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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
꼭 한번 봐야겠다고 다짐하는, 몇 번이고 다시 재생하고 싶은 영화들을 꼽아본다. 머릿속에서 길게 이어지는 포스터들 가운데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한다. 바로 디자인 스튜디오 프로파간다의 작업물이라는 점. 당신이 문화생활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만든 포스터와 캘리그래피를 수십 수백 번 마주했으리라 단언한다. 좋아하는 것이 취미가 되고 업으로 삼다가, 마침내 즐기기까지 하는 프로파간다의 시네마 스토어를 둘러보기로 한다. 계단을 올라 묵직한 문을 밀어내면 마음 한구석에 전구가 반짝 켜지며 깨닫는다. 이곳이 더할 나위 없는 시네마 천국임을.
시네마 스토어에 들어서면, 어떤 이의 방에 초대받은 듯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게 된다. 닿는 시선마다 영화를 곁 하지 않은 것이 없고, 영화를 말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걸 체감하면 단번에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ʻ아, 이 사람 영화 진짜 좋아하네.’ 건물 한 층의 반을 프로파간다 사무실, 반을 영화 굿즈 숍으로 꾸린 최지웅 실장은 한국에서도 ʻ영화 덕후’들이 찾아올 만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스토어에서는 프로파간다가 출판한 도서들과 최지웅 실장의 수집품, 해외 수입 굿즈, 빈티지 포스터, 음반 등을 둘러볼 수 있다. 라이선스를 구입해 과거 좋아하던 영화의 포스터를 재해석해 판매하기도 하는데, 특히 <접속>(1997), <봄날은 간다>(2001), <패왕별희>(1993)가 인상 깊다. 기존 포스터와 사뭇 다른 B컷을 활용했기 때문인데 미묘한 시선, 옅은 색감, 작은 구도의 차이가 영화의 낯선 얼굴을 발견하게 한다.
시네마 스토어는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주 토요일에 예약제로 문을 연다. 시간당 열다섯 명으로 방문 인원도 제한하고 있다. 느긋하게 머물며 마음에 꼭 맞는 물건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공간이 영화에 대한 그의 사랑을 실감케 한다.
스토어까지 꾸리게 된 어른의 과거가 궁금해진다. 삼삼오오 모여 종이 딱지를 치던 때부터 소년 최지웅은 마음에 드는 물건을 꼭 두 개씩 모았다. 겉을 싼 포장지나 글씨, 디자인이 좋은데 무심코 버려지는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의젓해진 모습으로 교복을 입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좋아하기 때문에 영화 전단, 포스터, 88올림픽 굿즈와 종이 딱지 등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소유의 기쁨은 진작에 일상으로 스며들었는지 모른다. 어른이 된 후에도 그는 ʻ수집의 기본은 보관’이라 말하며 오래된 물건의 경매장을 구경 삼아 다녔고, 헌책방과 레코드 숍에서 시간이 훌쩍 지난 것들을 골라 왔다. 그러다 문득, 수집한 것을 혼자만이 아닌 모두의 기록으로 만들고자 다짐한다.
《88Seoul》, 《FILM TYPOGRAPHY》 시리즈, 《영화카드대전집》 1·2·3, 《영화선전도감》, 《영화간판도감》, 《20세기 레트로 아카이브 시리즈 1: 잡지 창간호》까지 프로파간다는 다양한 아카이빙 북을 펴냈다. 물론 그들 곁에는 기록을 도운 많은 이가 있다. 잡지 창간호를 모을 때는 도서 수십 권을 경매에 내놓은 컬렉터를 만났다. 소중한 자료들이 경매로 뿔뿔이 흩어질 테니, 그 전에 자료들을 책으로 엮어보자고 설득했고 컬렉터는 그 뜻에 충분히 공감해 주었다. 영화 카드를 모을 때도 마찬가지다. 과거 ʻ영화 카렌다’라고 불린 이것은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대표적인 홍보물이었는데, 하나의 영화를 극장마다 다른 버전으로 만들어 나눠주곤 했다고. 수집 동호회 회원들한테서 여러 버전을 모아 다채로운 카탈로그가 탄생했다. 《영화간판도감》을 만들 땐 당시 서울의 단성사, 대한극장, 국도극장 등에서 수많은 영화의 간판을 그린 백춘태 화백을 찾아갔다. ʻ영화 개봉일이 나의 전시회 개막일’이라고 말하는 화백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사진 자료들을 내주었다고. 프로파간다의 아카이빙 북 시리즈는 시네마 스토어에서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으니, 재치 넘치는 그때의 기록을 만나보자.
최지웅 실장의 특별한 수집품이 궁금하다면, 유리장 안을 들여다보면 된다. 스토어는 매달 테마 하나를 정하는데, 관련된 수집품이 유리장 안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지난달은 배우 강수연 특집이었고, 매년 4월이 되면 장국영 특집을 연다. 왕가위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 최지웅 실장이 좋아하는 감독들의 특집도 열린다.
