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하면 어때요

세상에 없는 마을

눈 달린 채소와 귀여운 두건

“어머! 파프리카 색깔이 꼭 장난감 같네?”
“엄마, 여기 눈 달린 오이가 있어!”

“치악산 복숭아 당도최고”라는 현수막이 인터넷상에서 한창 떠돈 적이 있다. 판매하려는 것도 아니고 홍보하려는 것도 아니다. 판매라면 으레 있어야 할 금액이나 판매자 연락처가, 홍보라면 으레 있어야 할 생산자 이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큼직하고 굵게 적힌 열 글자, 그게 다다. 아마 우리네 복숭아를 자랑하려다가 본분을 잊은 게 아닐까.

시장에 가면 과일이나 채소 앞에 ‘치악산 복숭아 당도최고’ 같은 손 글씨들이 옹기종기 적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비슷하게 생긴 수확물 사이에서 우리네 것이 어떤 점이 멋진지 강조해 보고자 하는 상인들의 요령이다. 목청 높여 “사세요! 맛있어요!” 하는 일도 있지만, 그건 늘 그 자리를 지키는 시장보단 트럭이나 노점상에서 볼 풍경이다. 작물을 에워싼 글자들에서 나는 종종 상인의 성정을 본다. 소름이 오소소 돋을 만큼 가지런한 팻말과 반듯한 글씨, 책이라면 눈을 질끈 감았겠지만 시장이어서 “귀엽다!”는 탄성부터 터져 나오는 얼렁뚱땅 맞춤법, 얼기설기 그려둔 정체 모를 캐릭터, 여기 있어선 안 될 것만 같은 잘 디자인된 이름표까지. 그런 걸 보고 있으면 한 자 한 자 글자를 적어 내려갔을 상인들의 모습이, 그네들의 성격이나 품성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만 같다.

내게 〈체험 삶의 현장〉 같은 직업 체험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낯선 곳에서 한달살이를 하듯 한 달 정도 다른 일을 맘 편히 해볼 수 있다면, 한 번쯤 동네 마트의 청과물 코너를 맡는 씩씩한 점원이 되고 싶다. 시장은 베테랑의 영역이기에 그 안에서 경쟁할 엄두는 좀처럼 나지 않으니까, 동네에 오래 자리하고 있는 적당한 크기의 마트에서 청과물의 질서를 담당하는 편이 수월할 것 같다. 너무 늦지 않은 나이에, 그렇다고 너무 이르지도 않은 나이에 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 세상 과일의 맛을 웬만큼 알고, 땅에서 나고 자란 채소를 직접 만져본 적 있는 적당한 나이대에. 소싯적 환경 미화 시즌에 교실을 꾸미던 손놀림을 발휘하여 마트 청과물 코너에서 어떻게든 내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책임져 보는 것이다.

마트에 출근하면 좋아하는 앞치마를 두르고 귀여운 두건을 쓴다.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실은 두건이라는 건 평상시에 쓰긴 뭐한 특급 귀여운 아이템이기 때문에 이럴 때 마음껏 써보고 싶다. ‘오늘은 알배추가 실하네?’ 싶으면 마트 주 고객층 평균 신장을 가늠하여 대강 눈높이 정도에 알배추를 진열하고, ‘파프리카 색이 선명하잖아?’ 싶은 날엔 시선이 닿기 좋은 중앙에 주인공처럼 놓아두는 게 내 일이다. 상태가 좋지 않아 팔 수 없는 채소엔 눈알 부자재를 붙여서 귀여운 역할을 입히는 것도 내 일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채소에 이름표를 붙이는 것도 내 일이다. 흙이 좀 묻어도 괜찮을 귀엽고 튼튼한 앞치마를 허리춤에 동여맨 채, 정성스럽고 교양 있게 채소들을 대해주고 싶다. 이 푸르른 이파리에 과하지 않을 귀여움을 한 스푼 묻혀 진열해 두면 우리 마트 매출은 금세 오를 테고 ‘마켓컬리’나 ‘오아시스’ 같은 플랫폼에서 컬래버레이션을 하자며 연락해 오는 일도 있겠지. 그건 조금 곤란한데…. 나는 흙을 만지고, 손 글씨로 이름표를 만들고, 수명을 다한 채소에 눈알 붙여주는 아날로그 귀여움이 내 일이라 믿는다. 그러니까 이런 입체적인 귀여움을 디지털로 옮길 재간도, 욕구도 없다. 인터넷 장보기가 보통의 일이 되어도 굳이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으로 나가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고, 나는 그 천연의 귀여움을 지키는 게 내 일이라 믿는다. 그러니까 컬래버레이션 제안은 죄송하지만….

