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축구도 사랑하지만, 사실 유럽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닷가나 공원을 하염없이 거니는 일이다. 걷다가 적당한 곳에 앉아 햇볕을 쬐고 책을 읽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과 일상을 살피는 일. 어찌 보면 그게 내 여행의 전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바르셀로나의 공원을 찾았다. 개선문과 동물원 사이의 시우타데야 공원(Park de la Ciutadella)은 꽤 큰 규모를 자랑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공간이다. 실컷 걸으며 양질의 볕을 쬐고 맘껏 쉬는 것으로 오전 시간 전부를 보냈다. 배가 고파져 공원을 나섰다가 ‘시네마 말다’와 마주쳤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소규모 상점 사이에 있어 존재를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극장. 하지만 한눈에 띈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영화 <버닝>의 해외판 포스터였다. 매표소 앞의 줄을 보고 상영 시간표를 살피니 20여 분 후 첫 번째 영화인 <버닝>이 시작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극장과 나의 타이밍에 새삼 놀라며 점심 대신 영화를 선택했다. 외국에서 현지 사람과 함께 한국 영화를 보고 그들의 반응을 살피거나 감상을 들어보고 싶었는데, 그 순간이 이렇게나 빨리 찾아올 줄이야. 그리고 그 영화가 이창동 감독의 <버닝>일 줄이야. 심지어 바르셀로나의 낯선 단관 극장에서(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같은 곳일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티켓을 발권해준 아저씨는 눈 깜짝할 사이에 부스에서 나와 극장 앞에서 검표와 입장 안내를 도왔고, 또 어느 시점이 되니 입구에서 사라졌다. 그즈음, 극장의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한다. 10명이 조금 넘는 관객과 함께한 <버닝>. 이곳에서 가장 놀라웠던 지점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이미 다음 영화의 관객들이 ‘입장’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보는 문화는 자리잡혀 있지 않지만, 아직 영화가 끝나지 않았고 심지어 관객이 퇴장하지도 않았는데 다음 영화의 관객이 입장하다니. 당황한 채 나와서 시간표를 다시 확인해보니 영화와 영화 사이의 텀이 아주 타이트했다. 가령 12시 30분에 시작한 148분의 <버닝>의 다음 영화는 15시에 시작한다. 줄줄이 소시지와 같은 식이다. 이런 구성으로 첫 회차부터 마지막 회차까지 상영이 이어진다. 적은 인원이 관람하여 상대적으로 상영 중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는 일이 쉽지 않았고, 소규모 공간에서 밭은 상영 스케줄대로 운영되는 이곳 극장의 특성상 이야기 나눌 여건이 허락되지 않은 지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여전히 더빙판을 외화 상영의 기본으로 삼는 유럽에서 모든 영화를 V.O(Version Original의 줄임말로 ‘원어판’을 뜻한다)로 상영하는 공간의 소중함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 시네마 말다는 모든 영화를 원어로 상영하며 스페인어 자막을 덧붙인다. 상영작 프로그램의 면면도 뛰어나다. 유럽 영화를 중심으로 전 세계의 독립예술영화를 엄선해 상영한다. 무엇보다, 파격적인 티켓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시네마 말다는 ‘하루에 한 번만 티켓 비용을 받는 바르셀로나의 유일한 극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평일은 5.5유로(‘관객의 날’로 명한 수요일은 5유로), 금요일은 7.5유로, 토요일과 휴일은 8.5유로로 한 번 티켓을 발권하면 당일 상영하는 영화를 최대 5~6회차까지 볼 수 있다. 그야말로 ‘만 원의 행복’ 아닌가. 단관으로 운영되는 독립예술영화 전용 극장에서 이런 티켓 시스템을 운용한다면 매너가 부족한 상영 스케줄도 충분히 용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낡은 시설과 작은 스크린, 빼어나지 않은 사운드. 넓직하고 푹신한 의자에 파묻혀 편안하게 영화를 보는 공간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 매점도 당연히 없다. 단순히 영화를 보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문화 활동을 하는 최근의 극장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방금 본 영화의 감흥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다음 영화의 관객들로 동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바르셀로나 중심부에 이토록 다채로운 영화를 상영하는 매력적인 극장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
시네마 말다
A. Cinema Maldà, Carrer del Pi, 5, 08002 Barcelona, Spain
H. www.cinemamalda.com
T. +34 933 01 93 50
We Around Project
내가 사랑한 유럽의 극장
씨네21의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 칸국제영화제의 <미치광이 피에로> 포스터에 매료되어 무작정 프랑스로 떠난 것이 유럽 극장 여행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럽의 극장에 찾아가 머무르는 동안 보고 느낀 것을 글로 적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