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과 함께 한다는 것

LIFE WITH PLANTS

식물과 함께 한다는 것

LIFE WITH PLANTS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대부분 늘 우리와 함께하기에, 그리고 가까이 있기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다. 그래서 그 존재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식물이 그렇다.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 매일 먹는 밥. 굳이 우리가 식물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지 않아도, 식물을 키우지 않아도, 살아가는 매 순간 우리는 이미 식물과 함께하고 있다.

커피를
마신다는 것

어느 순간부터 하루라도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날이 없게 되었다. 원두 품종과 원산지를 구별할 정도로 미각이 발달하진 않았지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커피 생각이 나고 작업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커피잔을 찾는 걸 보면 커피를 좋아하긴 하는 것 같다. 아주 먼 옛날엔 커피 열매에 들어있는 카페인 성분이 사람에게 활력을 준다고 해서 술에 커피 열매를 탄 것을 약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커피’라는 이름도 힘과 생활력을 의미하는 아라비아 어 ‘Coffa’에서 유래한 것. 커피는 코페아Coffea라고 하는 식물 가족(식물종)의 나무 열매를 가공해 만든 차다.

. 커피나무의 원산지는 아프리카이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거의 보기 힘들지만, 이 나무에서 열리는 초록색의 동그란 열매가 빨갛게 익으면 이것을 따서 껍질을 벗긴 후 말리고 볶아 원두를 만들고, 이를 물에 내려 차로 마시는 것이 커피다. 커피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커피의 원산지와 품종에 따라 다른 향과 맛을 느끼고, 취향에 맞는 품종을 선택해 마신다. 나는 이런 친구들에게 ‘넌 커피의 종 다양성에 기여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곤 한다. 같은 품종이지만 가격이 싸거나 더 달고 맛있는 채소와 과일을 선택하는 것과는 다르게, ‘품종의 다양성’을 인지하고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커피를 선택하여 마시는 소비문화는 커피 재배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품종을 생산할 수 있게 하고, 이 다양한 품종들이 생산되면 커피는 멸종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과일을
먹는다는 것

내가 사는 경기도 남양주시는 ‘신고배’라는 품종의 배 재배지로 유명하다. 어렸을 적에 아빠의 고향인 이곳에 오면 산등성이 곳곳에 배나무 밭이 펼쳐진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었지만, 지금 그 배나무 밭들은 모두 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렸다. 명절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던 길, 배 밭에 들러 박스째로 샀던 신고배는 이제 대형 마트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세계의 다양한 열대 과일을 맛볼 수 있게 된 우리는 새롭고 상큼한 맛에 매료되어 오래 전부터 먹던 배와 사과, 감 같은 과일을 덜 먹게 되었다. 과일은 인간에 의해 그렇게 진화되고 소멸된다.

우리는 더 달고 가격이 싼 과일을 원하고, 육종학자들은 우리가 원하는 품종을 육종하며, 그 품종이 나타나는 순간 우리는 기존에 먹던 과일에 더 이상 손을 대지 않게 된다. 그리고 재배자는 소비하는 사람이 없는 그 과일을 더 이상 재배하지 않게 되는 순환인 것이다. 늘 우리 곁에 있을 것 같은 사과는 백 년이 지나면 기후 변화에 의해 강원도에서만 재배될 것이다. 물론 그 전에 기후 변화에 강한 사과 품종을 육종하겠지만, 언젠간 사과도, 배도, 감도 우리 곁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매일 먹는 과일에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

나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식물을 그리며 보낸다. 숲에서 채집해온 식물을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펜대에 낀 펜촉에 잉크를 묻혀가며 그림을 그린다. 내가 쓰는 펜대는 조금 두껍고 노란빛이 나는 체리나무 펜대다. 9년 전, 처음 식물세밀화를 그릴 때 식물학자이신 선생님께서 이 펜대를 추천해주셨고, 그 후로 한 번도 잃어버리지 않고 이것으로 매일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얇고 좋은 펜이 나왔단 이야기를 듣고 다른 펜을 써보기도 했지만, 역시 내 손에 익숙한 도구가 가장 좋다는 결론이었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연필과 색연필 같은 필기류들의 재료는 나무다. 필기류를 만들 때, 목재가 균일하여 깎기 쉽다면 특별히 나무의 종에 한계를 두진 않는다. 그 중 향나무의 일종인 연필향나무가 연필의 재료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뒤틀림이 적고 향이 나며 적갈색이라서 고급 연필 재료로 취급된다. 예전엔 지우개에 쓰이는 고무도 고무나무의 원료로 이용했지만 요즘엔 플라스틱으로 만든 지우개가 대부분이다.