길잡이의 느긋한 책무

“꽃과 시장이 있고, 사람은 거의 없지만 간간이 어린아이가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놀이터가 있는 곳. 그런 동네에 가려면 몇 번 플랫폼에서 몇 시 차를 타고 어떻게 가야 하나요?”
“네?”

어릴 때부터 곧잘 전철을 탔다. 전철 타는 게 좋았고, ‘어린아이가 전철을 타고 어딘가에 간다.’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다녀오고 나면 마치 모험을 끝낸 듯 “나 오늘 혼자 전철 타고 이모네 갔다 왔어.”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땐 잘 몰랐는데,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나는 ‘전철표’라는 것도 좋아한 것 같다. 개찰구에 표를 넣으면 뱀이 파리를 날름 핥아 삼키듯 표를 쏙 빨아들이는 구멍이 신기했다. 마그네틱으로 정보가 읽혀 내 표가 통과되거나 거절되는 시스템도 신기했다. 카드로 태그하면 손쉽게 문을 열어주는 지금 개찰구보다 훨씬 엄격하고 예민한 개찰구가 있던 시절. 전철만큼 전철표를 가지고 통과하던 그 순간이, 전철표라는 물성이 분명히 좋았던 것 같다.

그걸 어렴풋이 깨달은 건 처음 일본에서 ‘JR’이라 불리는 철도를 타던 날이었다. 자동 발매기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티켓 판매소에 기다랗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표를 내어주는 모습에서 나는 어렵지 않게 어릴 적 나를 소환할 수 있었다. 나는 기다랗게 늘어선 사람들 사이에 한 자리를 차지한 채 사람들 면면을 살폈다. 일렬로 선 사람들은 빈 창구 직원이 손을 들면 그쪽으로 걸어가 목적지를 말했다. 창구 안에 있는 직원에게 가고자 하는 역 이름을 읊고, 가장 빨리 탈 수 있는 열차를 안내받고, 때때로 요일과 시간을 지정해 가능한 차편을 전달받고, 거미줄처럼 복잡한 노선도를 가리키며 환승역을 찾거나 방면을 체크하며 갈 길을 익혔다. 지루해 보이는 이도, 발을 동동 구르는 이도 없었다. 나는 내 차례가 오길 기다리면서 누구도 서로 채근하지 않는 분위기에 대해 생각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느긋함의 정체는 뭘까.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가야 할 역 이름 대신 엉뚱한 것을 물었다. 내가 타려는 노선 중 사람이 적고 대단한 관광지가 없는 곳이 어디냐고. 여기는 관광 안내소가 아닌데, 이런 질문은 실례일 텐데, 하고 생각하는 내게 직원은 ‘여기가 좋을 것 같다.’며 처음 듣는 역 이름을 알려주었다. 철저히 계획한 대로만 움직여야 안심하는 성격인 내가 무턱대고 그러자며 직원 말에 따라 티켓을 끊었다. 직원은 타이핑 몇 번이면 될 것 같은 과정을 일일이 철한 서류들을 뒤적거리며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클릭 몇 번이면 금세 인쇄된 티켓이 나올 것 같은데, 스탬프를 굴려 오늘 날짜에 맞춰 왕복 티켓에 일일이 도장을 찍어 주었다. 혹여나 번질세라 종이를 꽈악 눌러 잉크가 묻어나지 않도록 섬세히 마무리까지 해주는 걸 보며 나는 이런 느린 친절을 오래 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채근하지 않을 때에야 사랑할 수 있는 손때 묻은 느긋함을. 

한산한 동네를 보통 열차로 누비고 돌아온 그 밤, 나는 JR 티켓 창구에 앉아 사람들을 맞이하는 꿈을 꾸었다. 어딘가 가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노선을 적확히 안내하고,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과 느리게 가는 방법을 두루 소개해 주는 꿈. 꿈속에서 나는 근사하게 각이 진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손님에게 복잡한 길을 차근차근 설명하는 지혜도, 손으로 직접 숫자와 글자를 써서 티켓을 완성해 주는 노련함도 갖추고 있었다. 꿈에서 깬 그날 아침, SNS에 “다음 생엔 JR 티켓 창구에서 일하고 싶어.”라는 글을 남겼을 때 금방 답글 하나가 달렸다. “어우, 재미없어. 그거 3D 산업 아냐?” 어쩌면 내가 꿈꾸는 느긋한 친절은 사실 시시하고 재미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구시대를 살아보지 못해서 갖고 있는 환상, 실제로 내 삶이 되면 불편하다고 여길 허상. 하지만 한낱 환상에서 깨지 않는 것도 나만의 삶을 위한 나름의 요령이다. 그러니까 어떤 비웃음이나 손가락질은 그냥 그런대로 흘려 보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어떤 순진함들을 남긴 채 살아가는 것이, 내게는 분명히 필요하다.

