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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스모크>, <바닷마을 다이어리>
A STEP
AT A TIME
시간은 한 걸음씩
담배 가게 아저씨 오기 렌과 아내를 잃은 소설가 폴 벤자민, 그리고 상처를 딛고 바닷마을에서 햇살처럼 눈부신 일기를 써내려가는 네 자매 사치, 요시노, 치카, 스즈. 이들이 말한다. 시간은 한 걸음씩, 매실주 담그고 나면 여름, 이라고.
상점의 주인과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나름 상점의 주인인데, 그건 좀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상점의 주인이라는 위치는 곤란하고 애매하다. 나는 상점에 들어오는 누구든 환대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뭔가를 팔고 돈을 받아야 한다. 아시다시피 친구 관계는 돈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런 점이 가장 어색하다. 돈과 나를 분리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직 그 정도로 장사꾼의 생활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손님이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건(뜻밖에 많은 사람이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한다)무턱대고 맞장구를 쳐주기도 뭣하고, 조언을 해주기도 뭣하다. 이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저 사람에게 전해서는 안 되는 것은 기본이고 말실수를 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나는 그저 팔짱을 끼고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추임새를 넣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다. 요즘은 마치 여자친구의 수다와 하소연을 들어주는 비법을 연애 전문가의 강연에서 듣고 와서 실천 중인 요령 없는 남자가 된 기분이다. 잘 들어주긴 하는데 상대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말은 들어주기는 해도 친구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심리상담사나 정신과 의사도 아닌데 말이다.
평생 상점의 주인 같은 건 해본 적이 없는 나는, 평생 상점의 주인 같은 것이 될 거라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나는 이런 이유로 상점 주인 노릇이 영 어색하다. 나와는 달리 웨인 왕의 오래된 영화 <스모크> 속의 담배 가게 주인아저씨 오기 렌은 평생 담배 가게 주인이었던 것처럼 카운터 뒤에 서 있는 폼이 멋지게 잘 어울린다.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을 고집과 뚝심이 있어 보인다. 친절해 보이기도 하고 불친절해 보이기도 한다. 말을 붙이기는 편해 보이지만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긴장감도 든다. 나도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지만 사실 나는 오기보다는 그의 작가 친구 폴 벤자민 같은 사람이다. 예민하고 방해받는 것을 싫어하고 나쁜 사람은 아닌데 참을성이나 관대함은 좀 부족한. 아, 아무래도 나는 상점 주인 타입은 아닌가 보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스모크>는 뉴욕 길모퉁이의 담배 가게를 무대로, 가게 주인 오기와 그의 손님이자 친구인 소설가 폴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상점 주인 노릇을 하다 보니 문득 오래전에 봤던 이 영화 생각이 나서 다시 보고 싶어졌다. 줄거리는 가물가물하지만 하여간 제목처럼 담배를 주구장창 피워대는 영화였다. <스모크>의 대본을 쓴 사람은 소설가 폴 오스터인데 아마도 폴 벤자민은 작가 자신을 본뜬 인물일 것이다. 영화는 등장인물에 따른 다섯 개의 챕터로 구성된다. 임신한 아내를 총격 사건으로 잃은 홀아비 작가 폴. 매일 오전 8시면 오래전 훔친 카메라로 똑같은 위치에서 거리 사진을 찍는 담배 가게 주인 오기. 한때 오기의 연인이었으나 그를 떠난 후 한쪽 눈도 잃고 어린 딸도 마약중독에 걸려 괴로워하는 루비. 교통사고로 엄마가 죽고 떠나버린 아버지를 찾아 나선 소년 라쉬드. 그 교통사고로 한쪽 팔을 잃고 평생 속죄하는 기분으로 살아가는 아버지 사이러스.
나는 오기와 폴이 오지랖 넓은 동네 아저씨들처럼 라쉬드에게 사이러스의 아들임을 고백하라고 부추기는 장면이 좋다. 심각한 아버지와 아들 옆에서 그들이 팔짱을 낀 채로 웃고 있는 것도 좋다. 사실이 밝혀진 후 모두가 햇살 아래 둘러앉아, 심지어 오기는 드러누워서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장면도 좋다. 막장드라마에나 나올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방식이 근사하게 느껴진다. 이런 장면들이 황당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오기와 폴이 많은 일을 겪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웬만한 일 앞에서는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 봤을 때도 기분이 좋아지는 영화였는데 다시 봐도 여전히 그렇다. 이 영화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 사실 착한 사람은 나쁜 사람이기도 하고, 나쁜 사람은 착한 사람이기도 하다. 심각한 일을 가볍게 처리하고, 가벼운 일을 심각하게 처리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다. 그런데도 그들 모두가 평범하고 또 대범하게 살아간다. 햇살이 비치는 뉴욕 거리 한 모퉁이 담배 가게처럼.
“스즈, 우리랑 같이 살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속 부모 없이 자란 세 자매는 어느 날 먼 곳에서 전해온 아버지의 부고를 듣는다. 딱히 놀랍지도 않은 부고에 불편한 기분으로 장례식장에 도착한 그들 앞에 나타난 사람은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스즈. 이미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마저 잃은 후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과 어색한 동거를 해야 할 상황에 처한 이 작고 안쓰러운 소녀를 자매는 조금은 충동적으로 막내 여동생으로 받아들일 것을 결심한다.