밥을
먹는다는 것

우리의 주식인 밥은 곧 쌀, 벼다. 지구에 사는 사람의 50퍼센트는 쌀을 주식으로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부터 국가적으로 국내 환경에 맞는 벼 품종을 꾸준히 육종해왔다. 과거 아일랜드에서는 척박한 아일랜드 기후와 토양에서도 재배가 잘 되는 곡물을 찾다가 ‘럼퍼’란 감자를 발견했고 이 한 품종만을 재배한 적이 있다. 얼마 후 이 품종에 대항하는 병이 발발하고 럼퍼 감자를 키울 수 없게 되었다. 순식간에 아일랜드인의 주식이 사라져 결국 국민의 20퍼센트가 죽게 되는 ‘감자 대기근’이 일어났다.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은 우리가 주식이 되는 식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한 품종을 재배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국가적으로 다양한 종을 육종하고, 농업에 힘을 쏟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다.

주식인 쌀뿐만 아니라 우리가 매일 먹는 김치에 들어가는 재료인 고추와 마늘, 파, 양파, 배추, 무 또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채소들이다. 최근에는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햇빛 대신 LED와 공장식 관수 시스템으로 식물을 수확하는 ‘식물공장’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실제 마트에 가보면 식물공장에서 생산된 채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식물공장은 닭의 소비가 급격히 늘어 방사형이 아닌 공장식 양계장이 증가하게 된 예와 비슷하다. 인류의 식량부족 문제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인건비가 덜 들며 꾸준히 비슷한 맛의 채소를 대량 수확할 수 있는 식물공장의 탄생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화장품을
바른다는 것

나는 어렸을 때부터 피부가 예민해 화장품을 고를 때 늘 골머리를 앓아왔다. 피부에 맞지 않은 성분이 들어간 화장품이나 비누를 쓰면 금방 피부가 울긋불긋해져서 최대한 알코올이나 화학성분이 적게 들어간 것을 써야 했기에 화장품의 성분을 조금 민감하게 따지는 편이다. 내 화장대에는 알로에와 라벤더 성분이 든 크림과 장미 립밤, 쑥 핸드크림과 오이 성분이 들어간 팩이 있다. 이것들을 바르기 전엔 민트 치약으로 이를 닦고, 살구 비누로 손을 씻고, 어성초가 들어간 샴푸로 머리를 감는다. 가끔은 향수 대신 레몬이나 라벤더 아로마 오일 원액을 물에 희석해 몸에 뿌리기도 한다. 나는 가끔 화장품을 바르며 감탄한다. ‘내가 알로에 잎을 얼굴에 바른다니!’, ‘체리 열매를 입에 바른다니!’

화장품의 원료가 되는 건 식물이다. 화장품 회사에서는 식물의 효능을 연구해 화장품의 원료로 사용하는데, 우리가 주로 이용하는 화장품과 비누, 치약에는 이미 효능이 검증된 외국의 허브식물인 라벤더나 민트, 시트러스계(레몬, 오렌지처럼 신맛이나 향이 나는 식물들의 가족 이름) 등이 함유되어 있다. 최근에는 제주도의 자생식물이나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처럼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효능을 알지 못해 원료로 사용하지 않았던 식물들도 그 효능이 입증되어 화장품의 원료로 쓰이고 있다. 언젠간 우리 주변의 들풀들, 민들레와 꽃마리, 현호색 같은 식물들로 화장대가 채워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책을
읽는다는 것

아무래도 난 식물과 관련된 책을 많이 읽게 되지만 시나 소설도 좋아한다. 책을 고를 땐 내용도 중요하지만 종이의 질감이나 손에 잡히는 느낌 같은 것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코팅된 새하얀 종이보단 덜 가공된 느낌의 꺼끌꺼끌한 종이를 선호하는데, 요즘 읽는 시인 존 키츠의 책도 노랗고 꺼끌꺼끌한 두꺼운 종이로 되어있다.

종이는 모두 나무로 만들어진다. 종이의 재료가 되는 나무 중 가장 많이 쓰이는 건 ‘닥종이’로도 유명한 닥나무와 꾸지나무이다. 이들은 예부터 화선지와 같은 얇은 종이로 만들어져 왔다. 요즘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종이의 재료는 수형이 큰 침엽수인 전나무나 가문비나무, 분비나무 등이다. 이들은 국내에서 많이 재배되지 않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을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문지의 재료가 되는 소나무는 국내에서도 종이의 재료로 공급되고 있다. 내가 책을 고를 때 꺼끌꺼끌하고 누런 종이를 찾게 되는 건 아마도 종이의 원재료인 ‘나무’가 가진 본연의 느낌을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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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정혜미

글·사진 이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