가 버섯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육류를 대체하는 식재료인지 처음 알았거든요.
범선 종류도 엄청 많아요. 맛도 다르고요. 무궁무진한 재료죠.
지지 친구 아버지가 유기농으로 표고 버섯을 키우시는데 그게 진짜 너무 맛있어요.
반면 우유에 관한 진실을 알게 되곤 굉장히 충격이었는데요. 공교롭게도 책을 읽으며 우유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 대목을 읽고 나니 먹기 싫어지더라고요.
범선 한국만 해도 우유를 마신 역사가 130년이 채 안돼요.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우유를 가지고 오기 전까지는 아주 귀해서 왕이 보양식으로나 먹을 수 있을 정도였죠. 물론 한국에도 소가 있었지만, 그들의 젖을 사람이 먹을 생각 조차 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건 송아지 거잖아요. 무엇보다도 동아시아인은 유당을 분해할 수 있는 유전자가 없고, 중동이나 유럽처럼 농사가 잘 안되는 지역에서 5천년 전쯤 분해하는 유전자가 생겨나기 시작한 거예요. 거기는 소와 관련된 것을 먹는 게 기본이었으니까요.
와, 처음 알았어요.
범선 우리는 어릴 때부터 우유 급식을 강제로 해왔잖아요. 우리 세대에겐 성장을 위해 우유를 먹는 게 당연했어요. 조금만 떨어져서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거죠. 사람은 조금만 커도 엄마 젖을 떼는데, 소의 젖을 먹는다뇨. 소가 보통 사람보다 세 배는 더 빨리 자라거든요. 소젖에는 성장을 유도하는 인자들이 세 배 더 들어 있는 셈인데, 그걸 청소년과 성인이 주기적으로 먹으면 당연히 심혈관 질환이랑 성인병의 원인이 될 수 밖에 없겠죠.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던 축산업 과정을 알게 되니 끔찍하더라고요. 채식주의자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죠. 흔히 어떤 것은 먹고 먹지 않느냐에 따라 단계별로 구분을 한다고 들었는데요. 두 분은 아예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비건 지향’이라는 말을 쓴다고 들었어요.
범선 비거니즘을 단순하게 어떤 식습관이나 음식에 관한 취향이라고 생각하면 세세하게 분류해놓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저희에겐 비거니즘이란 말이 페미니즘처럼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나 마찬가지거든요. 동물의 권리를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삶의 방식을 바꾸고, 어떤 사회의 변화를 일으킬지를 이야기하는 건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건이라고 이야기를 하면 “너 완벽해?”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요. 이걸 종교로 비유해 보자면, 기독교를 믿는다고 했을 때 “너 그러면 성경에 적힌 대로 살고 있어?” 하고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데 비거니즘은 순결성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밝히지 않는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오히려 누군가에게는 차근차근 접근 할 수 있게끔 가이드가 되어주겠다.’싶었는데 이로 인해 다른 위계가 작동할 수도 있는 거군요.
범선 맞아요. 흔히 채식주의 단계를 피라미드로 표현하는데요. 비건이 맨 위에 있고 그 아래에 채소와 유제품 혹은 달걀만 먹는 락토 오보, 생선까지 먹는 페스코 순으로 내려오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돼지, 닭은 우리가 비건인지, 락토 오보인지 아무 상관도 없어요. 그냥 먹지 않는게 중요한거죠. 비거니즘의 핵심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가하는 고통과 죽임의 총량을 줄이는 거예요. 그래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비건을 지향했으면 해요.
어떤 언어로 구분짓게 되는 순간 자연스레 안과 밖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걸 기점으로 차이를 논하려는 사람들도 생기고요.
범선 언어라는 게 되게 미묘해요.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져요. 그래서 동물해방물결에선 채식 캠페인이라 하지 않고 탈육식이라고 불러요. 물론 개인은 채식을 실천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야하는 방향은 탈육식인 거죠.