1995년에는 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영화 전문지들이 다수 창간됐다. 《KINO》도 그중 하나로, 시네필 문화를 이끌던 잡지다. 2003년에 폐간 되어 이제는 과거 자료로만 머물러 있지만 시네마 스토어에서는 모든 호를 만나볼 수 있다. 당시 영화에 대한 평론뿐 아니라 광고, 지면 디자인, 타이포그래피를 보는 재미가 있다.
스토어 한편에는 두툼하고 묵직한 옛날 텔레비전이 있다. 등 뒤로 온갖 비디오테이프들을 거느린 채로 그 달의 테마와 관련된 영화를 재생한다. 투박해 보이는 텔레비전도 반가운데, 오래된 영화들이 노이즈 가득한 화면에서 흘러나오기까지 하니 공간에 들른 이들은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매력적인 포토 스폿의 역할도 톡톡히 한다.
1964년부터 1999년까지 국내에서 발행된 잡지들의 창간호를 소개한다. 프로파간다에게 잡지란 시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이다. 패션을 통해 유행하는 트렌드를, 맞춤법을 통해 언어의 변화를, 광고를 통해 대중들의 관심사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회성 매체로의 인식이 강해 아카이빙이 어렵던 잡지의 새로운 재미를 발견하고자 기획했다. 1960년대 인기를 끈 《선데이 서울》부터, 1970년대 편집 디자인의 혁신을 보여준 《뿌리깊은 나무》, 현재까지도 발행되는 《디자인》, 어린이 만화 월간지 등이 수록됐다. 《쎄시》, 《엘르》, 《씨네21》 등 문화 장르 잡지들과 《페이퍼》, 《인 서울 매거진》처럼 국내 잡지계의 신선한 영향을 준 무가지들도 포함되어 있다. 좁고 긴 판형은 책을 펼쳐 보는 그립감을 위해 선택했으며, 이미지와 함께 잡지의 이름과 출간 연월, 주제를 표기해두었다. 일부 도서는 삽지를 통해 내지까지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해 볼거리가 다양하다.
한 손에 꼭 들어오는 영화 카드를 실제 크기대로 모았다. 카드 앞면에는 포스터, 뒷면에는 달력이나 지하철 노선도, 시간표 등이 그려져 있는데 수집가들에게도 인기가 많던 원조 영화 굿즈라고 한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행됐고 홍콩 영화의 흥행, 팬덤을 몰고 다니는 스타 배우들의 등장에 힘입어 전성기를 누렸다. 다만 1990년대 후반부터는 인터넷의 보급과 멀티플렉스 극장의 등장으로 카드를 배포하는 홍보 방식이 줄어들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최지웅 실장은 매체가 흘러온 한 시대를 기록하는 도구로 영화 카드를 바라보았다. 《영화카드대전집》은 한쪽에는 카드 앞면을, 한쪽에는 뒷면을 실었으며, 집마다 한 권씩 꼭 갖고 있던 ʻ영한대사전’의 느낌을 주고 싶어 두꺼운 분량에 비닐 커버를 씌웠다. 앞서 같은 시리즈로 두 권이 출간되었는데 《영화카드대전집 1》은 1957년부터 1980년까지, 《영화카드대전집 2》는 1981년부터 1988년까지를 다룬다. 1989년부터 1997년까지 415종의 카드를 한국 개봉 순으로 담은 3권을 마지막으로 이 시리즈는 마무리지었다. 콜라주로 작업된 표지에는 <나 홀로 집에>(1991) 맥컬리 컬킨, <가위손>(1991)의 조니 뎁, <사랑과 영혼>(1990) 등 반가운 얼굴들이 보여 그 시절의 추억을 불러온다.
이제는 보기 힘든,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닌 영화 간판들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과거 극장에는 거대한 광고판이 걸려있곤 했는데, 과감한 광고 문구와 선명한 그림이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영화를 홍보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던 터라, 극장마다 전속 화가가 있었고 화가 마다 고유한 스타일도 뚜렷했다고 한다. 《영화간판도감》에는 1940년대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의 간판 1,000여 점이 수록되었으며, 이는 최지웅 실장과 더불어 실제 영화 간판 화가로 활동했던 분들이 보관했던 사진을 한데 모은 것이다. 하단에는 영화관과 해당 연도, 영화의 한제와 영제, 제작 연도와 국가까지 꼼꼼히 기록해두었다. 영화 간판계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ʻ영화간판쟁이’라 일컫는 백춘태 화백과 나눈 대화도 흥미롭다. 선명한 핑크 컬러와 폰트 모두 최지웅 실장이 직접 구상했고, 두꺼운 분량 때문에 책이 갈라지지 않도록 양장본으로 제작했다. 흑백 사진부터 고화질 컬러 사진들의 사이즈가 제각각이다 보니 배열을 고려하여 판형은 정사각형으로 만들었다고.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기록과 지역 극장의 추억을 지키고 싶은 프로파간다의 바람이 드러나는 도서다.
에디터 이명주
포토그래퍼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