지렁이와 함께 혼비백산

“어떤 일을 하고 싶어요?”
“산속에서 살고 싶어요.”

외국어를 배우다 보면 어린아이가 된 듯한 기분을 자주 느낀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마다 오래전에 해본 대화들을 떠올리게 된다. “제 취미는 피아노를 치거나 책을 읽는 것입니다. 당신의 취미는 무엇인가요?”, “저는 어릴 때 경찰이 되고 싶었습니다. 가장 빠르게 달려 나쁜 사람의 손목을 잡아 체포하고 싶었습니다.” 같은 문장을 더듬더듬 연결해 말하다 보면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를 두루 떠올리게 된다. 때때로 나를 돌아보는 일도 있다. 직업을 묻는 간단한 질문에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정리하고, 어떤 점에서 보람을 느끼는지 떠올리고…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내가 하는 일들이 낯선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가 하는 일은 책을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거나, 에세이를 쓰거나, 글들을 묶어 편집합니다.” 언젠가 외국어 수업에서 “먼 미래엔 무슨 일을 하고 싶어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제법 긴 시간 꿈꿔온 일을 상상하며 더듬더듬, 짧은 외국어를 잇기 시작했다.

“나는 산속에 책방을 만들 생각입니다. 그곳엔 사람이 없고, 네온사인이 안 보입니다. 나무가 있고, 가끔 동물이 있고, 가을이 되면 낙엽 밟는 소리가 들립니다. 겨울이 오면 눈도 내립니다. 위험하지 않습니다. 책방 앞에 작은 텃밭을 만듭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을 줍니다. 잘 자랐는지 살펴봅니다. 많이 자라면 내가 갖습니다. 바구니에 담아서 흙을 닦습니다. 낮이 되면 의자에 앉아 책을 읽습니다. 일기를 씁니다. 가끔 낮잠을 잘 수도 있습니다. 빵이랑 우유를 먹습니다. 책방의 책들을 정리합니다. 누군가 책을 보다가 놓고 갔습니다. 읽던 채로 놓았습니다. 같은 페이지가 자꾸 펼쳐집니다. 무거운 책으로 누릅니다. 산속 책방까지 일부러 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명 한 명이 소중합니다. 나는 아침에 닦아 놓은 채소를 카운터에 둡니다. 손님이 오면 못 먹는 채소가 있는지 물어봅니다. 내가 가진 채소들을 작은 봉투에 담습니다. 오이는 그대로 먹어도 됩니다. 손님이 책을 사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안 사도 괜찮습니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습니다. 내가 기른 채소를 선물로 줍니다. 누군가는 됐다고 합니다. 상처받을지도 모릅니다. 산속에 들어가기 전까지 거절에 익숙해집니다. 지금 나는 그것을 연습합니다.”

모국어로 대답해야 했다면 이처럼 진실하게 이야기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누가 봐도 너무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꿈이니까.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이나 ‘꿈’이라는 건 대개 그런 모양 아닌가? 진짜 산속에 책방을 만들 수 있게 된대도 대단히 잘할 자신은 없다. 과거에 책방을 시작하는 회사에서 일해본 적이 있어서 처음 책방이란 공간을 만드는 데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 몸소 경험했으니까. 책장에 수십 권, 수백 권의 책을 꽂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 그것들을 요령껏 진열하고 알리는 데 얼마나 큰 수고가 드는지, 대형 서점보다 더 좋은 무언가를 갖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아 하는지 충분히 안다. 그뿐이랴, 나는 농작물을 키워본 적도 없고, 하필 흙에서 사는 지렁이를 무서워하고, 문명과 대단히 멀어진 곳에서 살아본 적도 없다. 산속 책방이라면 불을 끄면 어두울 것이고, 위험할 것이고, 폭설이나 폭우에 취약할 것이고, 손님이 0명인 날도 많을 테다. 작물을 수확하기는커녕 지렁이 출현에 혼비백산할지도 모른다. 다행인 것은 내가 외국어로 ‘혼비백산’ 같은 단어는 모른다는 것이다. 사전에서 ‘지렁이’를 찾아볼 일도 없었다. 언젠가 외국어로 “지렁이 출현에 혼비백산할 게 뻔해서 꿈은 그만 꾸겠습니다.” 같은 말을 너끈히 할 줄 알게 된다면, 그땐 이 순진한 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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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주연(산책방)

일러스트 휘리