그렇게 들으니 또 다르게 다가오네요. 사실 솔직하게 고백하면 인터뷰 질문을 쓰며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고민했는데 쉽사리 입을 떼기엔 이 분야에 대해 너무 무지하더라고요. 근데 또 정치적으로 옳은 이야기만 해야 할 것 같고, 질문지를 작성하는 와중에 자꾸만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하니 곤욕이었어요.
범선 저도 《동물 해방》을 처음 읽고 그런 지점에서 불편했던 것 같아요. 배알이 꼴렸어요. 내가 아무렇지 않게 행하던 일들이 실은 다 잘못된 거라고 지적을 당한 거니까요. 사실 내가 하는 일이나 무엇을 입는지에 대해 뭐라고 하는 거면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거 같은데 먹는 걸 공격하니까 묘한거예요. 명절에도 정치 이야기보단 먹는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분위기를 더 싸해지게 만들 수 있거든요. 저는 가족들이랑 진짜 많이 싸웠어요. 명절 상을 정성 들여 차렸는데, 안 먹고 있으면 어른들께서 얘기하세요. “왜 안 먹니?” 그때 제가 자본주의 강요하는 밥상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면… 정말 큰일 나거든요.
예전에 범선 씨가 한 예능에 나와서 논비건인 멤버분들께 한달 간 채식을 해보자고 설득하는 클립을 봤던게 생각나요. 논비건과 비건의 언쟁 장면들이 적나라하게 나왔죠. “김치찌개에 꼭 돼지고기가 들어가야 해?” “안 넣으면 그 맛이 안 나잖아.”(웃음) 두 분이 비건으로 살아오면서 듣고 겪었을 이야기들을 압축해서 본 기분이었달까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어요?
범선 상상하는 것과 비슷해요. 개고기 먹으면 정력에 좋다는 이야기랑….
지지 식물은 안 불쌍해(폭소)?
범선 아까 말씀드린 멜라니 조이가 육식을 하는 사람들이 그걸 정당화 하는 심리학적 기제들을 네 가지로 이야기를 했는데요. 첫째가 ‘Necessary’예요. 영양학적으로 필요하다는 거죠. 실제로 어릴 때부터 비건 집안에서 자란 아이들도 있는데, 그 부모들을 아동학대로 신고한 사례가 접수되기도 했어요. 그만큼 육식주의는 신화인거죠. 가장 중요한 항목이 ‘Nice’인데요. “고기 먹으면 좋잖아! 정겹고, 삼겹살과 소주를 통해 오가는 우정.” 그런 문화적인 분위기는 반박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인간에게 고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답답하죠.
아는 맛을 끊기가 정말 어렵지 않을까 했는데, 책에 이런 문장이 적혀 있더라고요. “부패한 미각이 기억하는 고기 맛은 곧 양념 맛이기에.” 이 부분을 읽고 머리가 띵했어요. 이렇게 생각하니 고기 하나쯤 안 들어가도 무방할 것 같더라고요.
지지 거의 튀김이나 양념 맛이죠.
범선 요즘은 대체육도 잘 나와 있어요. 웬만한 맛은 다 재현이 되고 아마 곧 배양육도 나오게 될 거예요. 농장에서 돼지고기를 만들려면 6개월이 걸리는데 실험실에선 6일이면 나와요. 이스라엘에선 이미 상용화가 되었고, 한국에서도 배양식 업계가 많이 움직이고 있어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요. 저는 5년 전부터 그 소식을 들어왔는데 지금 거의 다 완성되었어요. 3D 프린터로 고기를 만드는 시대가 왔어요. 근데 굳이 그렇게까지 먹고 싶어 할까 싶기도 하고요. 어쨌든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고기가 좋은 거지, 동물을 죽이는 게 좋아서 먹는 건 아니잖아요. 동물을 가둬놓고 고기를 만들 필요가 없어진 시대가 된 거예요.
그러게요. 이왕이면 빨리 상용화되면 좋겠어요. 지금도 많은 동물들이 죽어가고 있으니까요. 아까 여행 이야기 할 때 소 구출 얘기를 잠깐 했는데, 자세히 듣고 싶어요.