사람은 개와 고양이가 아니라고, 그렇게 쉽게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저 아이는 너희 가정을 깨뜨린 여자의 아이라고, 그런 어른들의 말에도 사치와 자매들의 굳건한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자매는 매일 새로운 끼니를 준비하고 상에 둘러앉아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고 내 옷을 마음대로 입었다며 투닥거리고 매실주를 담가서 마시고 서로의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해주고 문설주에 키를 재고 지각할까 봐 전철을 타러 달려가고 불꽃놀이를 하면서, 점점 가족이 되어간다.
영화는 네 자매가 바닷마을의 오래된 집에서 함께 보내는 사계절을 섬세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코타츠 안에서 꾸벅꾸벅 졸던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곧 매실나무가 열매를 맺는다. 매실을 따서 매실주를 담고 나면 여름이 온다. 선풍기를 틀고 국수를 말아먹던 여름이 지나면 쌀쌀한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다시 겨울이 온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아무리 미운 사람도 모두 죽고 만다.
스즈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매에게는 너무 아픈 상처를 끌어안는 일이고, 자신들을 버린 어른들을 용서하는 일이다. 그 모든 일은 누구의 탓도 아니었음을 자신에게 일깨워주는 일이다. 그리고 이제 어른이 된 사치는 자신처럼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리려 하는 스즈에게 소녀 시절을 돌려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찾는 것이다.
“벌레 잡고 소독하고, 살아 있는 건 다 손길이 필요해.”
매실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사치는 말한다. 우리가 지닌 크고 작은 상처들은 단 한 번의 사건이나 누군가의 사과가 아니라 일상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결국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시간이다. 이 영화는 그 시간의 기록이다. 그들이 진짜 가족이 되기까지의 다정하고 참을성 많은 손길의 기록이다.영화 <스모크>에서 어느 날 늦은 시간에 담배를 사러 가게에 들른 폴은 오기가 매일 오전 8시에 가게 앞에서 찍은 수천 장의 사진을 구경하게 된다. 담배 가게를 연 이후로 아마 휴가 같은 건 가본 적이 없을 오기는 매일 휴가 가는 기분으로 이 사진들을 찍었다고 한다. 폴은 몇 권의 앨범들을 넘기면서 재미있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웃음을 터뜨린다. 오기가 폴에게 말한다.
“천천히 봐야 이해할 수 있네. 너무 빨리 넘기는군. 사진을 거의 안 보고.”
“모두 똑같잖아?”
“똑같아 보이지만 한 장 한 장 다 틀리지.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있고 태양은 매일 다른 각도로 지구를 비추고 있지.”
“천천히 하라고?”
“해볼 만해. 자네도 알듯이 내일 다음은 내일, 또 내일이야. 시간은 한 걸음씩 진행되지.”
그러다 폴은 문득 그 사진들 속에서 죽은 아내의 사진을 발견하고는 기쁨과 그리움과 슬픔에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같은 사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매일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 사진 속의 누군가는 여전히 이 거리에 살면서 같은 길을 지날 것이고 누군가는 더 이상 이 거리에 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 날 기쁜 소식을 들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 날 나쁜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바라던 일을 이루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실직하거나 이혼을 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폴의 아내처럼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오기의 가게 앞을 지나가던 그 시간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기는 우리 인생의 별일 없던 그 수많은 하루를 프레임 속에 붙잡아두는 것으로 의미를 만들었다. 그가 그 사진을 전시하거나 돈을 받고 파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그 자신만의 의미 있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은 그가 딱히 전망 있어 보이지 않는 담배 가게의 문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여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상점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그런 일인가 보다. 시간이 한 걸음씩 진행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손님이 올지 안 올지 모르지만 아무튼 아침마다 문을 열어두는 것. 불시에 찾아드는 이런저런 손님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오늘은 장사가 안되어도 내일은 잘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잃지 않는 것. 오늘로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아는 것. 내일은 반드시 온다는 걸 아는 것. 매일 똑같지만 매일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 시간이라는 거대한 규칙에 순응하는 것.
너무 거창한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떼돈을 벌기 위해 상점의 주인이 된 것이 아닌 나는(이런 마인드야말로 상점의 주인이 되기는 글러 먹었다는 증거!)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문을 닫기 전까지는 이 희한한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 여기가 아니면 만날 수 없었을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관계를 맺어보고 싶다. 여기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짜증도 내고 신경질도 부리고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고 화도 내고 싸우고 화해하고 그러고 싶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지금이 아니면 내 평생 다시는 상점의 주인 같은 건 될 일이 없을 텐데, 오기 렌의 매일 매일 이어지는 특별한 휴가처럼 이 시간을 내 마음속에 특별하게 기록해두고 싶은 것이다.
스모크 Smoke
웨인 왕 감독 | 드라마 | 미국 | 112분
브룩클린의 담배 가게 주인인 렌은 매일 아침 같은 풍경을 찍는다. 배경은 똑같고 인물은 다른 사진이 사천 장에 이른다. 그리고 그 담배 가게를 오가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삶에서 겪은 중요한 상실을 안고 살아간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海街diary, Our Little Sister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 드라마 | 일본 | 128분
15년 전 가족을 버린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세 자매는 이복 여동생 ‘스즈’를 만난다. 네 사람은 함께 살면서 자매들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한다. 그러는 동안 세 자매는 부모에 관한 시각이 점차 변하는 것을 느끼고, 스즈는 새로운 삶을 천천히 받아 들인다.
에디터 이현아
글 한수희 일러스트 이영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