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영화를 좋아한다. 단편만이 가지고 있는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단편에서 그려내는 컴팩트함이 좋다. 장편에 비해 형식이나 소재의 제약이 덜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거기서 오는 신선함 자체가 매력이 된다. 무엇보다 전하고자 하는 바를 짧은 시간 안에 응축해서 담아내는 창작자들의 뚝심을 응원한다. 최근에는 네이버 영화나 왓챠플레이 같은 온라인 플랫폼에서도 단편영화를 보거나 다운받을 수 있고, 단편영화만을 트는 극장이나 공동체 상영이 많아지는 등 과거보다 단편을 접할 창구가 다양해지긴 했다. 그럼에도 큰 스크린에서 정기적으로 단편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환경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그렇기에 해외에서 그것도 영화제 프로그램의 일환도 아닌 일반 극장에서 단편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것도 아주 우연히, 이틀 연속으로. 마드리드에는 숙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울며 겨자 먹기로 머무를 곳을 예약했다. 아니나다를까 실망스러웠던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발견한 건 길 건너의 빈티지 샵이다. 영화와 음악에 관련한 오래된 굿즈를 파는 곳이었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리고 동네를 구경하면서는 한 눈으로 보아도 멋들어진 극장들에 설레기 시작했다. 저녁 시간에만 영화를 상영하는 펍 형태의 극장부터 ‘1916, Cine Ideal’이라는 이름을 가진 궁궐 같은 외관의 극장까지. 하지만 이중 으뜸은 바로 이곳, ‘시네 도레’라 확신한다.
시네 도레를 방문했던 날, 마침 상영하는 영화는 스페인 단편영화 모음이었다. PNR(Platafoma de Nuevos Realizadores, ‘신진 플랫폼’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이라는 스페인 비영리 협회가 주최하는 상영회였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영어 자막 유무를 확인할 수 없는데다 매표소도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매표소는 극장 밖 골목에 있었다). 극장 로비에는 저마다 모여 앉아 커피, 맥주,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뿐이었다. 그중 혼자 앉아서 와인을 마시는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영어를 할 줄 아나요?” 이고르는 영어를 곧잘 했다. 그는 스페인 독립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고, 스승이 연출한 작품을 보기 위해 단편 섹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쉽게도 영화에 영어 자막은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발권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영화를 기다리는 동안 당시 화제였던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나 페드로 알모도바로, 봉준호, 박찬욱, 연상호 감독과 그들의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극장에 포스터가 붙어있는, 당시 특별전을 하고 있던 마틴 스콜세지 감독 이야기도 물론 잊지 않았다.
이고르와 유쾌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상영 시간이 다가왔다. 그리고 기대없이 들어간 상영관의 웅장한 규모와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놀라고 말았다. 건물 외관과 반대로 상영관은 짙은 푸른색으로 꾸며졌는데 좌석, 복도, 계단, 기둥에 붉은색으로 포인트를 주어 색의 조화가 돋보였다. 스크린 위를 덮은 푸른톤의 벨벳 커튼부터 천장이며 벽 곳곳의 장식, 2층과 3층에 마련되어 있는 좌석까지.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못 해본 공간에 압도당했다.
시네 도레는 스페인 문화부의 공식 기관이자 스페인 영화 유산을 조사하고 보존, 복원할 목적으로 설립된 필모테카 에스파냐(Filmoteca Española)에서 관리하는 시설 중 하나라고 한다. 두 번째로 소개한 적 있는 바르셀로나의 ‘필모테카 데 카탈루냐’와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휴무인 공휴일과 월요일을 제외하고, 하절기와 동절기의 영업시간이 약간 다르긴 하나 보통 오후 4시에서 5시 정도 문을 연다. 18세 미만은 모든 섹션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일반 티켓 가격도 3유로로 아주 저렴하다. 추후에 안 사실이지만, 스페인을 상징하는 감독인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를 촬영한 극장이 시네 도레라고 한다. <그녀에게>는 제75회 아카데미시상식 각본상을 비롯해 전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알모도바르에게 다수의 상을 안긴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 중 한 편으로 꼽힌다. 알모도바르는 실제 마드리드를 기반으로 영화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의 대표 촬영지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공간이 이곳 시네 도레이기도 하다고.
3분, 20분, 13분, 20분 총 57분간 네 편의 단편영화를 봤다. 영화 속 인물은 모두 스페인어로 이야기했다. 극장 안에서 스페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 혼자인 듯했다. 옆자리의 이고르가 아니었다면 훨씬 어색하고 뻣뻣하게 극장에 앉아있었을 것 같다. 다만 언어는 영화가 가진 이미지 중 하나의 요소에 불과했다. 이것이 배제된다고 영화를 즐길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물론 나의 추측이 더해질 수밖에 없지만, 부족한 부분은 극장 안 관객의 반응에서 자연스레 채워졌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공동의 체험에 기반을 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의 리액션은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나는 스크린 안 인물들의 표정, 억양, 행동과 스크린 밖 관객의 리액션에 의존해 영화를 느끼는 낯설고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
단편을 마주치는 우연은 마드리드를 떠나는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버스터미널과 가장 가까운 극장 ‘시네테카 마드리드’는 ‘여성과 영화(Woman and Cinema PNR)’를 주제로 일곱 편의 단편을 상영했다. 영화제가 아니고서야 경험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극장에서 이틀 연속으로 단편영화를 관람하며 영화라는 종합예술의 위대함과 관객과의 상호작용에서 빛을 발하는 극장 관람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시네 도레
A. Cine Doré, Calle de Santa Isabel, 3, 28012 Madrid, Spain
H. culturaydeporte.gob.es/cultura/areas/cine/mc/fe/cine-dore
T. +34 913 69 32 25
We Around Project
내가 사랑한 유럽의 극장
씨네21의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 칸국제영화제의 <미치광이 피에로> 포스터에 매료되어 무작정 프랑스로 떠난 것이 유럽 극장 여행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럽의 극장에 찾아가 머무르는 동안 보고 느낀 것을 글로 적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