범선 그 소들은 인천에 있는 불법 목장에서 기르던 친구들이었어요. 거기는 개를 250명 정도 기르고 있었는데, 불법으로 점유한 시설이다 보니 인천시에서 행정처분으로 철거를 할 예정이었어요. 개들은 입양을 할 수 있으니 다른 시민 단체가 구조를 했어요. 근데 알고보니 농장주가 소도 열다섯 명을 키우고 있던 거예요. 우리가 흔히 젖소라고 부르는 홀스타인종이었죠. 연초쯤 동물해방물결 활동가들이 그 친구들을 만났고, 구조를 해야겠다 싶어서 모금 운동을 진행했어요. 무려 2천 분께서 지원을 해주셨는데도 다 구하진 못하고 여섯 명만 구했죠. 다만 소들은 개처럼 해외로 입양을 보낼 수도 없으니 ‘생크추어리Sanctuary’가 필요한데, 한국에는 그런 시스템이 마땅치 않았어요.
‘생크추어리’요?
범선 보금자리인 셈인데, 해외에서는 생크추어리가 전 세계에 200곳이 넘거든요. 그런데 한국에는 그런 공간이 마땅치 않았어요. 전국을 수소문해서 강원도 인제군에 계시는 생명운동을 오래 하시던 어르신의 도움으로 어느 한우 목장에 임시 보호를 할 수 있었어요. 소를 팔아서 돈을 버시는 분인데도, 저희 뜻이 갸륵하니까 한우들 옆에 구조한 소들을 위해 한 칸을 내어주셨죠.
구조한 소와 팔릴 소가 함께 지냈다니…. 되게 기묘한 광경이네요.
범선 처음 뵈었을 때도, 그분들께서 적을 만나러 온 게 아니냐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저흰 소를 길러본 적이 없고 그분들은 전문가시니까요. 그리고 생계를 위해 일을 하시는 거고요. 어쨌든 좋은 인연이 되어서 1년 동안 임시 보호를 했고요. 인제군청 측에도 설득을 해서 인구가 소멸되고 있는 마을의 폐교에 30년 무상 임대를 부탁 드렸어요. 대신 청년들을 이주시켜서 마을을 제 2의 고향처럼 여기게끔 관계 인구를 만들겠다고 약속 드렸죠. 저도 그곳에 주소 이전을 해두었어요. 그래서 인제군 남면 신월리 주민인데요. 사람보다 소가 많은 마을이죠. 한우 농장 하시던 분들께서 소를 개처럼 돌보겠다는 청년들이 나타나니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초반 환경을 조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죠.
구조된 친구들은 건강히 잘 지내고 있어요?
범선 사실 이송 과정에서 미나리라는 친구를 보내야만 했어요. 소들은 트럭에 타면 뜨거워져서 수송열 주사를 맞아야 하거든요. 그때 그 친구가 넘어진거죠. 그런데 스스로 못 일어나더라고요.
못 일어난다고요?
범선 저도 처음 알았는데요. 농장 소들은 고기 생산력을 높이려고 사료를 방대하게 먹이다 보니, 자기 몸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살이 찐대요. 그러다 보니 뼈도 엄청나게 약하죠. 그러다 보니 넘어졌을 때 일으켜 세우는 도구가 따로 있더라고요.
소를 일으켜 세우는 도구가 있다니, 전혀 몰랐어요.
범선 저희도 처음 알게 된거죠. 저희가 구조한 소들이 세 살인데 1톤이었거든요. 1톤을 들려고 하면 크레인과 비슷한 도구가 와야 하는데, 그게 없는거죠. 무엇보다 대동물을 치료해 줄 전문 수의사도 없고요. 겨우 수소문해서 서울대병원 수의학과에서 와서 진찰을 해주셨는데, 넘어지면서 손쓸 수 없이 다친 거예요. 동물해방물결 활동가들이 극진히 보살폈지만 결국 떠났어요. 다섯 명은 잘 지내고 있어요. 그 보금자리를 곧 대중에게 공개를 하려고 해요. 생명평화 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해서요. 그곳에서 소와 축제를 벌이게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그런 구체적인 장면을 보아야 알게 되고 애정이 샘솟는데 소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언어를 쓰는지 모르니까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 같기도 해요.
지지 소 눈망울을 보고나서 마트에 가 소고기와 소젖을 보면 느낌이 정말 이상해요. 소들은 거대한 왕손이 같거든요. 착하고 너무 귀여워요.
범선 보고 있으면 경외심도 들고요. 저흰 겨우 다섯 명을 살린 것이지만 그래도 이를 시작으로 잃어버린 연결성을 회복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해요.
좀 뜬금 없는 질문 일 것 같은데, 혹시 평생 한 가지만 먹고 살 수 있다면 무엇을 택할 건가요?
범선 하나만요? 아 어렵다. 저는 들기름 막국수랑 비빔 막국수랑 왔다갔다 할 수 있게 해주시면 막국수를 택할래요.
지지 저 골랐어요. 저는 샐러드나 비빔밥. 그런데 맨날 밥만 먹으면 질릴 것 같기도 해요. 범선 아 저 바꿀래요. 도토리 임자탕.
도토리 임자탕이 뭐예요?
범선 도토리로 만든 들깨 수제비라고 보면 돼요. 진짜 맛있어요. 드셔보세요.
지지 매번 먹기에는 질리지 않을까?
범선 뭔가 따듯한 걸 먹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요.
지지 그럼 저는 샐러드로 할래요. 종류가 다양해서 골라먹는 재미가 있을 거 같아요.
치열한 고민 끝에 두 가지로 결정되었네요. 두 분은 예술하는 자아와 운동하는 자아를 함께 지니고 있죠. 대한민국에서 예술가로서, 운동가로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지지 먹고살기 쉽지 않죠.
범선 그래도 저는 단군 이래로 한국에서 예술과 운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고 생각해요. 세계적인 저변이 넓어진 만큼 문화적인 힘이 상당해졌잖아요. 그만큼 정치적인 역동성도 커진 상태라 그 흐름 안에 있다는 것이 재미있어요. 저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외국에서 살지 한국에서 살지 고민했는데, 앞으로 한국이 조금 재미있어 질 것 같았어요. 세계사의 중심이 될 거 같아서 한국에서 살기로 결심했죠. 실제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서 즐거워요.
주변에 번아웃이 온 비건이나 중도 포기하신 분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지치지 않고 오랫동안 비건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할까요.
지지 자기 자신을 검열하지 않는게 제일 중요해요. 스스로 옥죄다 보면 금방 지쳐요. 내가 즐겁지 않으면 하는 의미가 없으니, 즐길 수 있는 선에서 노력하는 걸 권장하고 싶어요. 범선 아까 말씀드린 비건 지향과도 같은 맥락인데요. 저희는 비거니즘을 채식이 아닌 살림이라고 말해요. 내가 비건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게 중요한 거니까요.
살림은 참,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단어같아요. 지지 씨가 “비거니즘을 실천한 뒤로 얼마나 건강해지고 자유로워졌는지, 얼마나 즐겁고 재미있는지 설파하려고 노력”한다고 하셨어요. 두 분의 일상은 너무나도 사랑이 가득해 보여서, 역시 일상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구나 싶어요.
범선 많은 사람들이 비건이 되었을 때 자신을 탓하거나, 주변에 만연한 폭력에 분노를 하다보니 혐오의 에너지가 커질 때가 있어요. 그렇지만 비거니즘은 사랑하기 위해 하는 일이에요. 살리기 위해 하는 일이고요. 그러니 나부터 사랑하고 잘 살리는 것이 제일 중요하죠.
그렇네요.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얼굴 마주보며 함께 밥 한끼를 먹는 삶이라니, 얼마나 근사한지 몰라요. 그때 여러분들의 식탁 위엔 어떤 음식이 차려져 있기를 바라나요?
범선 도토리 임자탕이요(웃음).
지지 저는 구첩반상이요.
범선 씨가 차려줄 건가요?
지지 해줄 거야?
범선 해줘야죠. 그럼 저도 바꿀래요. 이건 수지 타산이 안 맞는 거 같은데.
(웃음)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서로 약속하고 끝낼까요?
에디터 오은재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